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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치학 쉽게 읽기 6) 국가의 형성

베스트팔렌조약, 그들만의 리그

by 김광민

세르비아와 크로아티아는 다뉴브강을 사이에 두고 크고 작은 국경분쟁을 겪고 있다. 다뉴브강 서안에는 시가(Gornja Siga)라는 섬이 있다. 다른 지역, 특히 다뉴브강 동안 지역에서는 세르비아와 크로아티아가 서로 자신의 영토라 주장하며 분쟁을 이어가지만, 시가에 대해서는 양국 모두 영유권을 부인하고 있다. 시가는 약 7km2정도 되는 섬인데, 영유권의 주장이 상대국을 자극하여 전쟁으로 비화할 것을 우려해 양국 모두가 서로 자신의 영토도 상대의 영토도 아니라는 모순된 주장을 하는 것이다. 영유권을 주장하는 국가가 없으니 주인 없는 땅, 무주지(無主地, Terra nullius)인 셈이다.


무주지에서의 국가 선포


2015년 4월 13일 무주지인 시가에 재미있는 사건이 발생했다. 체코의 정치인 비트 예들리치카(Vít Jedlička)가 시가에 들어가 국가를 선포한 것이다. 그는 시가에 국기를 꽂고 리버랜드 자유 공화국(체코어: Svobodná republika Liberland)을 선포했다. 그는 ‘공산주의, 신나치주의, 극단주의 세력을 제외한 사람은 누구나 와서 국민이 될 수 있다.’라는 헌법을 발포하고 홈페이지를 만들어 이민까지 접수했다. 그러나 크로아티아 정부는 리버랜드를 인정하지 않았고 비트 예들리치카는 결국 크로아티아 경찰에 체포되기까지 했다.


147768_155925_735.jpg 리버랜드 국가 홈페이지


아프리카 지역에도 비슷한 사례가 있다. 비르 타윌(Bir Tawil)은 이집트 남부와 수단 북부 국경지대에 있는 무주지다. 면적은 2,060km²로, 제주도(1,846km²)보다 조금 넓다. 아프리카를 식민 지배했던 영국은 1899년, 이집트와 수단의 경계를 북위 22도선을 기준으로 정했다. 할라이브(Hala'ib Triangle)는 이집트와 수단 국경에 위지한 지역인데, 22도 선을 기준으로 국경선을 정한다면 이집트 영토가 된다. 하지만 할라이브 지역 유목민을 관할하기에 이집트 보다 수단의 하르툼 총독이 낫다고 생각한 영국은 3년 후인 1902년 기존 북위 22도를 기준으한 국경은 그대로 유지한체 할라이브 지역만 수단 영토로 바꾸어 버렸다. 그러면서 아무 이유 없이 수단 영토에 속해있던 비르 타윌을 이집트 영토로 편입시켰다. 할라이브를 수단에 넘긴 대신 비르 타윌을 이집트에 준 것이다.


그러나 할라이브가 비르 타윌보다 면적도 10배 가까이(20,580㎢) 되고 바다에 인접해 무역이나 농업에 훨씬 수월했다. 특히 다수의 지하자원도 매장되어있어 지금도 이집트는 1899년 국경선을, 수단은 1902년 국경선을 주장하고 있다. 1902년 국경선의 변경을 통해 할라이브는 이집트에서 수단으로, 비르 타월은 수단에서 이집트로 각각 영유권이 변경되었다. 그러므로 이집트와 수단 모두 할라이브와 비르 타윌의 소유권을 동시에 주장할 수 없게 되었는데, 서로 할라이브의 영유권만 주장하려니 자연스럽게 비르 타윌은 아무도 영토를 주장하지 않는 무주지가 된 것이다.


할라이브는 이집트와 수단 모두 영토를 주장하지 않지만, 실효 지배는 이집트가 하고 있다. 그렇다고 하더라도 형식상 무주지다 보니 다뉴브강의 시가섬과 같은 엉뚱한 일이 발생하기도 한다. 비를 타윌을 지배한다고 주장하는 이들이 나타난 것이다. 어느 날 미국 출신인 제레미아 히튼이라는 사람이 비르 타윌에 북수단 왕국을 건립하고 농업 학자들을 모집해 황무지를 농경지로 개간하려 했다. 심지어 2022년 1월 기준 제레미아 히튼을 포함한 미국인 3명과 한국인 1명이 비르 타윌 지역의 지배권을 놓고 경쟁 중이라고 한다.


