새로운 세상 <브런치>가 열다

<불교 이대로 갈 것인가> 불교의 장점을 현시대적 문화와 접목해야

by 풍초김해수

나는 10여 년 전 짬짜미 글을 다음 블로거에 차곡차곡 쟁이며 나름 글쓰기를 하고 있다가 어느 날 갑자기 블로거 폐쇄소식을 들었다. 중요한 글은 따로 네이버나 노트북에 옮기고 나머지 글들은 공중에 흩뿌려 글장례를 치렀다.


그 일이 그때 나에게는 일종의 분서갱유 같은 사건이었다. 그리고 10년, 브런치의 존재를 전혀 모른 채 살아오다 우연히 접하고 나서는 혹시나 해서 글 한편 올렸는데 며칠 뒤 메일을 받았다. 그리고 내 방과 숨 쉴 수 있는 공간(계정)을 배정받았다. 흩어져 있던 내 소중한 글들을 모아 올릴 수 있는 새로운 내 집이 생긴 것이다.


다음 블로거가 없어지고 브런치가 바로 생겨 났는데도 모르고 10년 동안 내 글들을 좁은 PC안에 감옥생활을 시켰다. 이제 나의 글들이 석방되자마자 엄청나게 좋은, 옛날에 살던 집하고는 비교도 되지 않는 호텔 같은 저택에 입주하게 되었다. 내가 브런치마을에 살게 된 것은 내 인생에 있어 획기적인 일이었다. 의미가 남 달랐다.


나는 내가 쓰는 글이 시나 소설도 아니고 에세이도 아닌 그냥 인문 철학 비평서 같은 건데 내 주변에서 내 글을 읽어본 사람 중엔 나를 이상하게 보는 사람도 있었다. 생각해 보니 그네들은 내가 그렇게 비평과 분석글을 쓸 정도의 학식과 전문성도 없는데 무슨 이런 주제의 글을,, 하며 의심을 하는 것 같았다. 와중에 브런치를 만났고 입주를 하게 된 것이다.


여기는 천국이었다. 밖에는 글친구가 없어서, 공이나 치고 저녁에는 술 마시고 노래하고 이렇게 지내던 놈이 어느 날 윤회가 어떻고 사후가 어떻고 하니까 이상한 놈 취급을 하는 것은 어떻게 보면 당연한 일이었다. 서로 살아가는 지향점이 다르다 보니 내가 쓰는 글로는 교감이 어려웠는데 이곳은 모든 분이 다 글을 사람 하는 애글 인이기 때문에 무슨 동호인 전원마을 같은 느낌을 받았다. 문만 열면 다 동호인이고 다 대화가 된다. 이 얼마나 감격스러운 일인가.


어쨌든 모든 게 아직 서먹하고 조금씩 적응해 나가는 중에 두 달 만에 구독자도 40여분 생겼고 내가 애정을 쏟는 글로 브런치북도 1권 만들었다. 나는 아침에 눈뜨면 폰에 브런치부터 쳐다보고, 출근해서 노트북을 열면 브런치부터 문을 연다. 그리고 잠자리에 들 때까지 켜놓고, 일을 하다가도 중간중간 쳐다본다. 아예 나하고 일상을 같이 하고 있다. 이제 <브런치>는 내 생활이 되어 버렸다.


내가 브런치에 온 목적은 확실하다. 나는 평생 가지고 있는 화두가 있는데 그것이 <윤회>이다. 나는 이 윤회가 <사람의 유전(遺傳)이 윤회이다>라고 줄기차게 주장한다. 나의 앞 선세대가 살면서 겪은 환경적 성격(환경성)이 나에게 유전적 성격(천성)으로 와서 내가 살면서 하는 모든 행동의 씨앗이 되어 선악의 업을 행하게 되고 그 업에 따라 행불행을 겪게 된다 이 것이 를 따라 도는 윤회이다. 오늘 내가 무심코 하는 행동이나 내뱉는 말들은 아뢰야識에 심어져 DNA유전자를 타고 내 자식과 내손주에게 옮겨가서 따라 한다고 생각해 보라 말이나 생각이나 행동을 함부로 하겠는가


나는 이 화두를 가지고 공부를 15년간 했다. 과연 윤회와 무아사상의 배리현상이 어디에서부터 꼬였는지를 찾아보았다. 나는 그게 붓다의 원음이 암송으로 전해져 내려오다 입적 후 300년 뒤 최초의 경전을 만들 때부터 여러 사람이 서로 입을 맞춰가며 경, 율, 논 30 만송을 만들었는데 이때는 벌써 종교화가 진행되어 박티신앙과 윤회사상이 불교에 이식되었다고 본다. 무아와 윤회는 같이 병존할 수가 없는데도 윤회가 불교에 들어온 것은 종교로서의 효율성을 의식한 부득불한 처사로 보인다. 종교는 사후 논리가 있어야 신도들이 확장되는데 그때까지 종교 중에서 불교만이 무상 고 무아를 주장하여 사후가 없었기 때문이었다. 이때 힌두교의 신들과 논리들이 불교와 섞이면서 서로 배리 되는 논리가 생겨버렸다. 서로 논리적 다원주의 측면에서는 병립할 수 있을지 모르겠으나 논리적 부딪침에서 오는 오류는 지금껏 해결하지 못하고 있다. 이상한 형이상학적 이론으로 덮어서 설명한다.

