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 ‘멋진 하루’
삶의 순간순간을 돌아보며 멋진 하루라고 할 만한 날이 있었을까? 어제 일도 기억하기 어려운데, 살아가는 것도 버거운데 멋진 하루라고 할 만한 날이 있었겠느냐고 반문할지도 모르겠다. 우리의 기억 속에 존재하는 많은 것들을 꺼낸다는 것이 유쾌하기도 불편하기도 해서 그렇지 그런 날이 몇 번쯤 있었을 것이다. 그렇다면 그런 날이란 어떤 날일까? 멋진 하루라고 하면 하루 종일의 행복한 하루를 연상할 수 있지만, 사실 하루 종일 행복한 날이 어디 있겠는가? 더구나 초라하고 힘든 삶의 한가운데, 더군다나 좋은 상황이 아닌 힘들고 불편한 경우라면 더더욱 그렇다. 돌이켜 보건대 사실 그 하루가 별로 유쾌하지 않고 불편하고 힘들었지만 그 하루를 떠올리며 그 하루를 통해 지난 시간들을 깨닫고 상처 난 마음을 달래며 조금은 미소질 수 있다면 정말 멋진 하루가 아닐까? 이윤기 감독의 ‘멋진 하루’가 바로 그런 영화가 아닐까 싶다. 말 그대로 하루의 이야기, 사실 그 하루는 전혀 멋지지 않은 하루. 힘든 하루였지만 그런 하루를 끝내고 떠나는 희수(전도연)의 마지막 살짝 짓는 미소 속에 왜 이런 제목이었는지를 주목할 수 있을 것 같다.
삶에 지친 우리에게 정말 필요한 것은 무엇일까? 우리는 힘든 순간 무엇을 떠올릴 수 있을까? 인간관계의 본질은 무엇일까? 남녀의 관계에서 중요한 것은 무엇일까? 남녀가 사랑하고 이별 후에 남는 것은 무엇일까? 사랑이 지나간 자리에 남겨진 차용증을 보면서 무슨 생각이 들까? 필요해서 누군가에게 돈을 줬지만 정작 받지 못한 그 돈을 헤어진 남자 친구에게 받으러 갈 수 있을까? 받으러 간다면 어떤 마음으로 가는 것일까?
1년 전에 헤어진 전 남자 친구를 찾아 희수(전도연)는 토요일 아침부터 경마장에 간다. 거기 있을 것 같았기 때문이다. 아니나 다를까 그곳에 있던 병운(하정우)에게 다짜고짜 꿔간 돈 350만 원을 갚으라고 한다. 그런 희수를 보며 반갑게 잘 지냈냐고 물어보는 병운에게 매몰차게 돈 내놓으라고 말하는 희수는 웃음기 하나 없는 진한 스모키 화장을 하고 있다. 그런 그녀를 대하는 병운은 화낼 법도 한데 전혀 그렇지 않고 지금 돈을 넣어줄 수는 없고 계좌번호를 달라고 한다. 사실 돈이 없기 때문이다. 지금 당장에 줘야 한다고 말하는 희수에게 그러면 자신이 가는데 함께 가자 하고 결국 그 길을 희수는 따라나선다. 희수를 데리고 하루 종일 350만 원을 찾기 위한 그들의 하루는 그렇게 시작됐다. 능청스럽게 뺀질거리는 병운 누가 봐도 진지하지 않은 그의 모습에 화가 나기도 하고 어이없기도 한 희수, 더군다나 병운이 돈을 빌리기 위해 찾아간 지인들은 골프 치는 사업가 여사님, 이혼하고 아이를 키우는 동창생, 바에서 일하는 여인, 대학 동아리 후배, 사촌, 제자 등 참으로 만나서 돈을 빌리기 어려운 사람일 것 같지만 병운은 어떤 상황에서도 자연스럽고 여유롭게 때로는 무릎 꿇는 불편한 상황에서도 아무렇지 않게 돈을 받는다. 그리고 돈을 주는 사람들도 그런 병운을 이상하게 대하지 않는다. 함께 다녔던 희수야말로 정말 불편하고 짜증 나는 힘든 순간이었지만 그 순간을 함께 하며 시간의 흐름과 동시에 그들의 지난 추억들도 감정들도 언뜻언뜻 그리고 병운의 삶의 흔적과 희수의 처지가 그려진다.