1623662419606.jpg?type=w800 영국은 1902년 할라이브와 비르 타윌을 각각 수단과 이집트 영토에서 서로 교환했다.


리버랜드와 북수단 왕국 모두 무주지를 선점해 국가를 선포했기에 그들의 주장이 타당해 보이기도 한다. 하지만 이들 모두 국가 수립에는 실패했다. 리버랜드는 크로아티아에 의해, 북수단 왕국은 이집트의 실효지배에 의해 국가 수립이 좌절되었다. 그렇다면 크로아티아와 이집트는 어떠한 권한으로 이들 국가의 수립을 방해한 것일까?


1618년 유럽에서는 신성 로마 제국(오늘날의 독일 지역) 내에서 가톨릭을 강요하는 황제에 맞서 개신교(프로테스탄트) 제후들이 반란을 일으키면서 30년 전쟁이 시작되었다. 시작은 종교의 자유였지만 전쟁이 길어지면서 종교는 명분에 불과하게 되었다. 프랑스는 가톨릭 국가임에도 불구하고, 경쟁자인 합스부르크 가문(신성 로마 제국과 스페인을 지배)의 세력을 약화하기 위해 개신교 편에 가담했다. 덴마크, 스웨덴 등 주변 국가들 역시 각자의 영토와 패권이라는 정치적, 경제적 이익을 위해 개입하면서 유럽 대륙 거의 전체가 휘말린 처참한 국제 전쟁으로 확대되었다. 이 전쟁으로 신성 로마 제국은 인구의 30% 이상이 사망할 정도로 초토화되었고, 유럽 전체가 극심한 피로감에 지쳐 전쟁을 끝내기 위한 협상을 시작하게 되었다.


30년 전쟁의 종식, 베스트팔렌 조약


1648년 유럽은 베스트팔레 조약(Peace of Westphalia)을 통해 30년 전쟁의 마침표를 찍을 수 있었다. 수년간의 협상 끝에 독일 베스트팔렌 지방의 두 도시(오스나브뤼크, 뮌스터)에서 체결된 조약의 주요 내용은 다음과 같다. 첫째, 종교의 자유를 인정했다. 각 제후의 종교가 그 영지의 종교를 결정한다는 1555년 아우크스부르크 종교평화조약의 원칙을 재확인했다. 이를 통해 기존에 인정되던 루터파뿐만 아니라 칼뱅파에도 동등한 종교적 권리가 부여되었다. 이로써 유럽에서 대규모 종교 전쟁의 시대는 막을 내리게 되었다. 둘째, 영토 조정 및 국가 독립 승인이다. 프랑스는 알자스 지방을 획득하고, 스웨덴은 북독일의 영토를 얻는 등 승전국의 영토가 확장되었다. 스위스와 네덜란드는 신성 로마 제국과 스페인으로부터 각각 공식적으로 독립을 인정받게 되었다. 셋째, 독일 제후국들의 주권이 인정되었다. 이를 통해 신성 로마 제국 내 300여 개의 제후국(영방 국가)들이 각자의 영토 내에서 완전한 주권을 행사할 수 있게 되었다. 이들은 독자적으로 법을 만들고, 조약을 체결하며, 외교 관계를 맺고, 전쟁을 선포할 권리를 갖게 되었다. 이는 사실상 신성 로마 제국 황제의 권력이 명목상으로만 남게 되고 제국이 해체되는 결과를 낳았다.


베스트팔렌 조약은 단순히 하나의 전쟁을 끝낸 평화 조약을 넘어, 중세 시대를 마감하고 오늘날 우리가 아는 ‘주권 국가’ 중심의 근대 국제 질서를 탄생시킨 역사적인 대사건이다. 베스트팔렌 조약이 갖는 역사적 의미는 매우 중요하며, 오늘날 국제 관계의 기초를 형성했다. 우선 조약을 통해 '주권(Sovereignty)'이라는 개념이 국제 관계의 핵심 원칙으로 확립되었다. 각 국가는 자신의 영토 내에서 최고의 권력을 가지며, 다른 국가는 그 내부 문제(특히 종교)에 간섭할 수 없다는 ‘내정 불간섭 원칙'이 탄생했다. 이는 중세 시대의 보편적 권력(교황과 황제)이 사라지고, 동등한 주권을 가진 국가들이 국제 사회의 기본 단위가 되는 시대를 열었음을 의미한다.

