삽화

31 너란 녀석

by 글마중 김범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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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비춤을 닮은 것 같기도

안개 자락을 닮은 것 같기도

살얼음을 닮은 것 같기도 한

외로움 너란 녀석


머-언 유년부터 오늘까지


무게 없는 무게로

무등을 타고

호시탐탐 기회를 엿보는

외로움 너란 녀석




32. 전생에 무수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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네 명 중 나만 골프 초년생이다.


남자인 손 교수는 드라이버 200m를 날리고 홀인원 경력이 있는 지회장과 구력이 오래된 윤 미용장 역시 아주 잘 쳤다. 한눈에 분위기를 파악한 캐디는 은근슬쩍 내 골프채만 받지 않는 만행을 감행했다. 2번 홀에 도착하자 내 차례인데 서둘러야 진행이 원활하다며 제 마음대로 순서를 바꾸더니 클럽 하우스 안에 있는 식당에서 아침 식사할 거니까 사인부터 하라고 했다. 간식을 준비해 온 우리가 거절하자 급히 몰아세운 속셈을 들켰는데도 무안해 하기는커녕 불쾌한 표정을 숨김없이 드러냈다.


3번 홀 그린에서는 분풀이 상대를 나로 점찍었는지 옆에 바짝 다가서서 각도가 안 맞는다고 손으로 퍼터 헤드를 휙 밀치기까지 했다. 캐디 간섭이 못마땅하기 짝이 없었으나 전생에 무수리였는지 소심해서 싫다고 의사표시를 하지 못했다. 기분도 그렇고 실력조차 없으니 당연히 홀컵에 다다르지 못했다. 캐디는 대여섯 살짜리를 나무라듯 으이구! 했다.


- 뭐야, 이건 핀잔을 넘어 구박에 가깝잖아! -


이 대접을 받으려고 새벽 4시부터 일어나 고속도로를 달려 이 깊은 산속까지 왔나 몹시 언짢았다.


카트가 가파른 경사로를 따라 언덕 끝까지 올라갔다. 눈 아래 아득한 골프장이 펼쳐졌다. 세 사람은 난코스라고 걱정했지만 골린이(골프초년생)인 나만 아름다운 풍경에 반해 탄성을 질렀다. 그런 내 모습읍 본 캐디가 한껏 비웃었다.

“다른 분들은 다 괜찮은데 사모님이 제일 큰 문제라고요!”

그 한마디에 잊고 있던 울분이 확 치솟아 버럭 소리쳤다.

“문제라니, 뭐가 문젠데?”

캐디 말투가 금방 상냥하고 공손해졌다.

“저는 다만 OB 나서 공 잃어버리고 사모님 속상하실까 봐서요.”

“됐어요. 앞으로 절대 참견하지 말아요!”


화내면 지는 싸움이다.

그런 줄 알지만 소리치고 나니 속이 시원했다.


다시 캐디의 깍듯한 예우를 받으며 골프를 끝냈다. 손 교수가 말했다.

“말도 마세요. 캐디 심부름하면서 골프 친 적이 아주 많았답니다.”


다음날 연습장에서 회원한테 그 이야기를 했더니 그 정도는 다반사고 자기 남편도 캐디들한테 푸대접받고 속상해한 적이 많다고 했다. 좋은 게 좋다고 기분 나빠도 꾹꾹 참으며 그냥 지나친 게 일부 캐디들의 근무 태도를 안이하게 굳혀 놓은 것은 아닐까?


캐디는 서비스가 기본인 전문 직업인이다.


앞으로 기본을 벗어나 선을 넘는 캐디가 있으면

즉시 지적하고 태도가 바뀌지 않으면 카운터에

불만 사항으로 접수한다고 경고할 것이다.




33. 발등 찍고 싶은 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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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야흐로 밤 줍는 계절이 돌아왔다.


후드득! 소리 난 곳을 가보면 반들반들 윤이 나는 알밤이 오롯이 기다리고 있었다. 보물이라도 발견한 듯 가슴이 뛰었다. 아주 어렸을 때부터 밤 줍는 재미를 알기에 알맞은 농장과 날짜를 정한 다음 누구와 갈 것인가 고민 끝에 전화를 했다.


