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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치학 쉽게 읽기 7) 대통령제, 미국의 발명품

모든 선례를 만든 초대 대통령

by 김광민

연합규약 시대(Articles of Confederation)는 미국 역사에서 '비판적 시기(The Critical Period)'라 불린다. 이 시기는 강력한 중앙 권력에 대한 극도의 공포가 어떻게 실패로 이어졌는지를 보여주는, 미국 건국 과정의 필수적인 '성장통'이자 '교훈'이었다.


영국으로부터 독립한 미국 시민들은 영국 국왕 조지 3세와 영국 의회의 압제에 대한 강한 반감을 가지고 있었다. 미국 시민들은 자신들의 대표를 인정하지 않는 멀리 떨어진 중앙 정부가 세금을 부과하고, 군대를 주둔시키며, 자유를 억압하는 것을 직접 경험했다. 이 때문에 그들은 '또 다른 왕'이나 '미국판 폭압 의회'가 탄생하는 것을 병적으로 두려워했다.


당시 13개 식민지는 '미국'이라는 단일 국가의 국민이라는 정체성보다, '버지니아인', '매사추세츠인' 등 각자 속한 독립된 주(State)의 시민이라는 의식이 훨씬 강했다. 이들은 독립된 13개의 나라가 공동의 목표(독립 전쟁)를 위해 느슨하게 뭉친 것으로 생각했다. 따라서 연합규약의 목표는 단일 국가 건설이 아닌, 각 주의 주권과 독립을 최우선으로 보장하는 ‘주들의 굳건한 우호 동맹’을 맺는 것이었다.


연합규약의 탄생, 혼란의 시작


이러한 배경 속에서 1777년 연합규약이 작성되었고, 주들 간의 이해관계(특히 서부 영토 소유권 문제)로 인한 진통 끝에 1781년 공식적으로 비준되었다. 그 내용은 중앙 권력을 철저히 배제하는 방향으로 설계되었다.


연합규약 아래의 정부는 의도적으로 '이빨 없는 호랑이'처럼 만들어졌고, 이는 곧 국가 운영의 총체적 실패로 이어졌다. 국가를 대표하고 법을 집행할 행정부 수반이 없었다. 주들 간의 분쟁을 해결할 연방 사법 체계가 또한 부재했다. 그나마 유일한 중앙 기구였던 연합 의회는 무기력했다.


연합 의회는 국가 운영에 필요한 자금을 주 정부에 '요청(requisition)'할 수만 있을 뿐, 직접 세금을 걷을 권한은 없었다. 당연히 대부분 주는 이 요청을 무시했다. 각자 다른 관세를 매기고 화폐를 남발하여 주들 간의 교역은 마비되고 경제는 극심한 혼란에 빠졌다. 그러나 연합 의회에는 주들 간 교역을 통제할 권한이 없었다. 특히 중요한 법안은 13개 주 중 9개 주의 동의가, 규약 개정은 만장일치가 필요했는데, 이는 사실상 어떠한 개혁 조치도 의결할 수 없는 구조였다.


연합규약 체제의 무기력함은 미국 사회를 혼란에 몰아넣었다. 전쟁 빚을 갚지 못해 국가 신용도는 바닥에 떨어졌고, 급료를 제대로 받지 못한 군인들의 불만은 폭발 직전이었다. 주마다 다른 화폐와 관세로 상인들은 파산 직전에 내몰렸다. 특히 이러한 문제는 국제정치에서 더욱 도드라졌다. 연합규약 체제의 무기력함을 간파한 열강들은 미국을 무시했다. 영국은 파리 조약에서 약속한 북서부 요새 철수를 거부했고, 스페인은 미국 서부 개척의 생명줄인 미시시피강의 항해를 막아버렸다.


이러한 사회적 혼란은 반란으로 이어졌는데, 셰이즈의 반란(Shays' Rebellion, 1786-1787)이 대표적이다. 과도한 세금과 빚에 시달리던 매사추세츠의 농민들이 전직 군인 대니얼 셰이즈의 주도하에 봉기하여 법원을 점거하는 사건이 발생했다. 하지만 연방 정부는 반란을 진압할 군대도, 권한도 없었다. 결국 매사추세츠주 정부가 민간 상인들에게 돈을 빌려 자체적으로 군대를 조직하고 나서야 간신히 진압할 수 있었다.