1920px-Westfaelischer_Friede_in_Muenster_%28Gerard_Terborch_1648%29.jpg 베스트팔렌 조약의 비준


다음으로 조약의 결과 종교와 정치가 분리되기 시작되었다. 국가의 정책 결정에서 종교적 명분보다 국익과 세력 균형이라는 현실주의적 외교가 우선시되기 시작한 것이다. 교황의 권위는 크게 약화되었고, 정치는 종교로부터 점차 분리되었다.


마지막으로 근대적 다자 외교 회의의 탄생이다. 전쟁에 참여한 거의 모든 국가의 대표들이 한자리에 모여 수년간의 협상을 통해 국제 문제를 해결한 최초의 사례였다. 이는 미래의 국제회의 및 외교의 전형이 되었다.


이처럼 베스트팔렌 조약은 근대적 국가 형태와 국가가 주인공이 되는 국제정치를 형성한 매우 중요한 역사적 사건이다. 그런데 조약이 만들어 낸 의외의 부작용도 있었다. 국가의 탄생이 단순히 법적 요건이나 물리적 힘의 문제를 넘어, 기존 국가들이 만들어 놓은 '국제 질서'라는 클럽에 가입하는 과정이 되었다는 것이다.


리버랜드와 북수단 왕국은 무주지에서 국가를 선포했지만 독립 국가로 나아가지는 못했다. 베스트팔렌 조약의 관점에서 볼 때, 리버랜드의 실패는 기존 주권 국가들이 형성해 놓은 질서에 편입되는 것에 완전히 실패했기 때문이다.


리버랜드와 북수단 왕국은 시가와 비르 타윌이 주인 없는 땅이라고 주장했다. 하지만 베스트팔렌 체제 이후, 지구상의 거의 모든 영토는 기존 주권 국가들의 소유로 분할되었다. 한 국가가 영유권을 포기한다고 해서 그 땅이 즉시 '주인 없는 땅'이 되는 것이 아니라, 인접 국가와의 협상이나 국제법적 절차를 통해 귀속이 결정되어야 하는 것이다. 크로아티아와 세르비아는 리버랜드의 주장을 무시하고 해당 지역을 자신들의 주권 문제로 다루고 있다. 비르 타윌에 대한 이집트의 태도 역시 마찬가지다. 이는 '주인 없는 땅'이라는 리버랜드와 북수단 왕국의 건국 명분 자체가 기존 국제 질서 속에서 성립할 수 없음을 보여준다.


베스트팔렌 조약, 그들만의 리그


결국 주권은 ’선포‘가 아닌 '인정'을 통해 완성된다. 잠시 국가에 대한 베버 이론으로 돌아가 보면, 국가의 '정당성'은 내부 구성원(국민)으로부터의 인정된다. 하지만 베스트팔렌 체제는 여기에 '외부 구성원(다른 국가)으로부터의 인정'이라는 또 다른 차원의 정당성을 요구한다. 특정 지역에 거주하는 주민들의 동의를 얻어도 주변 국의 승인을 얻지 못하면 국가의 지위를 가질 수 없는 것이다. 이는 후에 제국주의 식민지배와 강대국들의 남미 쟁탈전에서 크게 문제가 된다.


리버랜드와 북수단 왕국은 UN 회원국으로부터 어떠한 공식적인 인정도 받지 못했다. 이는 다른 주권 국가들이 리버랜드와 북수단 왕국을 자신들과 동등한 '주권적 파트너'로 받아들이지 않겠다는 명백한 의사 표시다. 국제 사회는 리버랜드와 북수단 왕국을 국가가 아닌, 한 개인의 정치적 퍼포먼스로 간주할 뿐이다.


결국 베스트팔렌 조약에 의해 주권국 간 내정 불간섭 원칙이 확립되었지만, 이는 어디까지나 그 체제 내에서 승인된 주권국가에 한정되는 원칙에 불과한 것이다. 현대 국제정치에서 국가의 형성은 베스트팔렌 체제에 의해 성립 및 인정된 국가들에 의해 승인 되어야만 국가의 지위를 갖게 되는, 그들만의 리그인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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