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를 읽는 기쁨(13)

아버지를 기억하며 - 김현승 '아버지의 마음'. 박목월 '가정'

by 김승희

아버지의 마음 / 김현승


바쁜 사람들도

굳센 사람들도

바람과 같던 사람들도

집에 돌아오면 아버지가 된다.


어린것들을 위하여

난로에 불을 피우고

그네에 작은 못을 박는 아버지가 된다.


저녁 바람에 문을 닫고

낙엽을 줍는 아버지가 된다.


세상이 시끄러우면

줄에 앉은 참새의 마음으로

아버지는 어린것들의 앞날을 생각한다.

어린것들은 아버지의 나라다 - 아버지의 동포(同胞)다.


아버지의 눈에는 눈물이 보이지 않으나

아버지가 마시는 술에는 항상

보이지 않는 눈물이 절반이다.

아버지는 가장 외로운 사람이다.

아버지는 비록 영웅(英雄)이 될 수도 있지만....


폭탄을 만드는 사람도

감옥을 지키던 사람도

술가게의 문을 닫는 사람도


집에 돌아오면 아버지가 된다.

아버지의 때는

항상 씻김을 받는다.

어린것들이 간직한 그 깨끗한 피로...


가정 / 박목월


지상에는

아홉 켤레의 신발.

아니 현관에는 아니 들깐에는

아니 어느 시인의 가정에는

알 전등이 켜질 무럽을

문수가 다른 아홉 켤레의 신발을.


내 신발은

십구 문 반

눈과 얼음의 길을 걸어

그들 옆에 벗으면

육 문 삼의 코가 납작한

귀염둥아 귀염둥아

우리 막내둥아


미소하는

내 얼굴을 보아라

얼음과 눈으로 벽을 짜 올린

여기는

지상.

연민한 삶의 길이여

내 신발은 십구 문 반.


아랫목에 모인

아홉 마리의 강아지야,

강아지 같은 것들아

굴욕과 굶주림과 추운 길을 걸어

내가 왔다.

아버지가 왔다.

아니 십구 문 반의 신발이 왔다.

아니 지상에는

아버지라는 어설픈 것이

존재한다.

미소하는

내 얼굴을 보아라.


며칠 전 예상치 못한 흑백 사진 한 장 때문에 잠잠히 과거에 머물러 있었다. 동생이 도배를 하기 위해 짐 정리를 하다가 발견한 사진이라며 아버지 증명사진을 찍어서 보내주었다. 젊은 날에 세상을 마감한 아버지의 젊음이 느껴지는 사진 덕분에 추억처럼 희미해진 아버지의 기억들이 새겨지며 위 시들이 떠올랐다.


아버지의 마음이 어떠했을까? 아버지의 마음을 미쳐 헤아려보지 못하고 기억 속에 사라진 아버지의 마음을 더듬으며 그래도 마음속에 존재하는 아버지는 누구보다 가정을 생각하며 일하시던 아버지, 자식들을 위해 무엇인가를 사 오시던 아버지, 하지만 끝내 질병과의 싸움에서 이기지 못하고 묻히신 아버지이다. 그런 아버지의 마음을 시를 통해 느껴보니 내가 알지 못했던 아버지의 마음이 가슴 깊이 새겨진다.


아버지의 사랑도, 희생도, 책임감도 무엇보다도 고독했던 아버지를 보며 아버지의 존재에 대해 생각해 보게 된다. 바쁜 사람, 굳센 사람, 바람과 같던 사람도 집에 돌아오면 아버지가 되고 폭탄을 만드는 사람, 감옥을 지키던 사람, 술가게의 문을 닫는 사람도 집에 오면 아버지가 된다. 다양한 모습들의 아버지들이 힘들고 괴로운 삶을 살면서도 눈과 얼음의 길을 걸어 집에 오면 아버지가 되고 굴욕과 굶주림과 추운 길을 걸어서 집에 오면 아버지가 된다.

세상 모든 아버지들이 처음부터 아버지로 태어난 것이 아니기에 누구에게서도 배워보지 못한 아버지의 역할을 아버지로부터 배우며 또한 아버지가 되며 이 땅에서 살아갈 때 ‘얼마나 아버지로서의 존재가 버거웠을까’라는 생각이 든다. 누구보다도 책임져야 할 가장으로서의 역할을 떠올려보며 ‘얼마나 고독했을까’라는 생각이 든다. 물론 각자가 느끼는 아버지의 모습과 각자가 느끼는 아버지에 대한 기억이 다르기에 한 마디로 말할 수 없지만 분명한 것은 세상에서 처음 느꼈을 아버지들의 아버지는 그러지 않았을까 생각해 본다.


아버지의 눈물을 본 적은 없지만 분명 아버지도 눈물 흘렸을 것이고. 그런 아버지가 자식들의 모습을 보며 위로를 받았을 것이다. 내가 아버지에게 어떤 재롱을 부렸는지 기억나지 않아 죄스럽다. 그래도 나의 어떤 모습 때문에 아버지가 위로를 받지 않았을까 감히 생각해 본다. 중요한 것은 그렇게 어른이 되어 가며 아버지가 되어 가며 점점 사람이 되어 가며 살아가고 있다는 것이다. 아버지가 살아야, 부모가 살아야 가정이 살고 가정이 살아야 세상이 사는 것이다. 그러기에 가정 안에 아버지로서의 역할을 하는 무수한 존재들을 떠올리며 가슴 깊이 박수를 보내고 싶다.


때로는 아버지에게 가족들에게 가정에서 존재의 소중함을 잊어버리고 얼굴을 붉히며 너무 가깝다는 이유로 너무 힘들다는 이유로 격려하는 말, 위로하는 말도 하지 못하고 스쳐 지나가버린 적이 많지 않았을까. 현재의 고난 속에 현재의 고통 속에 많은 것들을 기억하지 못하고 서로에게 상처를 주는 관계에 머물러 있다면 아버지의 마음을 마음속에 새겼으면 좋겠다. 어린것들의 간직한 그 깨끗한 피로 씻김을 받는 아버지, 그 아버지의 마음을 아주 조금 헤아리며 아버지를 이해하고 그 아버지를 위해 아름다운 미소를 지으면 좋겠다. 세상 속에 우리가 알지 못하는 많은 일들로 참아가며 힘겹게 보내고 있을 아버지를 생각하며 아버지에게 조용히 감사함을 말로 마음으로 표현했으면 좋겠다. 말하고 싶어도, 마음을 표현하고 싶어도 어느 순간 돌아오지 않을 아버지로 인해 통곡하기 전에 온 맘으로 그 사랑을 전했으면 좋겠다. 세상의 모든 아버지, 아버지가 될 아버지들이 힘내기를 간절히 소망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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