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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치학 쉽게 읽기 24)독재자 이승만

이승만 독재의 특징

by 김광민

대한민국 초대 대통령인 이승만은 건국의 아버지라는 긍정적 평가와 함께, 장기 집권 과정에서의 비민주적 행태로 인해 독재자라는 비판을 동시에 받는 한국 현대사의 가장 논쟁적인 인물 중 한 명이다. 그의 통치 행태를 단순히 '독재'라는 단일 용어로 규정하는 것은 그 복잡하고 다층적인 성격을 온전히 이해하는 데 한계가 있다. 따라서 여러 ‘권위주의 이론’을 통해 이승만 정권이 권력을 강화하고 유지하기 위해 사용했던 구체적인 수단(헌법 개정, 반대파 제거, 이념 활용, 개인 숭배, 사법 및 군사력 동원 등)을 역사적 증거를 기반으로 검토해 보고자 한다.


권위주의(Authoritarianism)의 특징과 이승만 정권


권위주의는 강력한 중앙 권력을 특징으로 하지만, '제한된 정치적 다원주의'를 허용하는 통치 형태다. 권위주의는 이념적 열정보다는 '현 상태 유지'를 최우선 목표로 삼으며, 이념 자체보다는 권력 유지의 도구로서 이를 활용한다.


이승만과 권위주의.png


헌법과 선거의 조작


이승만 정권의 독재적 성격은 헌법과 민주적 제도를 자신의 권력 유지 수단으로 활용한 일련의 사건들에서 명확하게 드러난다. 제1대 대통령 임기 만료를 앞둔 1952년, 국회 간접선거를 통해 재선이 어렵다고 판단한 이승만은 대통령 직선제를 골자로 한 ‘발췌개헌’을 추진했다. 그는 임시수도 부산에 계엄령을 선포하고 야당 의원들을 대거 연행, 감금하는 물리적 압박을 가함으로써 직선제 개헌안을 강제로 통과시켰다. 이는 전쟁의 혼란을 악용하여 민주주의의 형식적 절차를 권력 유지의 도구로 전락시킨 전형적인 권위주의적 행태로 볼 수 있다.


1954년에 단행된 ‘사사오입개헌’은 이러한 행태의 극치를 보여준다. 이 개헌은 초대 대통령에 한해 중임 제한을 철폐하여 이승만의 영구 집권을 가능하게 하는 것이 주요 목적이었다. 그러나 국회 표결 결과 정족수 미달로 부결되자, 자유당은 "사사오입(四捨五入)"이라는 비논리적인 수학적 계산법을 동원하여 부결된 안건을 강제로 통과시켰다. 이 사건은 이승만 정권이 법치주의를 완전히 무시하고 권력자의 자의적 판단을 우선시했음을 명확히 보여주는 사례이다.


사사오이.jpg 사사오입 개헌안이 통과되자 민주당 의원 이철승이 단상에 뛰어올라 국회부의장 최순주의 멱살을 잡았다.


이러한 비민주적 행위는 1960년 ‘3.15 부정선거’에서 절정에 달한다. 1956년 제3대 대통령 선거에서 야당 후보였던 조봉암이 30%에 육박하는 득표율을 얻고, 같은 해 부통령에 장면 후보가 당선되면서 이승만 정권의 위기감은 고조되었다. 정권의 지지 기반이 점차 약화되고 있음을 인지한 이승만과 자유당은 1960년 정·부통령 선거에서 투·개표 요원을 동원한 전방위적인 부정행위를 자행했다. 이는 이승만 정권이 더 이상 합법적이고 민주적인 절차로는 권력을 유지할 수 없음을 스스로 인정한 행위였으며, 결국 ‘4.19 혁명’이라는 국민적 저항에 직면하여 이승만 대통령의 하야로 이어졌다.