죽음마음(cuti citta)과 재생연결심(patisanthi citta)은 원인, 결과의 관계일 뿐 동일한 영혼이 이어지는 것은 아니다. 불교에서는 무아(無我)의 원리에 따라 단지, 조건적 연속이 있을 뿐이다. 여러 분들은 해석이 되는가 동일한 영혼이 이어지는 게 아닌데 조건적 연속의 윤회는 있다.


그래서 나는 역사적으로 불교가 지금까지 취하고 있는 모순허용 논리 (Paraconsistent Logic)에 의해 무아사상과 윤회사상이 병립하고 있는, 그리고 아무도 여기에 공식적으로 이의를 제기하지 않는 이상한 현상을 분석하고 증명하여 또 다른 사람이 이 논리를 이어받아 진리의 참구(參究)를 바로 세우는 것이 내가 바라는 전부이고 그 경로에 브런치가 일조를 하리라 믿고 있다.




나는 현재의 한국의 불교가 2500여 년 동안 전혀 수정이 없이 오직 한길로만 가고 있는 현실이 매우 안타깝다. 어떤 사회현상이던 그 시대가 요구하는 니즈가 있고 거기에 맞춰 이념이나 사상철학도 변하기 마련이다 종교도 그때 그 시대가 필요한 논리와 철학에 맞게 출발하였다면 오랜 세월이 지난 지금 AI혁명이 일어나 대학에 교수직이 없어지니 마니 하는 세상에 그때의 논리가 지금의 젊은이들에게 설득력을 갖겠는가를 묻는 것이다.


오죽하면 개그맨 윤성호가 재미 삼아 만든 '뉴진스님' 퍼포먼스를 조계종 총무원장인 진우스님까지 나서서 격려하며 부추기겠는가 젊은이들이 뉴진스님 퍼포먼스를 재미있어하고 그로 인해 불교에 관심을 가지니까 종단에서 껴안아 버린 것이다. 나는 뉴스에서 이 장면을 보고 정말 실망했다.


불교신자수가 2010년에서 2020년 동안 Pew Research Center에 따르면 같은 기간 한국의 불교 신도 비율은 약 7% 포인트 감소했고, 감소 규모는 약 260만 명 정도로 추정된다고 한다. 젊은 세대로 갈수록 불교 믿음이 줄어들고, 승가 내부에서도 수도자 모집이 크게 감소하고 있다고 한다. 그 이유를 종단에서는 다들 알고 있다. 하지만 모두 내 몰라라 한다. 독일의 마르틴 루터와 같은 용기를 가진 사람이 없다. 젊은 사람들이 외면하는 것은 다 이유가 있을 것이다. 개혁은 일반사회나 종교단체에나 다들 어렵긴 한가보다.


불교가 나아갈 길(Oriented path)은 미국의 불교같이 변해야 된다고 본다

2500년의 역사를 가진 한국의 불교가 130년 밖에 되지 않는 미국의 불교를 따라 한다는 것은 자존심이 허락하지 않을 것이다. 미국의 토착 불교는 <American convert Buddhism>인데 이제 역사가 130년 정도밖에 되지 않는다. 중국과 일본이 자국의 불교를 미국에 알렸고 한국은 숭산스님(Seungsahn, 1927–2004)이 조계종 선사 출신으로, 1972년 미국으로 건너가 Kwan Um School of Zen을 창립하였고 이후 미국 전역에 禪 센터를 설립하며 한국 선불교 전파의 중심이 됐다.


미국불교는 아시아의 무속적 요소를 모두 빼고 불교의 원래 철학만 받아들여 명상위주로 불교선원을 만들고 붓다의 원음을 해석하고 불교의 정신심리학적 치료 효용성을 연구하며 신도들의 스트레스와 현대병을 치유하고 정신건강을 위한 종교와 치유센터로서의 역할까지 하는 진정성 있는 대민(대승) 불교로서 미국의 젊은 사람들에게 매력적으로 다가가고 있다.


자료에 따르면 2008년 기준, 불교 신자 수는 약 120만 명으로 추정되었으며, 1990년대부터 크게 증가했다고 하고 2010년대 초에는 약 350만 명으로 성장했다는 추정도 있다. 미국 내 성인 불자 수의 비율은 1.2%, 그리고 매 10년마다 170% 증가 중이라는 분석이 있다. <worldmetrics.org> 적은 수이지만 미국은 꾸준히 증가하는데 한국은 점점 감소한다는 게 문제이다.


또, 서구의 불교는 프랑스와 독일이 주로 유입처인데 볼테르나 쇼펜하우어, 니체 같은 사상가들이 불교를 종교적으로 해석하지 않고 이성적으로 해석하였고 데라와다불교와 선불교와 티베트불교가 주로 자리 잡았는데 명상수련원 형태로 운영되고 있다. 불교가 종교로서는 서구사회 기독교문화의 벽 때문에 들어가지 못하고 개량된 선원형태나 수련원 형태의 사찰로 현지에 적응하고 있다.


한국의 불교도 이중적 논리구조 속에서 쉬쉬할 것이 아니라 벗을 건 벗고 불교만이 가지고 있는 장점인 현대 의학이 치유하지 못하는 인간의 깊은 상실감에서 오는 온갖 정신적 마음의 병들을 종교적 믿음과 더불어 회복하는 진정한 대승으로서의 불교의 위상을 다시 세워야 할 때이다. 언제까지 49제의 중유사상과 육도윤회 같은 만화 같은 이야기로 불교신자들을 기만할 것인가.



풍초해마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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