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9. 사위한테 절한 남자
- 나의 아버지 -
45년 전 남편 친구 B가 나의 아버지를 팔았던 일화다.
씩씩하고 장난기 넘치는 남편과 달리 B는 내성적이고 말수가 아주 적었다.
그런 B가 예비 처가에 인사하러 가서 장인감에게 이렇게 말했다.
“제 친구 A는 예비 장인이 절까지 하며 융숭하게 맞아들였대요.”
기상천외한 그 말을 전해 들은 나는 어이가 없었다.
“머리 좋은 B가 왜 그런 실수를 했대? 돌아가신 지 20년 넘은 우리 아버지를 살려낸 건 좋아 그런데 어쩌자고 사윗감한테 절을 시키냐 기분 나쁘게.”
“그 자식한테 그렇게 엉뚱한 구석이 있는지 꿈에도 몰랐어.”
“예비 장인 반응은 어땠을까? 굉장히 궁금하다.”
“세상에 그런 미친놈이 어딨어, 너 지금 나한테 절 받고 싶다 이 거냐? 당장 내 집에서 나가! 하고 호통쳤대.”
어쨌든 B는 무사히 결혼해 지금까지 잘 살고 있다.
오래 방치했던 노트북을 열었더니 2021.10.29일 제목만 쓴 글이 있어 오늘 완성했다.
40. 니들이 왜 거기 있니
며칠 전 대전역에서 서울행 기차 시간이 남아 대합실 의자에서 브런치 글을 읽고 있었다.
- 휙 푸르르! -
머리 위로 무언가가 무게감 있게 공기를 가르며 날아갔다.
머리카락 몇 올이 날릴 정도였으니 분명히 종이비행기는 아니다.
소란을 기대했으나 그 누구도 반응하지 않았다. 나만 예민한가? 그때였다.
조금 떨어진 곳에서 무언가가 지나가는 것이 곁눈으로 얼핏 보였다.
얼른 고개를 돌려봤지만 아무것도 없다.
역시 내가 예민해, 하며 읽다만 글을 읽으려는데 또 지나갔다.
자리에서 일어나 움직임이 감지된 곳으로 살그머니 다가갔다. 어머나, 세상에! 어떻게 들어왔는지 비둘기 두 마리가 과자 부스러기를 먹고 있다.
니들 어쩌면 좋으니, 대합실에서 계속 지내게 하지 않을 텐데
41. 나 원고 청탁 받았다.
- 딸이 보내온 네덜란드 아침 풍경. 맑고 희망찬 내 마음 같다 -
- 딸이 보내온 네덜란드 아침 풍경. 맑고 희망찬 내 마음 같다 -
누워서 게임을 하고 있는데 휴대전화 벨이 울렸다. 대인 관계 폭이 좁고 문자로 대화하기를 좋아하는 내 전화기는 언제나 꿀 먹은 벙어리다. 어쩌다 걸려온 건 광고나 불온 목적의 전화였기에 심드렁하게 발신자를 확인했다. 뜻밖으로 유달상 교수님이었다. 벌떡 일어나 공손한 자세로 전화를 받았다.
“다음 주 수요일 오후 2시에 시간 낼 수 있나요?”
골프 연습장 가는 시간이었지만 간단히 접고 시간 낼 수 있다고 했다. 아주 중요한 선약이라 하더라도 교수님이라면 주저 없이 바꿀 수 있었다.
문학박사 유 교수님은 그림자도 밟기 송구한 스승님이다. 2014년부터 시민대에 다니며 유 교수님한테 소설 교육을 받아 2021년 10월 문학시대를 통해 소설가가 되었다. 등단 이후에도 강의 내용 전체가 어록이라 계속 수강하고 있다.
“아끼는 후배한테 글 청탁을 받아서 작가님을 추천했어요. 고료는 섭섭지 않을 겁니다. 자세한 것은 그날 만나서 이야기하지요.”
글이라면 교수님이 백 배 천 배 더 잘 쓴다. 아무래도 탈모 관리를 전문으로 했던 미용장이라는 명분을 내세워 나에게 길을 열어주려고 양보한 것 같았다. 어쨌든 작가로서의 첫 원고 청탁을 받은 것이었다. 서막이 장쾌하게 열린 것 같아 호흡이 벅찼다. 동생이 준 새 수첩을 펴고 등단 기념으로 사위가 선물한 명품 펜으로 질문 내용을 꼼꼼하게 기록했다.
드디어 그날이 왔다. 교수님은 우리 집까지 와서 나를 태우고 약속 장소로 갔다. 3월에 탈모 방지 샴푸와 토닉 출시를 앞둔 대표이사와 교수님 후배 마케팅팀장을 만났다. 외국 생활을 오래 한 대표이사는 이탈리아 전문가에게 아로마 오일 및 유효 성분 배합 기법을 전수받았다고 했다. 이런저런 이야기를 하다 보니 금방 한 시간이 지나갔다.
순수하고 인자한 모습의 대표이사였다. 경험을 토대로 기획한 사업이라 신뢰할 수 있었고 마케팅팀장은 기발한 아이디어가 무궁무진해 찬탄을 금치 못했다. 준비한 궁금증을 하나하나 풀어가며 글 바탕을 엮던 나는 어렵지 않게 결론 내릴 수 있었다.
- 이 사업을 성공시키기에 나의 필력은 형편없이 부족해 -
며칠 지났지만 나는 근거 없는 자신감으로 이렇게 큰소리친다.
원고 청탁받아봤으면 이미 성공한 거나 다름없다고.
2023.2.12
42. 어쩌다 보니
- 딸이 보내온 사진 -
VAAN은 네덜란드어로 풍향계, 바람개비를 뜻하며 딸네 갤러리 이름이다.
기분 꿀꿀할 때는 달달한 거 보기만 해도 위로가 된다.
무 썰다 손가락 끝도 같이 썰었다. 삼빡한 느낌을 따라 피가 뚝뚝 흘렀다. 구급상자에 그 많던 1회 용 밴드가 다 어디로 가고 딱 한 개 남아있다. 잃어버리기 전에 얼른 사다 놔야겠다. 운동을 마치고 곧바로 아파트 상가 약국으로 갔다.
“대일밴드 한 갑 주세요.”
친절하지도 불친절하지도 않은 무표정한 약사가 밴드 갑을 건넸다. 현금은 길가에 있는 단골 좌판에서 채소를 사기 위해 카드로 계산했다. 카드를 받아 드는 약사 얼굴에 불쾌한 기색이 역력했다. 은근히 기분 나빠 속으로 헐뜯었다.
-그렇게 장사해서 돈 벌겠니? -
싱싱한 채소를 골고루 사고 주머니에서 현금을 꺼내는데 하얀 종이가 따라 나왔다.
약국에서 받은 카드 영수증이었다.
영수증을 읽던 나는 약사 표정이 왜 변했는지 알게 되었다.
품목 1회 용 밴드
수량 1
가격 1000원
대일밴드 한 갑이 천 원일 줄이야!
적어도 사오천 원은 할 줄 알았다.
어쩌다 보니 나는 아주 재수 없는 손님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