그라나다에서 세비야로
새벽 6시 30분경에 출발하는 세비야행 기차를 놓치지 않으려고 신경을 쓰면서 잤는지 밤 사이 여러 번 잠에서 께게 되었다. 여행 배낭을 메고 방을 나오니 복도식 테라스 위로 하늘에 펼쳐진 별들이 장관이었다. 아침의 시원한 공기를 깊이 흡입해 보았다. 기차역까지 걸어 도착하니 시간이 좀 남아서 역 안의 레스토랑에서 '카페 꼰 레체'(카페 라테)를 시켜 마셨다.
새벽에 출발하는 기차여서 승객들은 적었다. 출발예정 시간이 되자, 열차는 새벽의 푸르스름한 여명을 가로지르며 그라나다를 떠났다. 2박3일의 짧은 체류로 그라나다를 다 이해하기는 힘들 것이다. '이삭 알베니스'(Isaac Albéniz)가 작곡한 "그라나다"(Granada)라는 클래식기타 명곡을 들으며 아쉬운 마음을 달래 보았다.
https://youtu.be/EFoZJ25QL-U?si=WMaVEYvI5bAbMSZp
밤에 잠을 제대로 자지 못하여 자리에 앉아 조금이라도 숙면을 취하려고 눈을 감았다. 하지만 쉽사리 잠들지 못하고 여러 생각에 잠겼다. 아침 8시가 넘어가자 열차는 코르도바 역에서 잠시 정차할 거라고 안내방송이 나온다. 딸이 잘 지내야 될 텐데 걱정이 되었다. 다행히 카톡을 보니 아내와 딸이 한창 대화를 나누고 있다. 앞으로 1년 살게 될 숙소를 도심지역으로 정했으며, 이틀 전에는 로욜라 대학 학생들이 주관한 모임에도 갔다 왔고, 어제는 대학교에 가서 구내식당에서 식사도 했다고 한다. 오늘부터는 학교에서 해주는 스페인어 수업에 다니기 시작한다고 하며, 수강신청한 영어로 진행되는 강의들이 예상외로 어려울 것 같다고 걱정도 한다. 스페인 생활에 잘 적응 중이라고 판단되어 안심이 되었다.
기차는 어느덧 아침 9시 5분이 되자 세비야 역에 도착하였다. 밖을 나오니 날씨가 더워지기 시작했지만 코르도바에서 최상의 더위를 경험한 나에게는 이 정도는 문제가 되지 않았다. 세비야도 36도 정도까지는 기온이 올라가는 편이어서 덥고 태양이 강렬한 도시이다. 세비야는 마드리드, 바르셀로나에 이어 큰 도시 중 하나이며, 콜럼버스의 신대륙 발견 이후에 아메리카 대륙의 식민지에서 들어오는 각종 물류가 마드리드로 가기 전까지 집결하는 도시가 되면서 급성장하였다고 한다. 호텔까지 걸어서 약 35분 정도의 거리였지만 오후 2시부터 체크인이 가능했으므로 시간이 많이 남아 거리를 산보하듯이 천천히 걸었다.
호텔에 도착하여 여행 배낭을 맡기고 밖으로 나왔다. 근처 지리를 익히느라 호텔 바로 앞에 있는 조그만 광장의 벤치에 앉아서 구글 지도와 호텔에서 준 관광지도를 비교해 가며 대충 이해를 해 보았다. 그러고 나서는 도보로 약 20분 거리에 있는 플라멩코 박물관으로 향했다. 이 박물관은 스페인의 세계적인 플라멩코 여성 댄서인 크리스티나 오요스(Cristina Hoyos)가 설립한 것이다. 소규모 건물이지만 시간적 여유를 가지고 보아야 된다. 플라멩코에 대한 지식을 알려고 이곳을 방문한 분이 스페인 여행 후에 적은 책 속에서 이 박물관이 실망스러웠다고 기록하여서 나도 큰 기대를 갖지 않고 방문했지만, 의외로 배울 내용이 많았고, 플라멩코를 이해하는데 필요한 지식을 얻을 수 있었다. 건물 내부 곳곳에 시각적으로 첨단장비들을 통해 추상적일 수 있는 내용을 잘 형상화해 놓았고, 다소 전문적 지식은 화면을 클릭하며 보이는 텍스트를 다 읽어야 제대로 이해할 수 있었다. 아무튼, 시간이 많았던 나에게는 보물 같은 장소였다. 2016년에 오바마 미국 대통령이 세비야를 방문할 때 선물로 주려고 했던 스페니쉬 기타가 오바마 방문이 취소되어서 현재 플라멩코 박물관에 전시되어 있었다.