“밤 주우러 가요!”

나보나 열한 살 많은 아주머니를 졸랐다. 밤 줍기 명분으로 만날 기회를 만들기 위해서이기도 했다.

“몇 년 전 관절염 수술해서 산을 못 타서 싫어.”

“산 중턱 밭둑에 밤나무가 있어요. 그냥 바람 쐬러 간다고 생각하시면 돼요.”


그랬다. 맛있는 점심도 대접하고 밤을 주우면 다 아주머니께 드릴 것이었다.


아주머니는 어머니 팔촌 동생이다. 중학교에 진학하면서 한 달에 쌀 서 말씩 내고 시내에 있는 아주머니 집에서 지냈다. 야무지지 못한 나는 천리타향에 귀양살이라도 온 듯 밤이 되면 이불속에서 옆에 자는 할머니한테 들킬까 봐 숨죽여 울다 잠이 들었다. 토요일마다 시골집에 가는 데도 1학기 내내 그랬다. 허허롭기 그지없는 나한테 한 줄기 빛이 있었다. 바로 아주머니였다. 미용사인 아주머니는 미용실 쉬는 날에만 집에 왔다.

“잘 있었어? 이리 와서 얼른 먹어, 우리 범순이가 좋아해서 많이 사 왔지!”

아주머니는 말끝마다 우리 범순이 우리 범순이 했다. 신세 지고 있다는 부담감으로 의기소침해 있던 나한테 우리 범순이라는 말은 존재를 인정해주는 울림 있는 고귀한 사랑의 다섯 음절이었다.

아주머니 어머니인 할머니는 아저씨와 친정 조카를 데리고 숙제를 하는 내 등 뒤에서 쟤는 이런 것 안 먹는다며 먹어보라는 말 한마디 없이 오도독, 오도독 맛있게 해삼을 먹은 일이 있었다. 꿀떡! 꿀떡! 나도 모르게 침이 넘어갔다. 외로운 나한테 아주머니는 아름다운 천사였다. 한번 천사는 영원한 천사다. 나는 아름다운 나의 천사에게 소설가가 되어 첫 데이트를 신청했고 받아들여졌다.


밤나무 밑에는 큼직한 알밤과 밤송이가 떨어져 있었다. 아주머니는 수술 후 균형 잡기가 어려워 집게로 밤송이 벗기는 일이 힘들다고 했다.

“힘들면 천막 아래서 쉬고 계세요.”

“알았어. 내 걱정하지 말고 어서 주워.”

그러면서도 아주머니는 밤나무 밑을 떠나지 않더니 보이지 않았다. 그리 오래지 않아 나 역시 허리가 아파 그만 줍기로 했다.


“아줌마!”
아주머니는 천막 아래에서 저수지를 아련하게 감상하고 있었다.

가까이 다가가던 나는 깜짝 놀랐다. 아주머니 윗입술에 피가 배어 있었다.

“돌부리에 걸려 넘어졌어. 괜찮아”

“어떡해, 싫다는데 모시고 와서 그런가 봐요.”

아주머니가 안 괜찮은 척해 보이느라고 활짝 웃었다. 나는 억장이 무너졌다.

“아, 아줌마. 앞니도 부러졌어요.”


식사 끝나고 대청호 주변 드라이브나 할걸!

발등을 찍고 싶다.




34. 3박 4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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간단하게 짐을 꾸려 집을 나섰다.

저녁도 거르고 빨리 잠들기 위해 라디오 문학관을 청취했다. 휴대전화로 소설을 듣다니! 세상 참 좋다. 낯선 환경인데 금방 잠들었다. 최고의 수면제다.

“김범순 님!”

새벽 4시 20분. 게으른 나한테는 살인적으로 이른 시간이다.

“체온 혈압 정상입니다. 항생제 부작용 테스트 시작하겠습니다.”

이번 여행의 목적지는 병원이다. 남편이 간호할 형편이 아니라 공동간병실에 입원했다. 즉시 수액부터 꽂았다. 그거 하나 달았을 뿐인데 부자연스럽고 금방 중환자가 된 것 같다.