셰이즈의 반란은 미국 전역의 지도자들에게 엄청난 충격을 주었다. '자유'를 지키기 위해 만든 약한 정부가 오히려 국민의 '생명과 재산'조차 지키지 못하는 무정부 상태를 초래할 수 있다는 뼈아픈 현실을 깨닫게 된 것이다.


실패로부터의 교훈, 왕이 아닌 대통령의 탄생


미국의 대통령제는 왕정에 대한 극도의 반감과 불신 속에서 탄생했다. '왕이 되지 않을 강력한 지도자'를 만들기 위한 고심의 산물이었다. 제헌 헌법을 통해 그 '설계도'가 만들어졌다면, 초대 대통령 조지 워싱턴은 자신의 행동으로 그 설계도를 '살아있는 모델'로 완성시킨 주역이었다.


이처럼 독립 직후, 영국 왕의 압제에 대한 트라우마로 탄생한 '연합규약' 체제는 대통령도, 세금 징수권도 없는 무력한 중앙 정부였다. 이에 따라 경제는 혼란에 빠지고 사회는 불안해졌습니다(셰이즈의 반란). 결국 국가 존립의 위기 앞에서 지도자들은 강력하고 효율적인 행정부의 필요성을 절감하고 1787년 필라델피아에 모여 새로운 헌법을 논의했다.


1920px-Scene_at_the_Signing_of_the_Constitution_of_the_United_States.jpg 《미합중국 헌법 서명 장면》 하워드 챈들러 크리스티.


이들의 딜레마는 '어떻게 하면 왕의 폭정은 막으면서도, 국가적 혼란은 수습할 수 있는 강력한 행정부를 만들 것인가?'였다. 격렬한 논쟁 끝에, 그들은 '대통령'이라는 단일 행정부 수반을 만들되, 그가 결코 왕이 될 수 없도록 여러 겹의 정교한 '견제와 균형(Checks and Balances)'장치를 설계했다.


우선 세습 권력인 왕과 달리 국민의 대표(선거인단)에 의해 선출되도록 했다. 임기도 4년으로 제한했다. 다음으로 법률 제정권(의회), 예산 편성권(의회), 사법권(법원)을 분리하여 대통령의 권한을 엄격히 제한했다. 그리고 법 위에 군림하는 왕과 달리, 중대한 범죄를 저지를 경우 의회에 의해 파면(탄핵)될 수 있는 존재로 규정했다.


하지만 대통령이라는 제도는 미국만이 아니라 지구상 어떤 국가도 경험해 보지 못한 길이었다. 당연히 부족한 부분도 많았을 것이며, 예상하지 못한 부작용도 있었을 것이다. 이러한 한계는 초대 대통령 조지 워싱턴(George Washington, 1732. 2. 22 ~ 1799. 12. 14)이 직접 경험하며 수정해 나갔다.


사람들은 여전히 단 한 명의 지도자가 결국 '선출된 군주'가 될 것이라는 두려움을 떨치지 못했다. 이때, 모든 미국인이 신뢰하는 단 한 사람, 조지 워싱턴이 등장하며 대통령제를 살아있는 제도로 완성시켰다.


대륙군 총사령관으로 독립 전쟁을 승리로 이끈 조지 워싱턴은 막강한 군사력을 바탕으로 얼마든지 독재자나 왕이 될 수 있었다. 그럼에도 그는 미련 없이 군 총사령관직을 내려놓고 고향으로 돌아갔다. 이는 그가 권력 자체를 탐하지 않는다는 신뢰를 미국인들에게 심어주었다. 이 신뢰가 있었기에 사람들은 그에게 초대 대통령이라는 막강한 자리를 안심하고 맡길 수 있었다.


초대 대통령으로서 워싱턴의 모든 행동은 곧 미래 대통령들이 따라야 할 '관례'이자 '전통'이 되었다. 그는 대통령직의 성격을 규정하는 데 결정적인 역할을 했다. 워싱턴은 "전하(Your Highness)"와 같은 군주적 칭호를 거부하고, '회의 주재자'라는 뜻의 "미스터 프레지던트(Mr. President)"를 선택했다. 이는 대통령이 국민 위에 군림하는 존재가 아님을 명확히 한 상징적인 사건이었다.


