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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치학 쉽게읽기 16.) 승자가 모든 것을 독식한다.

55%의 민주가 36%의 군정에 패배한 선거

by 김광민

대한민국은 각종 선거에서 유효득표수의 최다 득표자를 당선인으로 선정하는 방식, 즉 단순다수제를 선택하고 있다. 2022년 3월 9일 치러진 제20대 대통령 선거에서 국민의힘의 윤석열 후보와 더불어민주당의 이재명 후보의 표 차이는 247,077표였다. 득표율로는 0.73%p에 불과한 수치였다. 하지만 0.73%p의 차이에 한 명은 대통령, 다른 한 명은 낙선자가 되었다.


0.73%p차이로 당선되었다고 해더라도 윤석열 후보의 득표율은 48.56%p로 과반에 가까웠다. 물론 이재명 후보 역시 47.83%p를 득표했지만, 24만 표라도 더 받은 윤석열의 승리는 정당했다. 하지만 2.37%p를 득표한 정의당 심상정 후보를 고려한다면 과연 윤석열의 승리가 정당한지에 대한 의문을 지울 수는 없다. 굳이 분류하자면 국민의힘을 보수로 더불어민주당과 정의당을 진보진영으로 구분할 수 있을 것이다. 그렇다면 국민의 과반인 50.2%p가 진보를 선택했음에도 48.56%p의 득표에 그친 보수 후보가 당선된 결과이기 때문이다. 다수의 후보 중 최고 득표자가 모든 것을 가져가는 단순다수제 선거방식이 민의를 왜곡시킬 수 있는 것이다.


하지만 보수 후보도 과반에 근접한 48.56%를 득표했고, 더불어민주당과 정의당의 이념적 유사성이 높다고만은 할 수 없으므로 제20대 대선을 단순다수제가 민의를 왜곡시킨 사례로 분석하는데, 선 듯 동의하기 어려울 수도 있다. 그렇다면 1987년 치러진 제13대 대통령 선거를 살펴본다면 단순다수제가 민의를 왜곡시킬 위험성에 공감하게 될 것이다. 1987년 제13대 대통령 선거는 단순다수대표제가 어떻게 대다수 국민의 뜻을 정반대로 뒤집어 놓을 수 있는지를 보여주는 가장 고통스럽고 극적인 역사적 사례이기 때문이다.


민주화 열망의 폭발과 야권의 분열


1987년 6월 29일은 '6월 민주 항쟁'을 통해 국민이 16년 만에 대통령을 직접 뽑을 권리를 되찾은 뜨거운 순간이었다. 군사독재를 끝내고 민주정부를 세워야 한다는 국민적 열망은 그 어느 때보다 높았고, 그 중심에는 민주화 운동의 두 거목, 김영삼(YS)과 김대중(DJ)이 있었다.


당연히 국민들은 군사정권의 후계자인 노태우 후보에 맞서 두 지도자가 힘을 합쳐 단일 후보를 내주기를 간절히 바랐다. 만약 단일화가 성사되었다면, 민주 세력의 승리는 거의 확실시되는 분위기였다.


양김 단일화 실패.jpg 김영삼, 김대중의 단일화 실패는 노태우의 어부지리 대통령 당선이라는 결과를 초래했다.


그러나 두 지도자는 서로 자신이 더 경쟁력 있는 후보라고 주장하며 끝내 양보하지 않았다. 결국 후보 단일화는 결렬되었다. 이는 민주화를 바라던 국민들에게는 첫 번째 절망이었고, 선거 결과를 비극으로 이끈 결정적인 원인이었다.


55%의 '민주'가 36%의 '군정'에 패배하다


1987년 12월 16일, 투표 결과는 많은 국민에게 충격을 안겨주었다. 민주정의당의 노태우 후보가 36.6%p를 득표해, 28.0%p를 득표한 통일민주당의 김영삼 후보와 27%p를 득표한 평화민주당의 김대중 후보를 꺾고 1위를 차지했다. 수치상으로는 노태우 후보가 1위를 차지했기에 대통령 당선은 당연했다. 하지만 이 숫자 뒤에는 민의의 심각한 왜곡이 숨어있었다.


