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르셀로나에 도착한 다음날은 아침 9시 30분까지 숙면을 취했다. 내일은 정오에 출발하는 기차로 마드리드에 가는 일정이므로 오늘 하루만 온종일 바르셀로나를 관광할 수 있었다. 그래서 아침 일찍 일어나서 관광지를 한 군데라도 더 다니는 것이 좋았지만 나는 무리하지 않기로 했다. 호텔 자판기에서 1유로에 파는 카페라테를 뽑아 들고 호텔에서 나왔다.
12시 30분에 '세그란다 파밀리아'(성스러운 가족이란 뜻인데, 바르셀로나 대성당을 말함)의 영어 가이드 투어를 예약해 놓았기 때문에 시간을 충분히 두고 그곳까지 여유롭게 걸었다. 호텔에서 도보로 25분 정도의 거리였다. 목적지에 거의 가까워지니까, 관광객들이 많아졌고 마침내 성당의 웅장한 모습이 눈에 들어왔다. 바르셀로나에 온 여행객들은 예외 없이 이곳을 방문한다.
바르셀로나의 부유한 출판업자가 종교심이 강했는지 이곳에 성당을 세워 주려고 땅을 구매하고 1882년에 공사가 시작되었다. 일 년 뒤에 30대 초반의 젊은 건축가인 가우디가 이 성당의 건축을 맡게 되었다. 가우디는 평범한 성당을 넘어선 웅장한 청사진을 가지고 시작하였으며 그가 교통사고로 죽은 해인 1926년까지 그의 전인생에 걸쳐서 공사를 진행하였다. 그의 생애에 완공이 못 될 것을 알고 있었던지, 성당의 반쪽만 완성하였는데, 후세 건축가들이 그것을 참고하여 다른 반쪽을 완성하고 있으며 그의 사후 100년을 기념하기 위해 2026년에 완공할 예정이다. 재정은 기부로 거의 충당되고 있으며, 내가 지불한 입장료도 이 성당 완공을 위한 비용으로 사용될 것이다.참고로, 입장권은 온라인에서만 구매할 수 있다고 한다.
유럽의 유명한 성당들과 비교하여 가우디의 바르셀로나 성당은 역사가 짧은 편이다. 하지만, 이 건축물의 외관과 내부에 그가 자연의 모습을 반영하고자 한 의도가 곳곳에 반영되어 있다. 또한 가우디가 당시 종교에 심취한 배경도 건축물의 조각상들에서 찾을 수 있었다. 예수의 탄생부터 부활까지의 성경 내용을 성당 외부의 여러 곳에 부착된 조각물에 담고 있었다.
완공 후에 성당내부로 들어가는 정문으로 사용될 곳에 성경구절이 여러 나라 말로 적혀 있었다. 한국어도 있었고, "오늘 우리에게 필요한 양식을 주옵소서"라고 쓰여 있었다. 서쪽 유리창에는 각 나라의 가톨릭 성인들이 적혀 있었는데, KIM이라는 글자도 찾을 수 있었다. 우리나라 최초로 신부님이 되었고 구한말에 순교한 김대건 신부님이 아닐까 추측이 되었다.
유럽의 유명한 성당들도 당시에는 건축기술이 지금과 같지가 않아서 최소 몇십 년은 걸리지 않았을까 생각되며, 지금 보고 있는 가우디의 바르셀로나 대성당도 100년 넘게 짓고 있는 것이 이해가 되긴 했다. 스페인 내전기간 동안 일부 훼손되면서 건축이 중단될 가능성도 있었다는데, 바르셀로나 시민들의 자발적인 성원과 기부 덕택에 성당 건축이 재개되었다고 한다. 이 모든 사실을 알게 되니 바르셀로나 시민들이 존경스럽다. 이것을 보러 나를 포함하여 전 세계에서 관광객들이 오고 있으니 말이다. 아무튼, 가우디의 건축물 중 한 곳인 바르셀로나 대성당은 충분히 방문할 가치가 있다고 생각하며 밖으로 나왔다.
가우디의 다른 건축물도 입장권을 예매할까 고민하다가 그냥 걸어 다닐 수 있는 거리에 있는 가우디 건축물의 외관만 밖에서 구경하기로 결정했다. 사진에 자주 나오는 구엘공원은 한번 가보고 싶다는 충동이 생겨 온라인으로 조회를 해보니 내가 바르셀로나를 떠나는 내일까지 표가 모두 매진이었다. 오히려 잘 되었다 생각하며 걸어서 차례대로 카사 밀라, 카사 바트요, 구엘 저택을 찾아가서 밖에서 건물외관을 감상했다. 바르셀로나 부자들이 자신의 집을 가우디에게 의뢰하여 지어진 것으로 외관상으로 당시의 건축 트렌드를 앞서 가지 않았나 생각이 들었다. 시대를 앞서간 바르셀로나 예술가는 미술에서 피카소, 건축에서는 가우디가 아닐까 싶었다. 구엘 저택 근처에는 고딕양식 건물지역이 있어서 골목 구석구석을 걸어 다녀 보았다. 카탈루냐 성당도 지나가다 보았지만 피곤하여 들어가 보지는 않았다. 외관상으로 아름다운 건물이었다.