호텔로 돌아오기 전에 '타코벨'이라는 타코 전문 패스트푸드점에서 아침 겸 점심을 먹으며 시간을 더 보내다 호텔에 체크인하였다. 성당 바로 앞에 위치한 호텔은 3성급이지만, 아주 운치가 있고 남부 스페인의 분위기를 잘 느끼게 하는 파티오, 테라스, 건물을 잘 갖추고 있었다.
방 안으로 들어와서 짐을 풀고 샤워를 한 후 알람을 맞춰 놓고 바로 잠이 들었다. 두 시간 정도의 제대로 된 시에스타를 가진 후에 침대에서 일어났다. 저녁 7시 40분에 예약해 놓은 플라멩코 공연장으로 가기 위해 서둘러 호텔을 나섰다. 도보로 약 30분 정도의 거리였고 도중에 강을 가로지르는 다리를 건너야 했으므로 공연 직전에 겨우 도착할 수 있었다.
오늘 방문한 플라멩코 공연장인 '엘 팔라시오 데 안달루스'(El Palacio de Andaluz)는 그라나다에서 갔던 공연장에 비해서 대규모 극장식이었고 패키지여행으로 온 듯 보이는 한국인, 중국인, 러시아인 단체 손님들이 이미 가운데 객석 공간을 다 차지하고 있었다. 관람하기에 좋지 않은 각도이며 무대로부터 거리도 멀어서 불리한 조건에서 공연을 보았다. 극장식 공간이고 주요 손님들이 단체여행객들이어서 그런지 플라멩코를 약간 이해하기 쉽게 퓨전 형식으로 구성한 듯 느껴졌다. 플라멩코 박물관에서 알게 되었던 여러 스타일과 다양한 지방의 플라멩코를 간략하게 짜서 연이어 보여 주고 있었다. 재미가 있었던 부분은 비제의 오페라 카르멘의 일부분을 플라멩코로 재구성한 것이었다. 오페라 카르멘의 배경은 스페인의 세비야인 것을 알려 주고 싶은 제작자의 의도가 보였다. 오페라 중에서 유명한 부분인 여주인공이 부르는 아리아 '하바네라' 부분과 여주인공을 두고 남자 장교와 사랑을 경쟁하는 검투사가 등장하는 행진곡 부분을 공연에 플라멩코를 퓨전 화하여 삽입한 것이었다. 오늘 공연은 단체 손님을 겨냥한 상업적인 성격이 강했는데, 예술이란 것이 대중성을 무시하고서는 또한 살아남을 수 없으니 그 중간을 잘 파고든 공연이었다고 후하게 평가를 내려 보았다. 하지만 진정한 플라멩코를 느끼고 싶으며 또한 그것의 예술성에 더 비중을 두고 싶다면 소규모 공연장을 추천하고 싶다.
허기와 갈증을 달래기 위해 어느 거리의 구석에서 우연히 발견한 피자가게에서 피자 한판을 샀다. 오는 길에 까르푸 익스프레스에 들러 맥주 한 캔과 큰 생수병을 추가로 구매하여 호텔로 돌아왔다. 피자는 내일 아침과 어쩌면 저녁까지 먹을 수 있을 것 같다. 세비야에서의 첫날밤이 지나가고 있었다.
오늘 아쉬웠던 플라멩코 공연을 떠올리며, 이를 달래기 위해 플라멩코 풍의 스페인 클래식기타곡인 '이삭 알베니스'(Isaac Albéniz)의 '아스투리아스'(Asturias)를 들으며 잠을 청했다.
https://youtu.be/SRLq-G7BmGc?si=cVu1UWHAYho-oQk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