통일민주당과 평화민주당은 사실상 뿌리가 같고, 목적도 동일한 쌍둥이 같은 정당이었다. 두 정당의 분열은 이념이나 정책의 차이가 아니라, '누가 대통령 후보가 될 것인가'를 둘러싼 두 지도자의 갈등 때문에 발생했다. 두 정당은 모두 신한민주당에 뿌리를 두고 있었다. 전두환 군사정권에 맞서기 위해 민주화를 열망하는 모든 세력이 뭉친 강력한 야당이었다. 이 정당의 실질적인 지도자가 바로 김영삼과 김대중, 소위 '양김'이었다.


양김의 목표는 오직 하나, "군부 독재 종식과 대통령 직선제 쟁취"였다. 이 거대한 목표 아래 모든 정책과 이념적 차이는 부차적인 문제로 여겨졌다. 1987년, 6월 민주 항쟁으로 국민들이 대통령 직선제를 쟁취하자, 이들은 '통일민주당'을 창당하며 본격적인 대선 준비에 나서기 시작했다. 이때까지도 둘은 같은 배를 탄 동지였다.


대통령 직선제라는 목표를 달성한 후, 양김은 결정적인 갈림길에 서고 말았다. 바로 누가 민주 진영의 단일 대통령 후보가 될 것인가 하는 문제였다. 김영삼은 "내가 제1야당의 총재이고, 더 폭넓은 지지를 받고 있으니 내가 후보가 되어야 한다"고 주장했다. 반면 김대중은 "내가 군부 독재 시절 더 많은 희생을 치렀고, 호남 지역의 압도적 지지를 받고 있으니 내가 나가야 한다"고 반박했다.


서로의 명분과 지지 기반이 워낙 확고했기 때문에, 양보는 불가능했다. 결국, 수많은 국민의 단일화 염원에도 불구하고 김대중 총재가 자신을 지지하는 세력을 이끌고 통일민주당을 탈당하여 평화민주당을 창당하는 분당(分黨)의 길을 걷고 말았다.


두 정당은 사실상 당명과 대표자만 달랐을 뿐, 그 내용은 거의 같았다. 두 정당 모두 군사정권 종식, 민주주의 회복, 대통령 직선제 수호, 정치사찰 중단 및 정치범 석방, 언론 자유 보장 등 사실상 동일한 가치를 내세웠다.


차이점이라면 오직 인적구성밖에 없었다. 통일민주당은 김영삼을 중심으로 한 상도동계와 비주류 세력으로, 평화민주당은 김대중을 중심으로 한 동교동계 인사들로 구성되었다. 즉, 지도자를 따라 당이 인위적으로 나뉜 것이지, 이념에 따라 갈라선 것이 아니었다. 통일민주당과 평화민주당은 '군부 독재 타도와 민주화'라는 공동의 목표를 가진, 사실상 하나의 정치 세력이었다. 그러나 대통령 후보 자리를 둘러싼 두 거물 정치인의 경쟁이 결국 분당으로 이어진 것이다. 따라서 이들의 관계는 이념적 차이로 갈라선 정당이 아니라, 같은 목표를 향해 가다 리더십 다툼으로 갈라선 '두 개의 파벌'로 이해해야 한다.


노태우 당선.jpg 노태우의 당선은 대한민국의 군정을 연장시켰다.


그렇다면 김영삼 득표율(28.0%p)과 김대중 득표율(27.0%p)을 합한 55.0%의 국민이 군부 독재 종식과 민주주의를 선택한 것이다. 국민의 55%, 즉 과반수가 넘는 유권자가 '군사정권 종식'이라는 명확한 의사를 표현했다. 그러나 이 거대한 민의는 두 후보로 갈라졌고, 그 결과 전체 유권자의 약 3분의 1(36.6%)의 지지만을 받은 노태우 후보가 어부지리로 당선되고 말았다. 이는 국민 10명 중 6명 이상이 반대한 후보가 나라의 대표가 되는, 민주주의 원리에 정면으로 위배되는 '역사적 아이러니'였다.


단순다수제의 함정


이러한 비극적인 결과는 오롯이 '1등만 모든 것을 차지하는' 단순다수제 선거 방식의 함정 때문이었다. 단순다수제는 2등, 3등이 얼마나 많은 표를 받았는지는 전혀 고려하지 않는다. 단 한 표라도 더 받은 1등 후보가 모든 권력을 가져간다.


이념이나 정책이 유사한 후보가 여러 명 나오면, 지지층이 분산되어(Vote Splitting) 결국 정반대의 성향을 가진 후보가 반사이익을 얻게 됩니다. 1987년 선거에서 '민주화'라는 더 큰 파이를 원했던 55%의 유권자는, 그 파이가 YS와 DJ라는 두 조각으로 나뉘면서 '군정 연장'이라는 더 작은 파이(36.6%)에게 패배한 것이다.


