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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치학 쉽게 읽기 8) 대한민국, 제왕적 대통령

대통령에 대한 이승만의 고집

by 김광민

1948년 5월 10일 총선거로 구성된 제헌 국회의 가장 중요한 임무는 대한민국의 헌법을 만드는 것이었다. 국회에는 헌법기초위원회가 구성되었고, 법률가였던 유진오(兪鎭午) 박사가 초안 작성의 핵심적인 역할을 맡았다.


헌법기초위원회가 만든 초안의 핵심은 '의원내각제'였다. 제국주의로부터 독립한 지 불과 2년이 조금 더 지난 시점이었다. 위원들에게 일제강점기에 대한 기억은 아직 생생했다. 신생 독립국의 강력한 지도자가 독재자로 변질되는 사례가 빈번했다. 따라서 행정부가 의회에 책임을 지고, 의회의 불신임으로 내각이 물러날 수 있는 내각책임제야말로 대통령의 독재를 막을 수 있는 가장 효과적인 장치라고 믿었다.


s1_3_img_3.png 제헌국회의 심의 주축안 유진오 ‘헌법안’(1948.5.) 고려대학교 소장


당시 유럽의 선진 민주주의 국가 대부분이 내각책임제를 채택하고 있었다. 유럽의 모델을 가장 발전된 형태의 민주정치 모델로 인식하는 경향이 강했다. 위원회의 초안에 따르면, 대통령은 국가를 상징하는 명목상의 국가원수로 존재하고, 실질적인 행정 권력은 국회에서 선출된 국무총리와 그가 구성하는 내각이 갖게 되는 구조였다.


대통령제에 대한 이승만의 아집


하지만 국회의장이었던 이승만은 내각제 초안을 보고 격렬하게 반대했다. 미국에서 공부했고 인생의 많은 부분을 미국에서 생활했던 그에게 미국의 대통령제가 더욱 친숙했을 것이다. 하지만 그보다도 자신이 신생 대한민국의 지도자가 될 것이라 확신했던 그에게 '상징적인 대통령'이나 의회에 의해 통제받는 '국무총리'는 받아들일 수 없는 것이었다.


이승만은 다음과 같은 논리로 강력하게 '대통령 중심제'를 주장했다. 이제 막 탄생한 신생 국가가 남북 분단과 좌우익의 극심한 대립이라는 위기 상황에 놓여 있으므로, 강력한 지도력을 가진 대통령이 국정을 안정적으로 이끌어야 한다는 것이었다. 내각제는 정당 간의 이합집산과 정쟁(政爭)으로 내각이 수시로 붕괴되어 국정 혼란만 일으킬 것이라고 비판했다. 이에 더해 국민이 직접 선출한 대통령만이 국민 전체를 대표하고 통합시키는 구심점이 될 수 있다고 강조했다.


이는 표면적으로는 국가의 안정을 위한 주장이었지만, 실질적으로는 자신이 가진 압도적인 대중적 지지를 바탕으로 국가 운영의 실권을 장악하려는 정치적 의도가 담겨 있었다.


이승만의 강력한 반발로 인해 제헌 국회는 내각제 안과 대통령제 안을 두고 극심한 대립에 빠졌다. 당시 제1당이었던 한국민주당(한민당)을 비롯한 다수 의원들은 이승만의 독재를 우려하여 내각제를 지지했다.


하지만 현실적으로 이승만의 정치적 영향력은 국회가 무시할 수 있는 수준이 아니었다. 이승만의 협조 없이는 헌법 제정과 정부 수립 자체가 불가능한 상황이었다. 결국, 양측은 정면충돌을 피하고 다음과 같은 '절충안'이자 '정치적 타협'을 선택하게 되었다.


이승만과의 타협으로 왜곡된 대통령제


정부 형태의 골격은 대통령 중심제로 함으로써 이승만의 주장을 수용하되 대통령의 독주를 막기 위해 내각제적 요소를 대폭 도입하기로 한 것이다. 이러한 타협과 정충에 따라 1948년 7월 17일에 공포된 제헌 헌법은 매우 독특한 혼합 체제의 모습을 갖추게 되었다.