화장실에 갔다. 링거 거치대 때문에 문이 닫히지 않아 난감했다. 병실로 돌아오니 무엇을 하려는지 간호사가 기다리고 있었다.

“배뇨관 삽입하겠습니다. 많이 불편하실 거예요.”

소녀 적부터 넓은 창가에 꽃바구니가 놓인 병실에 누워있는 것이 로망이었는데 언제나 이상과 현실은 거리가 멀었다. 요도를 찢어발기는 줄 알았다. 아, 이건 아니었다.

오전 8시 30분. 작고 동그란 무영(無影)등이 수없이 달린 수술실에 도착했다. 의사가 물었다.

“생애 처음 하는 수술이라 긴장되지 않으세요?”

“암으로 변이 되면 안 되잖아요. 괜찮습니다.”

칼로 배를 저미는 것처럼 아파서 눈을 떴다. 회복실이었다. 약 한 시간 정도가 지나 있었다. 견딜 수 없어 진통제 버튼을 수시로 눌렀더니 어지럽고 메슥거렸다. 울컥울컥! 누운 채 창자 속의 쓴 물을 모두 토하고 그대로 까부라졌다가 오후 4시에 깼다. 옆으로 돌아누우려다 비명을 지르며 그대로 멈췄다. 배가 땅겨서 조금도 움직일 수 없었던 것이었다. 간호사한테 목이 말라죽겠으니 물 한 모금만 먹게 해달라고 애원했다. 안 된다고 단칼에 자르며 명령했다.

“얼른 기침하고 가래나 뱉으세요!”

기침하면 배가 꿰질 것 같은데 저런다. 고통 없는 일상이 뼈저리게 그리웠다.


소등은 밤 9시. 진통제에 취해 온종일 자서 말똥말똥했다. 왼쪽 침대 85세 강은식 님은 점잖아서 한숨조차 낮게 쉬었고 건너편 97세 김고만 님은 잠꼬대인지 혼잣말인지 계속 중얼거렸다. 가운데 침대는 비어있고 창가 93세 정연순 님과 오른쪽 95세 임병자 님은 가래가 들끓어 나까지 숨이 찼다. 간병사 A는 밤새도록 2~30분마다 두 환자를 오가며 흡인기로 뽑아냈다. 통증과 배고픔을 잊기 위해 이어폰을 귀에 꽂았다.

병원에서의 둘째 날 아침이 밝았다.

“식사 왔습니다!”

꼬박 40시간을 굶은 나였다. 벌떡 일어나다 깜짝 놀라 침대 난간을 꽉 잡았다. 수술 자리가 찢어지는 것 같았기 때문이었다. 흰 죽에 오징어 국, 배추무침, 닭볶음, 도라지볶음, 백김치, 우유가 나왔다. 닭볶음은 비리고 배추무침과 백김치는 지리고 오징어 국은 썼다. 그중 먹을만한 도라지볶음과 죽 1/3을 간신히 먹었다. 가끔 식탁에서 지금의 내 표정을 짓던 남편 모습이 떠올랐다. 남이 차려준 밥상을 받아보니 알겠다. 그동안 말도 하지 못하고 고생 많았다.

링거 거치대를 끌고 걸어보니 그런대로 괜찮은데 간호사가 무리하면 큰일 난다고 했다. 병실로 쫓겨 들어오니 고새 난리가 나 있었다. 간병사 B가 김고만 님이 애원한다고 묶어 놓은 손을 풀어줘 코에서 위까지 연결하는 비위관을 잡아 뺀 것이었다. 의사 둘과 간호사가 다시 넣기 위해 진땀을 흘렸다. 30분에 걸쳐 비위관을 삽입하고 의사와 간호사가 나가자 간병사 B는 곧바로 주사기로 비위관을 통해 유동식을 주입했다. 약을 가지고 온 간호사가 소리쳤다.

“식도에 상처가 나서 피를 그렇게 많이 토했는데 벌써 식사를 주면 어떡해요?”

