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7. 30리 퇴근길
내가 결혼하면서 함께 자취하던 여동생은 시골집에서 출퇴근했다. 8시 마지막 버스를 놓치면 십리 산길을 걸어야 했는데 산짐승보다 고개 아래 동네 양아치들이 더 무섭고 위험했다. 아무리 그렇다 해도 차 시간을 핑계로 일찍 퇴근하는 법이 없는 성실한 동생이었다. 간혹 정말 어쩌다 간혹 단칸방인 우리 신혼집도 왔지만 이루 말할 수 없이 불편해했다.
그런 동생에게 수호 카드가 나타났다. 아랫말에 사는 어머니 수양 언니 아들 재호 오빠였다. 오빠는 옷가게에 근무하고 있었다. 동생은 막차를 놓치면 옷가게로 가서 오빠가 퇴근할 때까지 기다렸다가 오토바이 뒤에 타고 도회지 길 이십 리 산길 십리를 달려 집으로 돌아왔다. 무려 6년이나.
언젠가부터 동생은 죽기 전에 오빠를 찾아가 고맙다는 인사를 꼭 하고 싶다고 했다. 동생은 금오도 여행을 마치고 곧바로 서울로 가지 않고 우리 집에 묵었다. 마음껏 친정 동네 근처의 벚꽃을 감상하기 위해서였다. 하지만 올 3월 31일 대전 근교는 벚꽃이 하나도 피지 않았다. 우리는 자운대 목련꽃 길을 보고 돌아오며 의견을 모았다.
“이럴 때 재호 오빠 만나러 가자!”
큰 물 건너 오빠네 집이 있는 아랫말로 갔다. 확실하진 않으나 여든 살 가까운 오빠는 사회에서 물러나 시골집에서 지내고 있을 것이었다. 동생은 세상 물정을 몰라서 오토바이 기름 한번 넣어준 적이 없었다며 용돈을 준비했다. 오빠네 집은 오래전에 없어지고 커다란 밭이 우리를 맞았다. 열 채 가까운 집 중에서 두어 채만 빼고 전부 현대식 주택으로 증·개축을 해서 깜짝 놀랐다. 고속도로 방음벽 때문에 안 보여서 변한 것을 전혀 몰랐던 것이었다.
시골이니까 변동은 크지 않으리라 믿고 이 집 저 집 기웃거리다 잔디가 잘 가꾸어진 어느 집 열린 대문 안으로 들어가 주인에게 물었다.
“혹시 이재호 씨네 어디로 이사 갔는지 아세요?”
“우리는 이 동네 산 지 10년밖에 안 돼서 잘 몰라요. 저 위에 원주민 두 집이 있으니까 거기 가서 물어보세요. 지금은 하우스로 일하러 가서 아무도 없고 저녁때 돌아올 거예요. ”
동생은 섭섭함을 금치 못하며 발길을 돌렸다.
“실망하지 마. 다리 건너 가겟방에 가서 물어봐도 되잖아.”
시동을 걸고 막 출발하려는데 차 한 대가 들어오더니 원주민이 산다는 골목으로 올라갔다. 얼른 차에서 내려 뒤쫓아갔다더니 중년 부부가 내렸다. 여동생 이야기를 듣고 난 부인은 달갑잖은 표정으로 딱딱하게 말했다.
“땅 보러 다니는 아줌마들인 줄 알았어요. 이재호 씨한테 어디 살던 누가 찾는다고 할까요?”
“텃골 부녀회장 작은딸이라고 하면 알 거예요.”
부인은 우리 어머니를 잘 안다며 금방 상냥해졌다.
“바쁜지 안 받네요. 지금도 그 자리에서 장사하니까 가게로 직접 가 보세요.”
시장통이라 즉시 견인한다는 팻말이 곳곳에 붙어있어 동생을 먼저 내려주고 빈 가게 앞을 찾아 간신히 주차했다. 우리 어머니와 오빠 어머니는 피를 나눈 형제보다 더 가깝게 지냈기에 어머니 생각이 나서 오빠 가게로 달려갔다. 가게를 들어서던 나는 놀라서 걸음을 멈추었다. 여동생과 오빠가 반가움에 겨워 껴안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이럴 땐 들어가야 하나 말아야 하나? 차 안에서 그냥 기다릴 걸 괜히 왔다. 하지만 직원이 나를 봤기 때문에 그냥 가버리는 것도 그래서 큰소리로 오빠를 불렀다. 오빠는 여동생을 안았다 놓기를 반복하며 울고 있었다. 격정에 휩싸인 오빠가 나를 향해 말했다.
“나 그때 첫 아이 낳은 유부남이었지만 진심으로 동생을 사랑했어. 정말 사랑했었어. 너무 예뻐서 사랑하지 않을 수가 없었어. 그렇지만 아무리 사랑한다 해도 선을 넘으면 안 되잖아. 이젠 일흔여섯이나 되었으니 마음 놓고 안아 보고 싶어. 그래도 되지 안 그래?”
키가 크고 뚜렷한 이목구비가 시원시원 서글서글한 여동생은 미스 충남 선발대회에 참가하라고 단체의 추천받기도 했다. 여동생은 순수하게 퇴근시켜 준 은인이라 여겼지만 남자인 오빠는 달랐던 것이었다. 이럴 땐 내가 망가지는 것이 나을 것 같았다.
“오빠, 내 동생 안 덮어 먹어서 정말 고마워요. 오빠가 참아줘서 둘 다 행복하게 살 수 있었던 거예요.”
안부와 그 말만 하고 주차 단속을 핑계 삼아 먼저 자리를 떴다. 차로 돌아와 곰곰 생각할수록 오빠가 고마웠다. 만약 오빠와 여동생한테 무슨 일이 있었으면 욕심 많은 우리 어머니는 무슨 수를 써서라도 오빠 가정을 깨트리고 여동생과 결혼시켰을 것이다. 그렇게 되면 오빠 아내와 아들은? 생각만 해도 끔찍했다.
여동생은 결혼한 뒤 초등학교 선생님이 되었고 은행 지점장으로 퇴직한 제부와 행복하게 살고 있다. 오빠 역시 착실하게 가게를 운영해 시골에 땅도 많이 사고 신보다 더 높은 역 앞의 건물주가 되어 있었다.
세상에는 이런 사랑도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