우선 대통령이 국가 원수이자 행정부 수반의 지위를 갖되 국민 직선제가 아닌 국회에서 선출하도록 하여 국회에 의한 대통령의 견제를 꾀했다. 국회의 동의를 받아 임명하는 국무총리제를 두었다. 특히 중요한 것은 국무위원이었다. 국무회의가 단순한 자문기구인 미국과 달리 심의기구로 격상시켰고, 국회의원이 국무위원을 겸직할 수 있도록 함으로써 대통령에 대한 견제를 꾀했다. 이에 더해 국회가 국무총리와 국무위원에 대한 해임 건의권을 갖도록 하여 추가 견제장치도 마련했다.


결론적으로, 대한민국 정부 형태는 처음부터 순수한 대통령제가 아니라, '독재를 막으려는 의회'와 '강력한 권력을 원했던 이승만' 사이의 힘겨루기 속에서 탄생한 정치적 타협의 산물이었다. 특히 대통령을 국회에서 선출하도록 한 것은 내각제의 핵심 요소를 받아들인 것으로, 이는 이후 이승만이 재선을 위해 헌법을 무리하게 개정하는(발췌개헌) 빌미가 되기도 했다. 이처럼 건국 초기의 '불안한 동거'는 이후 한국 정치사의 고질적인 문제인 대통령과 국회 간의 갈등의 씨앗을 품고 있었다.


이승만 독재를 위해 강화된 제왕적 대통령


국무회의의 문제점에 대해서는 잠시 미뤄두고 초대 대통령 이승만의 대통령직 수행에 대해 살펴보자. 미국의 초대 대통령 조지 워싱턴의 모습과 행동이 미국 대통령제의 관례와 전통으로 자리 잡은 것과 같이 이승만의 대통령직 수행은 대한민국 대통령제의 모습에 엄청난 영향을 미쳤다. 다만 워싱턴의 그것과 달리 이승만은 제왕적 대통령제라는 부작용으로 작용한 측면이 훨씬 강했다.


이승만은 헌법까지 개정해 가며 영구집권을 꾀하는 독재자의 길을 가다 결국 4.19 혁명에 의해 하야하고 그의 정신적 고양인 미국으로 도피해야 했다. 이승만은 대한민국 '제왕적 대통령제'의 뿌리이자, 그 원형(原型)을 만든 결정적 계기였다. 그의 통치 방식은 단순히 한 개인의 권력욕을 넘어, 이후 한국 정치사에 깊게 뿌리내린 대통령 중심의 권력 구조와 문화를 탄생시켰다.


'제왕적 대통령제'는 단순히 대통령의 권한이 강하다는 의미를 넘어, 헌법에 명시된 삼권분립의 원칙이 무력화될 정도로 대통령 1인에게 행정, 입법, 사법부에 대한 막강한 영향력이 집중된 기형적인 권력 구조를 의미한다. 대통령이 법 위에 군림하며 마치 '선출된 군주'처럼 행동할 수 있는 시스템과 정치 문화를 포괄하는 용어다.


이승만은 건국 초기 대통령으로서, 그의 모든 행위는 대한민국 대통령직의 선례가 되었다. 그는 자신의 영구 집권을 위해 모든 방법을 동원해 제왕적 대통령제의 기틀을 다졌다.


우선 헌법을 사유화하여 제도를 왜곡했다. 민주주의의 근간인 헌법을 자신의 권력 유지를 위한 도구로 전락시키며, 대통령이 헌법 위에 군림할 수 있다는 최악의 선례를 남겼다. 제헌 헌법상 대통령은 국회에서 선출하는 간선제였다. 1952년 재선을 앞두고 국회의 지지를 얻기 어렵게 되자, 이승만은 전쟁 중인 부산에서 계엄령을 선포하고 반대파 의원들을 구속하는 등(부산 정치파동) 공포 분위기를 조성했다. 이후 국회를 압박하여 대통령 직선제와 양원제를 골자로 하는 개헌안을 통과시켰다. 이를 대통령 직선제와 상·하 양원제를 골자로 하는 정부 측 안과, 내각책임제와 국회 단원제를 골자로 하는 국회 안에 일부를 발췌해서 통과시켰다고 하여 발췌개헌이라 한다.