간병사 B는 간호사가 나가자 그럼 언제 주란 말이냐고 끊임없이 투덜거렸다. 자세가 딱 아마추어다. 초보라는 것을 알아차린 정연순 님은 가래 뽑을 때 협조하지 않고 심지어 때리기까지 했다. 중환자니까 아무것도 모르겠지 하고 ‘빨리 자라, 나도 잠 좀 자자!’하며 함부로 대한 대접이었다.

강은식 님은 열흘 만에 대변을 보았다고 했다. 간병사 B는 옆 병실 동료들을 불러 구경시키며 양이 어마어마하다고 호들갑을 떨었다. 점잖은 분이 얼마나 치욕스러웠을까? 님은 큰 잘못을 저지른 것처럼 끊임없이 죄송하다고 했다. 어제 근무했던 간병사 A는 김고만 님이 목욕 직후 갈아입은 옷에 대변을 지려도 눈살 하나 찌푸리지 않고 안심시키며 어리광까지 부려 웃게 했었다. 한눈에 A와 B가 비교되었다.

“어머니!”

강은식 님 작은 며느리가 왔다. 강은식 님은 너희들 생고생시키며 이렇게 살아 뭐 하느냐고 엉엉 소리 내어 서럽게 울었다. 며느리도 그런 시어머니를 쓸어안고 함께 울었다. 내 며느리도 저럴까? 부러워서 그런지 왠지 울컥했다.

3일째 되는 날 오후 주임 간호사가 간병사 B에게 또박또박 지시사항을 전했다.

“간병사 필요 없는 환자예요. 병실이 없어서 오늘 하룻밤만 여기 있는 겁니다!”

맞은편 비어있던 침대로 90세 신무진 님이 들어왔다. 간병사 B는 두 환자 목에서 가래가 넘쳐 숨이 넘어갈 듯 괴로워하는데도 멀쩡한 신무진 님 수발들기에 여념이 없었다. 저녁 식사가 왔다. 수증기로 찐 밥은 찰기가 없어 푸슬푸슬했다. 물에 말아 억지로 먹고 있는데 신무진 님이 맹꽁이를 맷돌에 가는 것 같은 목소리로 계속 말했다.

“나, 똥 눴어. 수건 적셔와!”

설마 나한테 하는 소리는 아니겠지? 묶인 손을 풀어달라고 애원하는 김고만 님도 본체 하지 않았던 나였다. 귀 닫고 열심히 수저질만 하는데 불호령이 떨어졌다.

“늙은이가 말하는데 젊은것이 목구멍으로 밥이 넘어가냐?”

나를 향해 던진 소변 통이 바닥에 나뒹굴었다. 화가 치밀어 수저를 탁! 놓고 밖으로 나와 간호사한테 일러바쳤다. 신무진 님 아들이 왔다. 님은 아들 멱살을 잡고 흔들며 악을 썼다.

“병도 없는데 왜 입원시켜? 꼼짝 말고 내 곁에 있어!”

“이 병실은 보호자 침대가 없어서 못 자요. 아침에 일찍 올게요.”

“날바닥에서 자! 에미는 지옥에 내버리고 너만 집에 가서 계집 끼고 편히 자겠다고?”

아들은 이렇다 저렇다 말이 없더니 어느 결에 가버렸다. 걱정했던 것과 달리 병원에서의 마지막 밤은 조용하게 보냈다. 오전 10시 퇴원 허가를 기다리고 있는데 신무진 님 아들이 와서 병실을 옮겼다. 한번 들어가면 죽어야만 나올 수 있는 호스피스 병동으로. 어휴-! 하마터면 말기 암 환자와 대판 싸우고 두고두고 후회할 뻔했다.

여행은 본질로의 회귀라고 했다.

3박 4일의 색다른 여행을 끝내고

모든 것이 익숙해서 몸과 마음이 편한 집으로 돌아왔다.

며칠 뒤 남편이 히죽거리며 야비한 웃음을 흘렸다.

눈치채고 얼른 일침을 놓았다.

쓸개 빠졌다고 놀리면 죽는다!

(2020.9.10.)


** 내일 담낭 수술하는 사랑하는 동생에게 2023년 1월 4일 언니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