만약 당시 결선투표제가 있었다면 역사는 완전히 달라졌을 것이다. 1차 투표에서 과반 득표자가 없었으므로, 1위 노태우 후보와 2위 김영삼 후보가 결선을 치렀을 것이다. 이 경우, 김대중 후보를 지지했던 27%의 표는 대부분 김영삼 후보에게로 향했을 것이고, 민주 세력은 50%가 넘는 압도적인 지지로 정권 교체에 성공했을 것이다.


1987년 대선은 후보 단일화 실패라는 정치적 과오와 함께, 다수의 국민이 원했던 변화를 가로막고 오히려 소수의 지지를 받는 후보를 당선시킨 단순다수제의 구조적 맹점을 대한민국 역사에 고통스럽게 새겨놓은 비극적 사건이었다.


단순다수제의 또 다른 비극, 3당 합당


단순다수제에 의한 민의, 정치의 왜곡은 1987년 대선 직후 다시 일어나고 말았다. 1990년 3당 합당은 '1등만 살아남는' 단순다수제 투표 방식이 낳은 필연적인 정치적 괴물이었다. 3당 합당은 선거 제도의 특징과 정치인들의 전략적 계산이 어떻게 맞물리는지를 보여주는 대표적인 사례로 기록되어 있다.


1988년 제13대 총선 역시 단순다수제로 치러졌다. 그 결과, 노태우 대통령의 집권당인 민주정의당은 전체 의석의 과반수를 확보하지 못하는 '여소야대(與小野大)' 국회가 만들어졌습니다. 1987년 대선의 결과를 본다면 당연한 결과였다.


집권여당인 민주정의당이 125석을 확보한 반면 평화민주당과 통일민주당은164석을 확보했다. 대통령이 국정을 안정적으로 운영하기 매우 어려운 구조였다. 법안 하나, 예산안 하나 통과시키기 위해 거대 야당의 눈치를 봐야 하는 상황이 예상됐다. 노태우 정권 입장에선 이 정치적 교착 상태를 어떻게든 돌파해야 했다.


단순다수제의 법칙, "뭉쳐야 이긴다"


단순다수제는 승자독식(Winner-takes-all)이라는 냉혹한 법칙이 지배하는 시스템이다. 특히 대통령 선거에서 그 효과는 극대화된다. 정치인들은 바로 직전 선거인 1987년 대선에서 이 법칙을 뼈아프게 경험했다. 이 경험은 야당의 지도자였던 김영삼 총재에게 다음과 같은 계산을 하게 만들었다.


"이 단순다수제 아래에서는 야권이 나(YS)와 김대중(DJ)으로 나뉘어 있는 한, 다음 대선에서도 승리할 수 없다. 결국 DJ와 다시 단일화 협상을 하거나, 아니면 다른 길을 찾아야 한다."


결국 김영삼 총재는 DJ와의 연대 대신, 집권 세력과 손을 잡아 그 안에서 권력을 쟁취하는 길을 선택하고 말았다. 이것이 바로 그가 내세운 "호랑이를 잡으러 호랑이 굴로 들어간다"는 논리였다. 단순다수제라는 시스템이 야당 지도자에게 '적과의 동침'이라는 파격적인 선택을 하도록 압박한 셈이다.


선거가 아닌 '야합'에 민의가 뒤집혔다.


결국 1990년, 집권당인 노태우의 민주정의당, 제1야당이던 김영삼의 통일민주당, 그리고 김종필의 신민주공화당은 합당을 선언하고 민주자유당(민자당)이라는 거대 여당이 탄생했다. 단순다수제에 의해 민의가 완전히 왜곡된 것이었다.


1988년 총선에서 국민들은 '여소야대'를 만들어 정부를 견제하라는 명령을 내렸다. 하지만 정치인들은 다음 선거에서 이기기 위해, 선거가 아닌 정치적 야합을 통해 이 구도를 완전히 뒤집어 버리고 말았다.


3당합당.jpg 단순다수제에서는 무조건 승자가 되어야 한다. 김영삼은 김대중이 아닌 노태우의 손을 잡음으로써 승자가 되었다.