당시 헌법에는 임기 횟수 제한이 없었다. 워싱턴이 3연임에 도전했다면 이를 막을 경쟁상대도 없었다. 더욱이 주변 참모들은 그가 3연임에 도전하기를 바랬다. 하지만 워싱턴은 두 번의 임기를 마친 후 "나는 여러분의 왕이 아니다"라며 스스로 권좌에서 물러났다. 이를 통해 그는 대통령직이 개인의 소유가 아닌, 국민으로부터 잠시 위임받은 자리라는 가장 강력한 선례를 남겼고, 140년이 넘도록 미국의 불문율(unwritten rule)'로 자리 잡았다.


전통의 성문화, 수정헌법 제22조의 탄생


현재 3연임 금지는 미국 수정헌법 제22조로 명문화되었다. 재선 후 자발적 퇴진이라는 워싱턴의 선례가 깨진 것이 가장 큰 이유였다. 140년이 넘는 전통을 깬 인물은 미국의 32대 대통령, 프랭클린 D. 루스벨트(Franklin Delano Roosevelt, 1882. 1. 30~1945. 4. 12)였다. 루스벨트가 집권하던 시기는 미증유의 위기 상황이었다. 1930년대에는 '대공황'이라는 최악의 경제 위기가 닥쳤고, 1940년대 초에는 제2차 세계대전의 전운이 감돌고 있었다.


루스벨트는 1932년과 1936년 선거에서 승리하여 이미 2번의 임기를 마친 상태였다. 하지만 그는 유럽에서 전쟁이 발발하는 등 국제 정세가 불안하다는 이유로 '위기 상황 속 지도력의 연속성'을 주장하며 1940년 대선 출마를 선언했다. 공화당은 "그 누구도 필수불가결한 존재는 아니다"라며 비판했지만, 위기를 타개할 강력한 지도자를 원했던 미국 국민들은 루스벨트의 손을 들어주었고, 그는 미국 역사상 최초의 3선 대통령이 되었다. 1944년, 제2차 세계대전이 한창일 때 루스벨트는 또다시 4선에 도전하여 성공했다. 하지만 4번째 임기를 시작한 지 불과 몇 달 만인 1945년 4월에 뇌출혈로 사망하고 말았다.


mFqduM1mA0N2VvOi-BgMuaIaBARFpoU3Mv00OFsgB0bMs4w-jsPgA9udifuIQ8yfnTYx1EeuFuzrWfAsy_-MDA.webp 프랭클린 D. 루스벨트. 백악관 공식 초상화


루스벨트의 전례 없는 4선 연임과 그의 사망은 미국 사회에 큰 충격을 주었다. 특히 야당이었던 공화당을 중심으로 한 사람에게 권력이 지나치게 오래 집중되는 것에 대한 경계심과 우려가 커졌다. 전쟁과 대공황이라는 특수한 상황은 끝났으므로, '워싱턴의 전통'을 다시는 깨지지 않을 헌법적 원칙으로 만들어야 한다는 공감대가 형성되었다.


1947년, 공화당이 다수 의석을 차지한 제80대 의회는 대통령의 임기를 2회로 제한하는 헌법 개정안을 공식적으로 발의했다. 개정안은 의회를 통과한 후 각 주의 비준을 거쳤고, 1951년 2월 27일, 36번째 주인 네바다주가 비준함으로써 미국 수정헌법 제22조로 공식 확정되었다.


이로써 조지 워싱턴이 자발적인 행동으로 만들었던 '2선 연임의 전통'은 프랭클린 루스벨트라는 유일한 예외를 거쳐, 다시는 흔들릴 수 없는 헌법적 원칙으로 성문화되었다. 이 조항은 특정 개인에게 권력이 과도하게 집중되는 것을 막고, 주기적인 지도력 교체를 통해 민주주의의 활력을 유지하려는 미국 건국 초기 공화주의 정신을 재확인한 결과물이라고 할 수 있다.


이렇게 미국은 영국으로부터 독립 후 절대 왕권에 대한 강력한 거부감 속에 연합규약 체제의 실패를 겪으며 대통령제를 만들어 나갔다. 특히 초대 대통령 조지 워싱턴은 연임 제한 규정조차 없을 정도로 허술했던 대통령제를 스스로 모범이 되어 수정해 나감으로써 오늘날 대통령제가 미국에 정착되는 데 결정적 역할을 했다. 이렇게 미국은 대통령제를 발명했다. 대통령제는 미국의 발명품인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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