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착륙 전 비행기에서 찍은 모습 -
비행기 좌석은 마음에 들었다. 점심은 자주 접하지 않아 부담스러운 스테이크 대신 갈비찜과 황태구이를 먹었다. 갈비찜은 지나치게 짜고 달았으며 황태구이는 맵고 짰다. 여행준비로 며칠 잠을 설쳐 입맛이 까다로워진 모양이다. 뜻밖으로 된장국은 얼마나 맛있던지 밥을 말아 마파람에 게눈 감추듯 먹어치웠다. 포도주를 한 모금 청하고 과일과 세 종류의 맛있는 치즈와 캐모마일차를 마셨다.
배불리 먹고 길게 누웠다. 생각보다 아늑하고 편했다. 하지만 그렇게 좋기만 하면 김범순 일상이 아니다. 걱정했던 사태가 벌어지고 말았다. 눕자마자 찬 공기가 스치더니 재채기가 나고 기침이 쏟아졌다. 여행하기 전 기침 문제로 병원에 갈까 말까 고민하다 저녁에 한 두 차례니까 괜찮겠지 싶어 그냥 왔었다. 재채기를 할 때마다 승무원한테 휴지를 얻어 주체할 수 없이 쏟아지는 콧물을 닦으며 약 처방받아오지 않은 것을 후회하고 또 후회했다.
네 시간 정도 누워 있었는데 잠은 안 오고 끊임없이 기침을 해 승객들한테 몹시 미안했다. 코로나 시절이었으면 비행기 밖으로 쫓겨났을 것이다. 잠 안 들고 분명히 깨어 있었는데 꿈을 꾸었다. 노인들이 간밤에 한숨도 못 잤다고 하소연하면 옆에 있던 가족들이 밤새워 코 골더라고 하는 것과 같은 현상인 것이다. 저녁을 먹고 나니 비행시간이 한 시간 반 남았다고 했다.
영화 '헤어질 결심'을 보았다. 리모컨을 만지다 보니 리모컨에 승무원 부르는 기능이 있었다. 내릴 때 다 돼서야 알게 되다니 어이가 없다. 그 방법을 몰라 화장실에서 휴지를 가져다 수납공간에 넣고 썼다. 짐 정리를 하다 보니 화장실 갈 때마다 휴지를 가져와 다람쥐처럼 수북하게 쌓아놓고 있었다. 보는 이 없어도 편집증 앓는 노인 같아 몹시 부끄러웠다.
비행기 속도가 느려졌다. 착륙이 가까워진 것이다. 놓고 내리는 짐이 없도록 신경 써서 챙겼다. 어딜 가나 무엇이든 꼭 빼놓기 때문이다. 엉뚱한 짓도 잘해서 혼자 떨어질까 봐 바짝 긴장하고 비행기에서부터 놓칠세라 한국인 뒤를 부지런히 따라 입국 심사하는 곳까지 무사히 와서 줄을 섰다. 입국 절차를 끝내고 나오자마자 바로 옆에 짐 찾는 컨베이어 벨트가 있었다. 짐 찾기 전에 화장실부터 갔다.
눈을 부릅뜨고 출구 왼쪽에 있는 13번 컨베이어 벨트 전광판을 몇 차례 훑어봤지만 KE925는 없었다. 자국 항공사가 아니니까 멀리 배치했겠지 하고 8번까지 여섯 군데를 여러 번 오가며 살펴봤지만 없었다. 바로 내 앞에서 입국 심사를 받던 남녀 커플을 찾았지만 화장실 갔다 온 사이 벌써 짐을 찾았는지 보이지 않았다. 그러면 그렇지. 쉽게 될 리가 없지. 참으로 난감했다.
딸이 4번 출구에서 기다린다며 톡을 보내왔다. 잘 도착했다고 답하고 초록색 우리나라 여권을 든 사람을 찾아 돌아다녔다. 얼마 안 가 우리나라 말이 들렸다. 구세주를 만난 듯 반갑게 쫓아가 아는 체했다. 친구 셋이 큰맘 먹고 열흘간 여행을 왔다는 그녀들도 나처럼 짐 찾는 곳을 찾아 헤매고 있었으므로 아주 반가워했다. 그녀들과 함께 찾았지만 헛수고였다. 친구 1이 소리쳤다. 1-7이 다른 곳에 있어 저 경사로로 가나 봐. 우르르 몰려가서 샅샅이 확인했지만 없었다. 영어를 한다는 2가 말했다.
“이럴게 아니라 내가 물어보고 올게.”
한참 뒤 2가 안내원을 데리고 왔다. 안내원은 우리를 심사대와 멀리 떨어진 전체 전광판 앞으로 데리고 갔다.
“저기 20번에 KE925 있다!”
다시 8-13을 지나 입국 심사대 오른쪽에 있는 20번을 향해 끝이 안 보이는 공항 통로를 걸었다. 그때 저만치서 초록색 여권을 들고 우왕좌왕하는 가족들이 보였다.
"20번이에요. 그쪽으로 가지 말고 저희 따라오세요!"
비행기에서 내릴 때 승무원들은 줄지어 서서 인사를 했다. 안녕히 가세요. 또 만나 뵙겠습니다! 형식적인 인사만 할 게 아니다. 편하게 돌아갈 수 있도록 짐 찾는 곳이 몇 군데니 주의하고 전체 전광판 있는 곳을 안내했어야 했다.
초대형 가방은 20번 컨베이어 벨트를 몇 바퀴나 돌았는지 아주 불편한 모습오로 누워있었다. 반갑게 손잡이를 잡고 끌어내렸다. 꿈쩍도 하지 않고 그냥 지나쳤다. 내가 당황하자 외국인 남자가 얼른 내려줬다. 여기저기 둘러보며 카트를 찾았지만 발 빠른 사람들이 다 차지하고 한 개도 없었다. 반가움도 잠시 고장 난 가방을 끌고 씨름할 생각에 어깨가 무거웠다.
같이 헤매며 정든 친구 1,2,3과 작별 인사를 하고 말썽꾸러기를 간신히 끌며 밖으로 나가는 줄끝으로 갔다. 아까 만났던 가족들이 기쁜 마음으로 잘 가라고 했다. 그 순간 모든 걸 잊고 환한 마음으로 인사했다. 비상구 표시가 난 곳으로 앞사람을 따라 걸으며 혹시 계단이 또 있으면 어쩌나 근심하며 조심스럽게 발을 내디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