이승만은 발췌개헌 후 불과 2년 만인 1954년 다시 개헌을 통해 집권을 연장했다. 3선 연임을 위해 헌법의 '중임 제한' 조항을 '초대 대통령에 한해 적용하지 않는다'는 내용을 담은 개헌을 추진한 것이다. 국회 표결 결과, 정족수(203명 중 2/3인 135.33...)에서 1표가 부족한 135표가 나와 부결되었다. 하지만 이승만 정권은 "0.33은 사람이 아니므로 버려야 한다"는 기적의 수학 논리, 즉 '사사오입(四捨五入)'을 내세워 다음 날 부결을 번복하고 가결을 선포했다. 이는 법치주의와 민주적 절차를 완전히 무시하고, 권력자의 자의적 판단이 헌법 위에 설 수 있다는 것을 보여준 상징적 사건이 되었다. 사사오입 개헌이다.


%EC%9D%B4%EC%B2%A0%EC%8A%B9%2C_%EC%B5%9C%EC%88%9C%EC%A3%BC.jpg 사사오입 개헌안이 통과되자 민주당 의원 이철승이 단상에 뛰어올라 국회부의장 최순주의 멱살을 잡았다.


위법적 개헌을 통해 집권을 연장한 이승만 정권은 권력의 정당성 상실을 국가 권력을 동원해 메우려 했다. 경찰, 검찰, 군대 등 국민을 위해 봉사해야 할 국가기구를 정적 제거와 반대 세력 탄압을 위한 사적인 통치 도구로 삼았다. 유력한 경쟁자였던 조봉암을 간첩 혐의로 기소하여 사형시킨 '진보당 사건'이 대표적이다. 이는 사법부를 동원해 정치적 맞수를 제거한 것으로, 대통령의 의중에 따라 사법부의 판단이 좌우될 수 있다는 위험한 선례를 만들었다.


이념적으로는 분단과 전쟁이라는 특수 상황을 이용해 모든 비판과 반대 의견에 '용공', '빨갱이'라는 꼬리표를 붙여 억압했다. 이는 대통령에 대한 비판을 국가에 대한 반역으로 동일시하는 문화를 만들어, 건전한 비판과 견제를 원천적으로 차단한 것이었다. 반공이데올로기는 이후 대한민국 정치에서 전가의 보도처럼 활용되는 악습이 되었다.


이승만은 여기서 그치지 않았다. 자유당을 대통령의 뜻을 관철하는 거수기 역할의 '친위 정당'으로 만들었다. 정부 관료들은 국민이 아닌 대통령 개인에게 충성하도록 강요되었다. 이로 인해 정책 결정 과정에서 다양한 의견 수렴이나 토론은 실종되고, 대통령의 의중이 곧 국가 정책이 되는 비민주적 의사결정 구조가 굳어지고 말았다.


이승만의 독재는 단순히 한 권력자의 일탈이 아니었다. 그의 통치 12년 동안 헌법을 유린하고, 국가기구를 사유화하며, 반대 세력을 폭력적으로 억압하는 과정에서 만들어진 모든 비정상적인 관행들이 '제왕적 대통령제'라는 시스템의 DNA로 각인되었다.


이후 박정희, 전두환 군사정권은 이승만이 닦아놓은 제왕적 통치 방식을 더욱 강화하고 체계화했다. 1987년 민주화 이후, 대통령의 임기가 5년 단임으로 바뀌는 등 제도적 개선이 이루어졌다. 하지만 여전히 대한민국은 대통령에게 권력이 과도하게 집중되고, 대통령이 국회를 경시하며, 검찰 등 권력기관을 통해 정국을 돌파하려는 '제왕적' 행태가 반복된다는 비판이 끊이지 않고 있다. 이는 이승만 시대에 형성된 구조적·문화적 유산이 그만큼 깊기 때문일 것이다.


12.3 내란으로까지 이어진 이승만의 DNA


내란을 획책했던 국무회의에 참석한 국무위원 중 단 한 명도, 자기 직을 걸고 반대한 사람, 없었습니다. 입으로만 반대한다고 말했습니다. 언제 직을 걸었습니까? 귀하들이 직을 걸지 않고, 반대하지 않았을 때 국민들은 저 바깥 담장에서 밤새도록 목숨을 걸고 장갑차와 맞서고 있었어요. 목숨 걸고 국회의원들은 담장을 넘고 있었어요. 한 나라의 국무위원이라는 사람이 부끄럽지 않습니까? 무슨 낯짝으로 국무위원 배지를 걸고 있습니까?


