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 기분 탓
기분이 자꾸 가라앉아 일주일 내내 한숨만 쉬었다.
사람한테 농락당했다는 것과
땅과 이별할 때가 되었다는 것과
산다는 사람이 있는데 가격이 싸서 보류한 것 때문이다.
글로 써놓고 보니 마음이 무거울 만도 하다.
일주일 전. 논 관리를 하는 박한테 전화가 왔다.
잘 지냈느냐는 인사에는 대꾸도 없이 계약을 새로 해야 한다며 주민등록 번호를 불러주면 자신이 삼천 원짜리 도장을 파서 찍겠다고 했다. 진즉부터 이런 식인 줄 알고 있었지만 누군들 별수 있으랴 싶어 여태 맡겼던 것이었다. 아이들은 문제가 생길 때마다 말했다.
“엄마 아빠는 참 답답해. 값도 안 오르는 시골 땅 왜 안 팔고 속 썩여요?”
서른넷에 혼자 몸이 된 인삼 장수가 있었다.
금산에서 인삼을 떼어 이천·여주·강원도에 팔고
강원도 특산 약재를 구해다 대전·금산에 팔았다.
산길 들길에 아무도 없으면 고무신 닳는 게 아까워 머리에 이고 걸었다.
연 걸리듯 걸려 있던 외상값을 모두 받은 날이었다.
뭉칫돈을 고무줄로 꽁꽁 묶어 고쟁이 주머니에 깊숙이 간직했다.
잠자리는 언제나 안전하고 돈 안 드는 여주 단골 약방 집 신세를 졌다.
밤중에 잠이 깬 그녀는 주머니에 돈이 있는지 확인하고
뒷간을 갔다 와서 두벌잠이 들었다.
10년 전 세상 떠난 뒤 한 번도 보이지 않던 남편을 꿈에서 만났다.
반가움과 까닭 모를 설움에 남편 가슴에 얼굴을 묻고 마음껏 울었다.
자신의 울음소리에 놀라 잠이 깬 그녀.
얼른 주머니를 만져보았다.
돈이 없었다.
고쟁이를 내리고 올릴 때 뒷간 바닥에 떨어트린 것이 틀림없었다.
그녀에 이어 누군가가 뒷간에 갔다면?
하늘이 무너져 내리는 것 같았다.
단숨에 뒷간으로 내달렸다.
돈은 고스란히 그 자리에 있었다.
죽어서도 도와주는 남편이 그지없이 고마웠다.
그녀는 그 돈으로 가장 사랑하는 고등학교 2학년짜리 셋째 명의로 논을 샀다.
그 셋째가 75세인 나의 남편이다.
이 논은 우리 부부에게 그냥 논이 아니었다.
고향에서 부동산하는 남편 초등학교 후배한테 매매를 의뢰했다.
“얼마 받고 싶으세요?”
“평당 40만 원요. 몇 달 전에 박이 37만 원에 살 사람 있다고 했는데 안 판다고 했거든요.”
“40만 원요?”
부동산 사장인 후배는 이해할 수 없다며 누가 산다고 했었는지 박과 통화를 해보겠다고 했다.
“그냥 해본 말이었대요. 땅값 올려서 못 팔게 하려고 수를 쓴 거지요. 오래도록 선배님한테 갖은 엄살을 떨어 소작료 적게 내며 직불금하고 장려금 타 먹으려고요.”
“그럼 얼마 받을 수 있는데요?”
“22만 원이면 당장 살 사람 있습니다.”
박한테 휘말렸다는 것을 알면서도 수락하기 어려웠다.
심란해서 더는 견디기 어려워 남편과 시골 어머니 산소를 찾았다.
비석에 묻은 새똥을 문지르며 주저리주저리 하소연을 늘어놓았다.
참 이상도 하지.
기분 탓이라 며칠 갈지 모르지만
마음이 편안해졌다.
어머니의 위로 때문이라고 확대 해석하는 나. 비웃는 남편.
* 두벌잠 : 한 번 들었던 잠이 깨었다가 다시 드는 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