합당을 통해 민자당은 국회 의석의 3분의 2를 넘는 압도적 다수당이 되었다. 이는 단순다수제 선거에서 승리하기 위한 가장 확실한 방법, 즉 선거 전에 미리 압도적인 연합을 구성해 버리는 것이었다.


결론적으로, 3당 합당은 승자독식의 단순다수제 선거 제도하에서 권력을 쟁취하고 유지하기 위해 정치 엘리트들이 선택한 극단적인 전략이었다. 유권자들이 투표를 통해 만들어놓은 정치 지형을, 정치인들이 제도의 허점을 이용해 자신들에게 유리하도록 인위적으로 재편해 버린 사건으로, 민의를 왜곡한 대표적인 사례로 평가받고 있다.


야합이 아닌 민의를 선택한 노무현


결국 김영삼은 1992년 대선에 민자당 후보로 출마해 김대중 후보를 꺾고 당선되었다. 김영삼은 5.18의 노태우와 5.16의 김종필의 손을 잡았다. 3당 합당은 민의를 저버린 야합이었지만 결국 그가 대통령에 당선됨으로써 성공한 것처럼 보였다. 하지만 민의의 역사는 그렇게 쉽게 왜곡되지 않았다.


3당 합당이라는 거대한 흐름에 정면으로 맞선 정치인이 있었다. 초선 의원이었던 노무현이었다. 그는 3당 합당을, 국민을 배신하는 야합이자 민주주의의 원칙을 훼손하는 행위로 규정했다. 노무현의 반대 논리는 명확했다. 1988년 총선에서 국민들은 특정 정당에 과반을 주지 않는 '여소야대'를 만들어 주었다. 이는 서로 견제하고 균형을 이루라는 국민의 명령이었다. 3당 합당은 이러한 국민의 뜻을 정치인들이 인위적인 야합으로 뒤집어 버리는 행위였다.


노무현은 군사독재에 맞서 싸우던 야당이, 바로 그 독재 세력의 후예와 손을 잡는 것은 어떠한 명분으로도 정당화될 수 없다고 보았다. 그에게 3당 합당은 민주화를 위해 희생했던 수많은 사람들에 대한 배신이었다.


그는 국회에서 열린 통일민주당의 합당 결의대회에서 "이의 있습니다! 반대 토론을 해야 합니다!"라고 외치며 합당의 부당함을 알렸다. 이 모습은 그의 원칙과 소신을 상징하는 장면으로 역사에 기록되었다.


노무현 이의있습니다.jpg 통일민주당 합당 결의대회에서 손을 들어올리며 "이의 있습니다!"를 외치는 노무현


결국 노무현은 김영삼 총재를 따라가는 쉬운 길을 포기하고, 이기택, 김정길 등 소수의 의원과 함께 통일민주당을 탈당했다. 그리고 이들은 김대중의 평화민주당과 합쳐 '꼬마 민주당'을 창당하며 험난한 길을 걷기 시작했다.


이 선택의 대가는 혹독했다. 그는 이후 총선과 부산시장 선거에서 연이어 낙선하며 '바보 노무현'이라는 별명을 얻게 되었다. 눈앞의 이익을 좇지 않고, 원칙을 위해 패배가 뻔한 길을 걸어가는 그의 모습에 대한 애칭이었다.


하지만 이 '바보 같은' 선택은 역설적으로 그를 가장 강력한 정치인으로 만들었다. 눈앞의 이익을 위해 원칙을 저버리지 않는 그의 모습은 국민들에게 깊은 신뢰를 심어주었고, 이는 훗날 그가 지역주의의 벽을 넘어 대한민국 제16대 대통령에 당선되는 가장 중요한 정치적 자산이 된 것이다.


야합의 결말, 20년 만의 군사 쿠데타


집권을 위해 군사독재 세력과 손을 잡아 탄생한 민주자유당은 신한국당(1995~1997), 한나라당(1997~2012), 새누리당(2012~2017), 자유한국당(2017~2020), 미래통합당(2020), 국민의힘 (2020~)을 거치며 김영삼, 이명박, 박근혜, 윤석열 등 네 명의 대통령을 배출했다. 하지만 이 중 세 명의 대통령이, 심지어 그 중 한 명인 윤석열은 대통령 재직 중 내란 혐의로 구속되었다. 이에 더해 두 명의 대통령이 임기 중 탄핵 되었다. 그리고 2025년 현재 국민의힘은 윤석열의 내란에 동조한 혐의로 정당해산이 언급되고 있는 처지에 놓이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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