삽화

10. 어머니의 이웃

by 글마중 김범순

엊그제가 설이라 의무적으로 어머니한테 들렀다.

그래야 편할 것 같아서다.


어머니는 딸인 나보다 더 아꼈던 며느리와 손자가

선물한 꽃 속에 폭 파묻혀 흐뭇해 보였다.


“엄마, 갈게요!”


언제나 그랬던 것처럼 어머니 이웃도 들여다보았다.

어머니 이웃은 아주 세련되고 아름다운 아가씨였다.

어머니보다 몇 달 늦게 추모공원에 안치되었는데

위패 옆에는 하얀 가운을 입은 듬직한 청년 사진과 접힌 명함이 꽂혀있었다.

둘은 사랑하는 사이였고 아가씨가 불의의 사고를 당한 것 같았다.

사진이 바뀌고 새 꽃다발이 겹쳐 있다.


- 또 왔다 갔구나! -


눈에서 멀어지면 마음도 멀어지는 법이다.

하지만 세상에는, 이 세상에는

22년이 지나도 잊지 못하는 한결같은 사랑도 있었다.




11. 어디로 갔을까?


어제 연습을 끝내고 공원 쪽으로 접어들었다.

체육관 잔디밭 양지바른 곳에 커다란 검정고양이 한 마리가 웅크리고 있었다.

사람을 경계하는 길고양이가 발길이 끊이지 않는 곳에서 꼼짝하지 않는 것을 보니 몹시 아프거나 허기가 져서 도움이 필요한 것 같았다.

“나비야.”

고양이는 눈도 뜨지 않았다.

“어머, 저 고양이 아직도 저러고 있네!”

운동 끝나고 나오는 이들이 한 마디씩 했다.

날이 추워서 저대로 밤을 맞으면 큰일 날 것 같았다.

얼른 구청에 신고했다.

“새끼 고양이가 아니면 출동하지 않습니다. 성묘(成猫)는 별도의 보호 제도가 없어서 마음 따뜻한 분을 기다릴 수밖에 없는 실정이랍니다.”

은근히 책임 전가하는 저 말투!

데리고 가서 치료하기 싫으니까 전화를 한 것 아닌가?

자비심과 인내심이 종잇장처럼 얄따란 나는 게으르기까지 하다.

언덕을 오르며 여동생한테 고양이 때문에 마음이 무겁다고 문자 했다.


- 고양이는 죽은 듯이 낮잠도 잘 자. 신경 쓰지 마. -


오늘 체육관을 나서며 고양이가 있던 자리를 가보았다.

없었다.

다행이었다.

어디로 갔는지 알 수 없지만 부디 건강하게 잘 지내기를 ···· !




12. 약속이 움직일 때


가족과 나

이웃과 나

사회와 나

국가와 나

모든 관계는 유언 무언의 약속으로 이루어져 있다.

그래서 약속은 매우 소중한 것이다.


이틀 전 부동산에 전화를 했더니 논을 헐뜯으며 가격을 더 받을 수 없다고 했다.

기가 눌려 우리 논의 장점을 한마디도 못했다.


"시골 논은 잘 안 팔려요. 산다는 사람 있을 때 얼른 계약하게 내일 만나지요."


팔랑귀인 나는 승낙했고 통화가 끝남과 동시에 괜한 약속을 했다는 후회가 밀려왔다.

헐값에 넘기는 것 같아 논을 선물한 어머니한테 이루 말할 수 없이 미안했다.

매수자가 여태 기다리고 있다는 것은 우리 논이 마음에 꼭 든다는 말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서둘러 못난 결정을 내린 것이다.


세무서에 들러 상담 직원한테 양도소득세 계산법을 배웠다.

서식이 복잡해서 못 알아듣고 몇 번씩 물었다.

집에 와서 검산을 거듭하며 계산해 보니 세금이 꽤 많아 겁이 나서 징징거렸더니 아들이 말했다.


"친구들한테 알아봤더니 직접 벼농사지으면 8년 뒤에는 세금이 없고 직불금과 장려금도 받을 수 있대요. 혼자 속 썩이지 말고 진즉 나한테 다 털어놓지 그랬어요. 걱정거리는 나누면 반으로 줄고 좋은 방법까지 찾을 수 있거든요. "

새삼 아들이 듬직하고 고마웠다.


이 약속을 지킬 것인가 움직일 것인가?

부동산 사장과 매수자 모두 남편 고향 후배라 뜬눈으로 밤을 새웠다.

갈등 지옥을 헤매던 나는 우선 내가 편하고 싶었다.


“사장님, 그 가격은 도무지 안 되겠습니다. 죄송합니다.”


사람은 물론이고 일방적이기는 하지만 동식물과의 약속까지 지키려 노력하던 나였다.

그런 내가 약속을 움직였다.

신의를 저버려 사람이기를 포기하니까 더없이 고요하고 편해졌다.


이전 03화삽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