반대 세력 제거와 공포정치


이승만 정권의 독재적 성격은 반대 세력을 제거하는 방식에서도 뚜렷이 나타난다. 1956년 선거에서 강력한 경쟁자로 부상했던 진보당 당수 조봉암은 1958년 간첩 혐의를 씌워 체포되었고, 1959년 사형이 집행되었다. 이 사건은 당시 외신에서도 이승만 정권이 재집권을 위해 반대당의 수족을 잘라냈다고 평가했으며, 조봉암의 사형으로 이승만의 최대 정적이 사라졌다고 보도했다. 이승만은 이미 조봉암 체포 이전부터 그를 '조치되었어야 할 인물'로 규정했다. 이는 2011년 대법원에서 무죄가 선고된 '사법 살인'으로 평가받는다. 이 사건은 반공주의 이념이 정적을 제거하기 위한 정치적 도구로 활용되었음을 보여주는 대표적인 사례다.


언론 탄압 역시 권위주의적 통치의 핵심 수단이었다. 정부에 비판적인 논조를 이어가던 ‘경향신문’은 1959년 4월 30일 이승만 정부에 의해 폐간 명령을 받았다. 이는 이승만 정권이 자유를 보장하는 민주주의의 외피를 점진적으로 훼손하는 방식이었다. 그러나 이 사건의 진행 과정에는 중요한 차이점이 존재한다. ‘경향신문’이 폐간 명령에 불복하여 소송을 제기했고, 법원이 가처분 신청을 받아들여 발행이 가능해지자 정부는 '무기 발행정지'라는 새로운 행정처분으로 대응했다. 이는 법치가 완전히 해체된 것이 아니라, 권력과 법률 간의 제한적인 긴장 관계가 존재했음을 보여준다.


경향신문 폐간.jpg 일러스트 = 박건웅


정치적 폭력 또한 이승만 정권의 통치 방식 중 하나였다. 1958년 「국가보안법」 개정안을 통과시키기 위해 자유당은 야당 의원들을 폭력으로 국회에서 몰아내는 ‘2.4 파동’을 저질렀다. 더 나아가 정부의 필요에 따라 반공 단체나 학생들을 동원한 관제 데모를 적극적으로 활용했다.


공포 체제의 구축


이승만 정권은 반공주의를 명분으로 군사력과 사법 시스템을 동원해 국민을 탄압하고 공포를 확산시켰다. 1948년 10월, 여수 주둔 국방경비대 14연대 일부가 무장반란을 일으키자 이승만 정부는 즉시 계엄령을 선포하고 10개 대대 병력을 투입해진압했다. 이 과정에서 정부군에 의해 약 2,500여 명의 민간인이 살해당했다.


특히, 제주 4.3사건은 이승만 정권의 공포 통치 성격을 극명하게 보여주는 사례다. 남로당 제주도당의 무장봉기에 맞서 이승만 정권은 군 병력을 증파하고 제주도 전역에 계엄령을 선포했다. 이후 진행된 무장대 토벌 및 초토화 작전으로 인해 제주도 중산간지대 95%의 마을이 파괴되었고, 군경과 극우단체 서북청년단에 의해 수만 명의 무고한 주민들이 살해당했다. 이 과정에서 재판 절차도 없이 주민들이 집단 사살되었으며, 한국전쟁 발발 직후에는 보도연맹 가입자나 4.3사건 관련 요시찰자 등 수천 명이 예비검속 명목으로 집단 처형되기도 했다. 이러한 대규모 민간인 학살은 이승만 정권이 반대 세력을 제거하는 데 있어 군사력 동원이라는 극단적인 수단을 서슴지 않았음을 증명한다.


반공주의의 역할


이승만 정권의 통치 행태를 이해하는 데 있어 '반공주의'의 역할은 매우 중요하다. 한국전쟁은 이승만에게 비상사태를 선포하고 모든 반대 세력을 '빨갱이'로 몰아 탄압함으로써 권력을 공고히 할 수 있는 완벽한 명분을 제공했다. 이승만 정권은 국가 기념일 연설을 통해 공산주의자들의 만행을 지속적으로 상기시키고, 반공주의를 민족의식과 연결하여 국민의 의식에 내면화시키는 데 적극적으로 활용했다. 그러나 이는 사회 구성원 전체를 새로운 인간형으로 재창조하려는 시도라기보다, 정권의 정당성을 확보하고 통치 행위를 정당화하는 '안보적 이념'에 가까웠다.


