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치학에서 국가의 개념이 중요한 이유
국가는 정치학의 가장 근본적인 연구 대상이자 모든 정치 현상이 벌어지는 핵심적인 무대다. 모든 정치학 연구는 국가에서 출발한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그렇기에 국가에 대한 명확한 정의없이 정치 현상에 대한 체계적인 분석과 이해는 불가능하다. 정치학에서 국가에 관한 규정이 중요한 이유는 크게 4가지로 살펴볼 수 있다.
첫째, 국가는 연구의 출발점이자 분석의 핵심 단위다. 정치학은 '누가, 무엇을, 언제, 어떻게 갖는가?'에 대한, 즉 권력의 배분을 다루는 학문이다. 현대 사회에서 그 권력의 근원(Locus of Power)이자 가장 강력한 행위자가 바로 '국가'다. 따라서 국가를 정의하는 방식에 따라 정치학의 연구 범위와 대상이 결정된다. '국가란 무엇인가?'라는 질문에 답하지 않고는 민주주의, 권력, 복지, 전쟁 등 다른 어떤 정치적 개념도 논의하기 어려울 것이다.
둘째, 권력의 근원과 '정당성'의 원천 규명이다. 국가를 정의하는 과정은 '누가 통치하고, 왜 그 통치에 복종해야 하는가?'라는 근본적인 질문에 답하는 과정이다. 예를 들어 막스 베버가 국가를 '물리적 강제력의 합법적 독점'으로 정의한 것은, 국가 권력의 본질이 폭력에 있음을 보여주는 동시에 '합법성/정당성'이라는 중요한 개념을 제시한다. 이는 경찰의 체포와 세금의 징수와 같은 국가의 강제력과 조직 폭력배의 폭력을 구분하는 결정적 기준이 된다. 이처럼 국가의 정의는 권력의 정당성을 어디서 찾아야 하는지를 명확히 보여준다.
셋째, 국민의 권리와 의무 범위 설정이다. 국가를 어떻게 정의하느냐는 그 국가의 구성원인 국민 삶의 직접적인 영향을 미친다. 국가의 역할을 '야경국가(소극적 역할)'로 보는지, '복지국가(적극적 역할)'로 보는지에 따라 정부의 정책 방향과 국민이 누릴 수 있는 권리의 범위가 달라진다. 또한, 국민이 국가에 대해 지어야 할 납세, 국방 등의 의무 역시 국가의 정의와 역할 규정에 따라 그 범위와 강도가 결정된다.
마지막으로 국제 관계와 주권의 기준이다. 국제 사회에서 국가는 가장 기본적인 행위 단위다. 어떤 단체가 '국가'로 인정받느냐에 따라 국제법상의 지위, 외교 관계 수립, UN 가입 등 모든 것이 달라진다. 예를 들어, 국가의 핵심 요건인 '주권'에 대한 명확한 정의가 있어야 한 국가의 영토 보전 원칙이 존중되고, 다른 국가의 내정간섭을 비판할 수 있는 근거가 마련된다. 아랍의 땅에 동의 없이 세워진 이스라엘과 이스라엘의 영토의 일부에 아랍인들이 모여 사는 가자지구의 차이는 이를 선명히 보여준다.
국가, 나라, 정부의 구분
다른 개념과의 비교는 어떠한 개념을 명확히 이해하는 데 큰 도움을 주기도 한다. 국가 역시 유사한 개념인 나라, 정부와의 차이점을 살펴보는 것이 개념을 이해하는데 큰 도움을 줄 수 있다.
한국어에서는 ‘나라’와 ‘국가’가 명확히 구분되어 사용되지 않지만, 영어로 ‘country’와 ‘state’는 명확히 다른 개념이다. state는 정치적, 법률적 개념으로 ‘국가’에 좀 더 가까운 반면 country는 지리, 문화, 민족적 개념으로 ‘나라’에 가까운 개념이다. “대한민국은 민주공화국이다”라고 할 때는 state(국가), “한민족은 오랫동안 한반도에 모여 살았다”고 할 때는 country(나라)의 성격을 가진다.
정부(Government) 역시 국가와 흔히 혼용되어 사용되는 개념이다. 하지만 '국가(國家)'와 '정부(政府)'는 정치학적으로 명확히 구분되는 개념이다. 비유를 통해 설명하면 국가가 '버스' 그 자체라면 정부는 특정 기간 버스를 운행하는 '기사'와 같다.
국가(State)는 국민, 영토, 주권(Sovereignty), 정부라는 4가지 요소로 구성된 영속적이고 포괄적인 정치 공동체다. 반면 정부(Government)는 특정 시점에 국가의 주권을 위임받아 통치권을 행사하는 임시적이고 구체적인 조직이나 기관이다.
