죽을 권리

2. 1985년 5월 6일

by 글마중 김범순
고 2.jpg

사진 : 고은별


온종일 흐렸다.


오후 6시가 훌쩍 넘었다. K는 또 늦는 모양이다. 학교 바로 밑에 살아서 퇴근하면 집까지 도착하는 데 5분도 안 걸린다.


초등학교 3학년 딸과 1학년 큰아들 숙제를 살펴주고 저녁을 먹이고 있는데 전화가 왔다. K가 가장 아끼는 고교 후배 염 선생이었다.

“형수님 여기 대학병원 응급실입니다. 빨리 오세요!”

염 선생은 숨 가쁘게 이 말만 하고 전화를 뚝 끊었다.


무슨 일이지?

어디 다쳤나?


몇 달 전에는 헬멧을 쓰지 않고 아는 동생 오토바이 뒷자리에 탔다가 많이 다친 적이 있었다. 틀림없이 운동장에서 학생들과 피구를 하다 심하게 다친 것 같았다.


택시를 타고 도착한 병원의 넓고 환한 응급실 침대에 K가 말짱한 모습으로 누워있었다. 피범벅이 아니라 안심한 너는 피식 웃음이 나왔다.


“아니, 집 놔두고 왜 여기 누워있대?”

“···!”


K는 말간 눈으로 올려다보았다. 눈동자는 초점이 없었고 너를 몰라보는 것 같았다. 억장이 무너져 휘청했다.

너의 목소리가 갈라졌다.


“여보 나야. 나라고. 나 모르겠어?”


K는 이 여자가 왜 이러지 하는 표정으로 모른다고 가만히 고개를 한 번 끄덕했다. 너는 울부짖으며 침대 머리맡에 어쩔 줄 모르고 서 있는 K 동료 선생들에게 물었다.


“이이 왜 이러는 거예요. 도대체 어디가 아픈데 이래요?”

강 선생이 조심스럽게 말했다.

“학교에서 쓰러지셨는데 뇌출혈이랍니다.”


그때 신경과 과장이 빠른 걸음으로 너에게 다가왔다.

“배우자신가요?”
“네. 이이가 저를 몰라봐요!”

“이 환자 언제 숨이 멎을지 모릅니다. 강하제를 투여해도 혈압이 계속 치솟고 있어요. 어머니 계시면 얼른 연락해서 마지막으로 얼굴 보게 하세요. 형제들도요!”


헉! 마른침이 넘어갔다.

세상에는 이런 일도 다 있었다.

화분에 물 주고 기분 좋게 출근한 사람이 퇴근 무렵 죽는다니!


서른아홉 K

서른넷 너


너희에게 그날은

참으로 가혹했다.


염 선생이 동전을 건네며 너를 공중전화 부스로 데리고 갔다. K의 형에게 전화를 걸어 떨리는 목소리로 두서없이 상황을 전했다.


전화기에 또 동전을 넣었다.

딸각!


전화기가 동전 삼키는 소리를 듣고도 너는 망설인다. 친정어머니한테 K가 병원에 있다고 말할 용기가 나지 않아서다.


조금 전 신경과 과장은 이 말도 했다. 만에 하나 K가 오늘 밤을 무사히 넘기면 식물인간이 될 거라고! 병원 생활이 길어질 것이었다. 백일 갓 지난 막내를 돌보려면 친정어머니 도움이 절실했다.


망설임 끝에 심호흡을 크게 하고 번호를 눌렀다. 사태를 전해 들은 친정어머니는 소리부터 질렀다.

“너는 어째 하는 일마다 그 모양이냐. 뇌출혈로 쓰러졌으면 한방병원으로 가야지 왜 병신같이 대학병원에 있는데?”

이럴 줄 훤히 알기에 망설였던 것이다.


많이 놀랐겠구나! 따뜻하게 위로하는 어머니였으면 얼마나 좋았을까. 먹빛 가슴이 또다시 무너져 내렸다.


통솔력 있는 K는 사람을 좋아하고 사교력이 뛰어났다. 사람들도 그런 K를 아주 좋아하고 잘 따랐고. K가 교편을 잡자 주변에서는 국회의원 할 사람이 학교 울타리 안에 갇혔다며 아깝다고 입을 모았다.


응급실 안팎은 업무를 마감하고 달려온 학교 전 직원과 K의 친구들, 지인들, 선후배, 학부모들로 인산인해를 이루었다. 요즘에는 어림없는 일이지만 40년 전에는 그랬다.


대학병원이지만 CT 촬영 장비가 없어 K를 앰뷸런스에 싣고 다른 병원으로 촬영하러 갔다.


그 사이 너는 집으로 왔다. 떨리는 손으로 화장대 서랍에 K의 안경을 넣었다. 이 안경을 다시 쓰지 못하면 어떡하지? 큰 아이들을 재우고 막내에게 젖을 먹이며 너는 그 생각만 되풀이했다.


택시가 병원 근처 내리막길을 쑤욱 내려갔다. 수렁으로 빠져드는 느낌과 동시에 숨이 턱 막혔다. 그 시각 K가 숨을 거두는 것 같았다. 너는 맹렬히 하나님께 기도했다. K를 살려달라고.


택시에서 내려 고꾸라질 듯 응급실로 뛰어갔다. 말짱하던 K의 모습은 간데없고 혼수상태가 되어 숨소리가 천장을 찌를 듯 크고 거칠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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