한편, 이승만이 제시한 '일민주의(一民主義)'는 반공 체제를 구축하고 국민을 단합시키기 위한 이념이었으나, 사회 전반의 구조를 재편하려는 총체적 이념이 아닌 '반공'이라는 단일 명분에 집중했다. 미국 군정 요인이었던 버치가 이승만을 "파시스트가 아니라 파시스트보다 두 세기 앞선 순수한 부르봉파(Bourbon)"라고 평한 것은 그의 통치 행태가 근대적 이념을 바탕으로 한 것이라기보다는, 제도와 법 위에 군림하려는 봉건 군주적인 성격이 더 강했음을 보여준다.


개인 숭배와 대중 동원


이승만 정권은 정권의 정당성과 통치 기반을 강화하기 위한 상징적 수단으로 강력한 개인 숭배를 활용했다. 그는 '건국 대통령', '민족의 태양', '자유세계의 광명' 같은 호칭으로 불렸으며, 그의 초상이 화폐에 새겨지고, 호(號)인 '우남'을 딴 도로, 공원, 건물들이 세워졌다. 1950년 7월, 한국은행이 처음 발행한 1000원권에 한복을 입은 이승만 대통령의 초상이 실렸다. 이후 1952년에 발행된 500원권과 1000원권, 그리고 1953년 화폐 개혁 이후 발행된 '환(圜)' 단위의 지폐들에도 이승만의 초상이 계속 사용되었다. 특히 그의 생일은 성대한 국가 행사로 치러졌으며, 군인과 탱크까지 동원된 대규모 시가행진이 벌어지기도 했다.


이러한 이승만의 인격 숭배는 강력했지만, 모든 생활을 통제하고 이념적으로 복종을 강요하는 극단적인 사례와는 차이가 있었다. 이승만 정권의 우상화는 강력한 단일 정당이나 총체적 이념이 부재한 상황에서 통치 기반을 강화하기 위한 '상징적 수단'에 불과했다. 4.19 혁명 이후 그의 모든 상징물이 순식간에 사라졌다는 점은 이러한 우상화가 이념적 충성심에 뿌리박은 것이 아니라, 권력에 의존한 취약한 현상이었음을 보여준다.


1962년 6월 10일 정부는 화폐 단위를 '환(圜)'에서 '원(元)'으로 바꾸는 긴급통화조치를 단행했다. 이때 새로운 '원' 단위 화폐들이 발행되었고, 이 화폐들에는 이승만 전 대통령 초상화 대신 세종대왕, 남대문, 독립문 등의 다른 인물이나 상징물이 새겨졌다. 이는 영속적인 인격 숭배와 구별되는 중요한 지점이다.


이승만 화폐.jpg 이승만 초상화가 새겨진 화폐


독재자 이승만


이승만 정권의 특징은 '제한된 다원주의'와 '정치적 억압'을 핵심으로 하는 권위주의에 부합한다. 그는 자유로운 선거를 통해 권력을 유지하려 했으나, 위협을 느낄 때마다 헌법과 선거를 조작하고, 정적을 제거하며, 언론을 탄압했다. 또한 여순사건이나 제주 4.3사건처럼 군사력을 동원한 대규모 민간인 학살을 자행하고, 조봉암 사건처럼 사법 절차를 무력화시키는 '사법 살인'을 저질러 정적을 제거함으로써 강력한 공포정치를 구축했다. 이처럼 이승만 정권은 공포와 폭력을 통해 반대 세력을 배제하고 권력을 유지했다.


이승만 정권의 통치 체제는 형식적인 민주주의의 틀을 남겨두고 그 내용을 비워내는 권위주의적 행태를 보였다. 한국전쟁과 냉전이라는 외부 환경은 '반공'이라는 이념을 정권 유지의 핵심 도구로 제공함으로써 이러한 독재 체제를 공고화하는 결정적인 역할을 했다. 이승만 정권의 독재는 국민에 의한 민주주의 제도의 훼손이라는 비극적인 선례를 남겼지만, 결국 국민의 힘으로 무너졌다는 점에서 한국 민주주의의 성장 잠재력을 보여주기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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