점심은 작은 마트에서 물과 샌드위치를 사서 먹었더니, 배가 고파졌다. 저녁 식사는 중국인들이 운영하는 스페인 식당에서 하였다. 같은 중국인이라고 생각했는지 중국어로 말을 걸어왔다. 서툰 스페인어로 대답을 하니까, 관광객인 줄 알고는 스페인어로 언어를 바꾸었다. 쌀밥이 먹고 싶어서, 오징어 먹물 들어간 검은 쌀밥을 올리브 넣고 냄비에 볶은 빠에야를 시켰다. 이전에 빠에야 먹었다가 너무 짜웠던 악몽이 있어서, '신 살'(소금 넣지 말고 달라는 뜻)이라고 부탁했더니, 주인이 소금 안 넣고는 못 만든다고 하며 소금 넣어야 한다는 뜻으로 "꼰 살"이라고 한다. 할 수 없어서 그냥 '발레'(오케이)라고 말해 줬다. 드디어 음식이 나와서 숟가락으로 검은 쌀밥을 눈을 감고 입에 넣었다. 그런데, 다행히 그렇게 짜지가 않았다. 감동의 눈빛으로 주인아주머니를 순간 쳐다보니, '그래. 내가 신경 좀 썼다'는 표정이다.
호텔에서 도보 10분 거리에 카탈루냐 음악당(Palau de la Música Catalana)이 있었다. 클래식 음악을 주로 공연하는 곳으로 건물 외관도 아름답지만 내부의 공연장도 무척 멋진 곳이다. 바르셀로나에서 나의 마지막 날인 금요일 밤 8시에 '바르셀로나 트리오'라고 하는 세계적으로 유명한 삼인조 클래식기타 연주자들의 공연이 있는 것을 알게 되어 미리 예매를 하고 음악당을 방문하였다.카탈루냐 음악당은 유서 깊은 곳이므로, 바르셀로나에 가게 된다면 사실 이 곳을 방문하고 싶었다. 이 곳에서 공연까지 보게 되면 더 좋을 것이라고 생각을 하긴 했었다. 20세기에 나온 세계적으로 유명한 협주곡 중 하나가 이 음악당에서 처음 공연되었다. 아랑훼즈 협주곡(Concierto de Aranjuez)은 스페인의 작곡가인 '호아뀐 로드리고'(Joaquín Rodrigo, 1901~1999)가 1939년에 만들었으며, 1940년에 바르셀로나의 카탈루냐 음악당에서 '레히노 사인츠 데 라 마싸'(Regino Sainz de la Maza)의 클래식 기타와 바르셀로나 필하모니 오케스트라의 협주로 처음 공연되었다. 아랑훼즈 협주곡 중 제2악장 '아다지오'(Adagio)가 제일 잘 알려져 있는 편이다.
오늘 공연은 기타 연주에 춤이 같이 곁들여진 형식이었고, 퍼커션 연주자도 한 명 참여하였다. 공연장들의 명성에 걸맞게 삼층 객석까지 자리가 모두 다 채워졌다. 스페인의 작곡가들이 만든 곡들을 대부분 빠른 리듬으로 연주하였고, 한곡은 한국인 피아니스트가 작곡한 곡을 기타로 연주한다는 뜻인지, 아니면 한때 한국인 뮤지션이 같이 연주를 하여서 그에게 이 곡을 바친다는 뜻인지 애매하게 들리긴 하였는데, 귀에 익은 음악이었다. 무용수들도 남녀가 플라멩코를 추기도 하며 일부는 발레 같은 춤을 추기도 하였는데 춤의 선이 보통 아름다운 게 아니었다. 이전에 봤던 플라멩코 공연자들과 비교하기는 어렵지만 춤의 기본기가 탄탄한 사람들이라고 느껴졌다.
공연의 마지막 하이라이트는 한 명의 기타리스트가 앉아서 기타를 치면 다른 두 명의 기타리스트와 퍼커셔니스트 한 명이 앞뒤 좌우에서 밀착하여 하나의 기타를 가지고 동시에 연주를 하는 것이었다. 네 명이 한 기타로 멜로디, 리듬, 화음을 완벽히 만들면서 마이클 잭슨의 '빌리 진'을 연주하였다. 이 연주장면은 유튜브에서도 검색할 수 있다. 스페인에 와서 본 제일 수준 높은 공연이었다.
공연이 끝나자 아쉬움을 뒤로한 채 카탈루냐 음악당을 나왔다. 근처의 어느 레스토랑에서 쿠바 음악인 '찬찬'(Chan Chan)이 흘러나온다. 가수가 기타를 치며 노래를 부르고 있었고 색소폰 연주자가 그의 노래를 받쳐 주고 있었다. 광장의 어느 구석에 앉아서 레스토랑에서 흘러나오는 그들의 음악을 들었다. 다음에 나오는 곡도 쿠바음악인 '라 그리마스 네그라스' (La grimas negras)였다. 쿠바음악이 좋아서 한때 쿠바여행을 가려고 비행기까지 예약했다가 코로나로 취소된 기억이 떠 올랐다. 그 미련을 저들의 쿠바음악을 들으면서 흘려보내고 있었다. 바르셀로나에서의 나의 마지막 밤이 깊어져 가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