국가와 정부를 구분하는 것은 특히 중요한데, 그 유는 다음과 같다. 첫째는 ‘정부에 대한 비판과 국가에 대한 충성’이다. 누구나 정부의 정책이나 활동을 비판할 수 있다. 이는 민주 시민의 당연한 권리다. 이러한 '정부에 대한 비판'이 '국가 자체에 대한 부정'이나 '반역'으로 여겨져서는 안 된다(앞서 살펴본 윤석열의 ‘반국가 세력’을 생각해 보자). 정부는 시민에 의해 선택(selected)되지만 국가는 국민, 영토, 주권, 정부를 요소로 형성(formed)되기 때문이다.
둘째, ‘국가의 주인은 국민’이기 때문이다. 정부는 국가의 주인이 아니라, 시민을 위해 일하는 '대리인(agent)'에 가깝다. 이 관계를 명확히 이해할 때, 시민은 정부를 감시하고 견제하며 더 나은 방향으로 나아가도록 요구할 수 있다.
그래서 국가란 무엇인가?
국가에 대한 정의는 학자마다 다소 다르지만, 학자들이 대체로 공유하는 베버(Max Weber)의 정의에서 출발하는 것이 국가를 이해하는 좋은 방법일 수 있다. 베버에 의하면 국가는 "특정의 영토 내에서 정당한 물리적 폭력·강권력의 독점을 성공적으로 관철한 유일한 인간 공동체"이자 "폭력·강권력을 사용할 권리의 유일한 원천"이다. 여기서 가장 중요한 개념은 물리적 강제력의 독점(Monopoly of physical force)과 정당성·합법성(Legitimacy)이다.
국가는 경찰, 군대 등 폭력 수단을 독점적으로 소유하고 사용한다. 그리고 그 강제력의 사용이 '정당하다'고 국민에게 인정받거나, 최소한 그렇게 주장한다. 이 정당성은 전통, 카리스마, 혹은 법과 규칙에 근거해야 한다. 국가는 단순히 폭력을 독점한 조직(조폭 등)과 달리, 그 폭력 사용에 대한 정당성을 확보해야만 안정적으로 유지될 수 있다는 것이다.
신군부의 정당성을 획득하지 못한 폭력
전두환의 신군부 집권 과정은 베버가 말한 '물리적 강제력'과 '정당성'의 관계를 가장 극적으로 보여주는 사례다. 1979년 12월 12일 전두환 신군부의 군사 반란은 당시 대통령의 재가도 없이, 군대 내 사조직인 '하나회'를 중심으로 군 지휘권을 불법적으로 장악한 사건이다. 국가가 독점해야 할 '물리적 강제력'의 핵심인 군대를 일부 집단이 사적으로 탈취한 것이다. 신군부는 이렇게 이 군사력을 이용해 국가 권력을 찬탈하는 기반을 마련했다. 여기에는 어떠한 법적, 민주적 정당성도 없었다.
신군부의 집권 시도에 대해, 1980년 5월 광주 시민들은 "불법적인 군사 반란 세력은 물러나라"며 이들의 정당성에 정면으로 부인했다. 즉, "너희가 사용하는 물리력은 합법적이지 않다"고 저항한 것이다.
이에 신군부는 국가가 독점한 총칼, 즉 물리적 강제력을 동원하여 시민들을 무자비하게 진압했다. 이는 베버의 이론에서 국가가 자신의 '독점적 지위'를 유지하기 위해 폭력을 사용하는 모습을 보여준다. 하지만 동시에 시민들로부터 '정당성'을 전혀 인정받지 못한 폭력이었다. 5.18 광주민주화운동은 국가의 물리력 행사가 정당성을 잃었을 때 얼마나 비극적인 상황이 발생하는지를 명확히 보여준다.
신군부는 광주를 피로 진압하고 나서야 권력을 완전히 장악할 수 있었다. 그러고는 곧바로 자신들의 폭력 독점을 정당화하기 위해 사후적으로 합법성을 만들어 내는 작업에 착수했다. 우선 국가보위비상대책위원회(국보위)를 설치하여 입법, 사법, 행정을 모두 장악했다. 이어 체육관 선거를 통해 전두환이 스스로 대통령으로 선출되고, 새로운 헌법(제5공화국 헌법)을 제정했다.
이는 물리력으로 권력을 잡은 뒤, 법과 제도라는 '합법적-합리적 지배'의 외피를 억지로 만들어 자신들의 통치를 정당화하려 한 전형적인 시도다. 이처럼 12.12 군사 반란과 5.18 광주 민주화운동을 통해 집권한 전두환 신군부의 등장과 유지 과정은 국가의 본질인 '물리력'과 '정당성'이 극단적으로 분리되고 충돌하며 재결합하려는 전형적인 과정을 보여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