윤석열의 12.3. 내란이 발생한 지 일주일여 후인 2024년 12월 11일 당시 조국 조국신당 대표가 국회에서 열린 긴급 현안질의에서 국무위원들을 향해 일간한 내용이다. 조국 대표의 일갈에는 대한민국 국무회의의 문제점이 고스란히 담겨 있다.


국무회의와 국회의원의 국무위원 겸직 제도는 이론적으로는 대통령의 독주를 견제하고 의회와의 협력을 이끌어 내는 '의원내각제적 요소'이지만, 현실에서는 역설적으로 '제왕적 대통령'이 의회를 통제하고 권력을 강화하는 수단으로 변질된 측면이 강하다.


50767_96339_5320.jpg 12.3 계엄군. 사진=뉴시스


국회의원의 국무위원 겸직은 대통령이 국회의원을 국무위원으로 임명하는 '인사권'을 통해 의회를 효과적으로 통제하는 수단으로 변질되었다. 대통령은 자신에게 충성하는 중진 의원을 장관으로 발탁하여 '자기 사람'으로 만들 수 있었다. 반대로 계파의 수장이나 비판적인 목소리를 내는 의원에게 장관직을 제안하여 행정부로 끌어들임으로써, 의회 내의 비판 동력을 약화시키고 갈등을 무마하는 수단으로 활용했다.


행정부를 감시하고 견제해야 할 국회의원이 행정부의 일원(장관)이 되는 순간, 그 의원의 칼날은 무뎌질 수밖에 없었다. 당연히 자신의 소속 부처나 정부 정책을 비판하기 어려워지고, 입법부 전체의 견제 기능에 공백이 생기게 되었다. 결국 이는 '견제와 균형'이라는 삼권분립의 원칙을 심각하게 훼손시키는 결과를 초래했다.


국무회의는 헌법상 '심의' 기구지만, 현실에서는 대통령의 결정을 추인하고 절차적 정당성을 부여하는 '통과 의례'의 장으로 전락하는 경우가 많았다. 모든 국무위원은 대통령이 임명하고 해임할 수 있다. 장관의 자리는 대통령의 신임에 달려있기 때문에, 국무회의 석상에서 대통령의 심기를 거스르면서까지 정책에 반대 의견을 내기란 현실적으로 불가능에 가깝다.


더욱이 중요한 정책 결정은 이미 대통령실(과거 청와대)의 수석비서관 회의 등에서 사실상 결정된 채 국무회의에 안건으로 올라오는 경우가 많았다. 따라서 국무회의의 '심의'는 활발한 토론보다는, 대통령의 결정을 공유하고 정당성을 부여하는 형식적인 절차에 그치고는 했다.


이처럼 국회의원의 국무위원 겸직 제도와 국무회의는 1948년 건국 초기부터 존재했던 우리 헌법의 독특한 특징입니다. 본래 의도는 대통령의 독주를 막는 '안전장치'였으나, 현실 정치에서는 오히려 대통령이 막강한 인사권을 통해 의회를 무력화하고, 국무회의를 형식화하여 자신의 뜻을 관철시키는, 즉' 제왕적 대통령제'를 더욱 공고히 하는 역설적인 도구로 작동해 왔다. 대통령에게 권력이 집중된 구조적 문제와 이러한 제도가 결합하면서, 한국의 대통령은 미국의 대통령보다도 더 강한 영향력을 행사할 수 있는 제도적 기반을 갖게 된 것이다.


주요 핵심 참모들과 계엄을 획책하고 국무회의에서는 형식적 의결만 거쳤던 12.3. 내란은 이러한 국무회의의 한계점을 여실히 보여주는 사례다. “내란을 획책했던 국무회의에 참석한 국무위원 중 단 한 명도, 자기 직을 걸고 반대한 사람, 없었습니다.”는 조국 대표의 질책은 거수기로 전락한 국무회의의 현실에 대한 뼈아픈 지적이었다. 국무위원을 상대로 “무슨 낯짝으로 국무위원 배지를 걸고 있습니까?”라고 질책한 것은 국회의원의 국무위원 겸직에 대한 비판이었다.


이승만이 설계한 국무회의가 윤석열의 12.3 내란에서 고스란히 나타났다. 요컨대 이승만은 대한민국 제왕적 대통령제의 설계자이자 그 첫 번째 실행자였으며, 그의 독재는 오늘날까지 한국 민주주의가 극복해야 할 중요한 과제를 남겼다고 할 수 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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