두 사람 모두 힘들게 살고 있다. 희수는 병운과 헤어지고 결혼할 뻔했던 사람이 회사 공금을 횡령해서 결국 결혼을 못하고, 지금은 회사도 그만둔 상태다. 병운은 결혼했지만 이혼하고 사업이 안 돼서 전세 자금도 빼고 돌아다니는 신세다. 막무가내로 돈을 갚으라고 찾아간 희수의 입장에서 그런 병운을 볼 때 무슨 생각이 들었을까. 상처라고는 전혀 받을 것 같지 않은 병운조차도 자신이 있을 때 희수가 기뻐할 줄 알았는데, 자신을 떠날 때 희수의 모습이 밝은 것을 보고 조금 아팠다는 얘기를 하기도 한다. 뿐만 아니라 돈 없는 사람이 경마장을 왜 들락날락거리냐고 했을 때에도 병운의 어릴 적 꿈이 기수여서 그 꿈 때문에 경마장에 간다고 한다. 참으로 내가 알던 그 사람이 맞는가? 싶기도 할 것 같다. 자신의 신세를 한탄하거나 화낼 법도 한데, 하물며 돈을 갚으라고 찾아간 희수에게 화낼 법도 한데, 누구에게 돈을 빌릴 때조차도 자존심 상할 만한데 전혀 그렇지 않고 모든 상황을 여유롭게 대처하고 웃으면서 그런 상황을 이끌어가는 것을 보며 참으로 희수는 오늘 무슨 생각을 했을까? 무조건 돈을 받아갈 것이고 어떤 상황에서도 자신의 감정을 숨기려는 듯 그렇게 진한 스모키 화장을 하고 딱딱하고 까칠하게 말하면서도 시간의 흐르며 희수는 순간순간 눈동자가 흔들리고 미소를 짓기도 하고 캔커피를 좋아했던 기억을 되살리며 병운에게 캔커피를 건넨다. 고장 난 자동차 와이퍼를 고쳐준 병운. 완전한 350만 원을 받을 수 있음에도 20만 원의 차용증을 쓰고 서로 헤어지면서 돌아오는 길에 희수는 미소 짓는다.
희수의 미소는 어떤 의미일까? 마지막까지 여유를 잃지 않고 자신에게 돈을 주려고 힘썼던 병운, 자신이 만났던 그 사람이 그래도 괜찮았던 사람이었구나. 인간의 관계가 때로는 돈으로 얽힌 관계일 수 있지만 돈보다 더욱 중요한 사람과의 사이에 숨은 감정과 그 감정의 고리들의 해소가 아닐까? 병운의 능청스러움과 매사에 진지하지 않고 가벼운 듯한 그의 속내를 보며 때로는 그 사람의 진가를 몰랐을 수도 있었는데, 하루를 지내며 특히 오늘 만났던 사람들을 통해 그를 얼마나 신용할 수 있었는지, 어려운 동창생을 도왔던 따뜻한 사람이었는지 그리고 경마장에 간 것도 기수가 되고 싶은 자신의 꿈에 대한 그런 열정 때문이었는지 느끼게 된다. 하루의 시간이란 상처받고 힘든 희수에게는 그런 상처를 기억하면서도 지난 사랑에 대한 사람의 마음을 읽어낼 수 있는, 그런 상처받은 자들이 또한 살아가는 여유로움을 느낄 수 있지 않을까. 그러기에 아침에 병운을 찾아간 희수와 저녁에 집으로 가는 희수의 마음은 분명 달랐을 것이고, 그렇게 웃음 짓는 미소이기에 오늘 하루는 단순한 멋진 하루로 끝나지는 않을 것 같다.
사랑하고 이별하고, 이별 뒤에 남는 것이 단순히 돈 때문이라면 병운을 찾아갔을까? 물론 아무것도 없는 절박함에 생각난 차용증이라면 찾아갈 수도 있었지만, 그 발걸음에 지난 사랑에 대한 아쉬움이 정말 없었을까? 때로는 사랑이 지나가고 지나간 사랑에 대한 아쉬움과 완전히 치유되지 않은 감정들이 남아 있을 것이다. 그리고 그때 내가 그런 사랑을 했는데, 그 사랑의 사람이 그래도 내가 사랑할 만한 사람이었다는 사실을 기억하는 것도 있지 않을까? 그 사랑이 비록 끝나더라도 내가 누군가를 바라보는 그 눈은 그래도 틀리지 않았다는 생각에 위안이 되지 않을까?
처음 영화를 볼 때 병운을 보며 정말 매사에 진지하지 않은 그의 능청스러움과 뺀질함, 가벼움에 희수 못지않게 화가 났지만 시종일관 여유롭게 사람을 배려하고 웃음을 잃지 않는 힘들게 떠도는 신세이면서도 스페인에서 막걸리를 팔고 싶다는 생각을 하고 매사에 긍정적으로 살아가는 그런 모습을 보며 정말 사람은 겉으로 판단해서는 안 된다는 생각을 하게 된다. 참 속도 없는 사람이라고 말하기 쉬운데 결코 그런 말을 해서는 안 되지 않을까 싶다. 누군가의 진면목을 보기 전에 혹시라도 속으로 외면하고 있었다면 한 번쯤 깊이 들여다보는 것은 어떨까?
하루의 시간 속에 벌어지는 예측 불가능하면서도 잔잔한 일상의 일들이 벌어진 멋진 하루는 하정우, 전도연이라는 두 배우의 연기가 큰 힘을 발휘하는 영화라는 생각이 든다. 특별히 어떤 사건은 없지만 상처를 안고 사는 우리의 모습에 어딘가에는 그런 사람이 있을 법한 그리고 우리들에게도 그런 일이 있을 법한 생각이 든다. 사랑을 하고 이별을 하고 이별 후에 우리는 또 그렇게 살아간다. 모두가 다 그렇지는 않지만 어쩌면 인생이란 사랑과 이별의 연속이지 않을까? 집으로 돌아가는 희수의 미소처럼 우리의 인생의 끝에 미소 지을 수 있으면 좋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