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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치학 쉽게 읽기 25)박정희와 개발독재

여전히 한국을 지배하고 있는 박정희의 유령

by 김광민

박정희 집권기는 대한민국 현대사에서 가장 복합적이고 논쟁적인 시기로 평가받는다. 1961년 5.16 군사정변으로 정권을 장악한 이후, 박정희는 1979년 서거할 때까지 약 18년간 대한민국의 통치자로 군림했다. 이 시기 동안 한국은 전례 없는 고도 경제성장을 경험하며 절대 빈곤에서 벗어났다는 긍정적 평가와 함께, 자유민주주의의 제도적 기반이 철저히 무너지고 인권 탄압이 일상화된 독재 체제였다는 비판을 동시에 받고 있다.


박정희 독재 체제는 단순히 개인의 권력욕에 기반한 것이 아니라, 헌정 질서 파괴, 국가 기구를 통한 통제, 사회적 저항 억압, 그리고 독재를 정당화하는 이념적 기제들을 총동원하여 구축된 고도화된 권위주의 체제였다. 특히, 독재가 5.16 군사정변 이후 일거에 완성된 것이 아니라, 대통령 3선 개헌(1969)과 10월 유신(1972)으로 이어지는 단계적이고 점진적인 과정을 거쳐 공고화된 특징을 간과해서는 안 된다.


헌정 질서 파괴를 통한 권력의 제도화

대통령 3선 개헌. 장기 집권의 서막 (1969)


박정희는 1967년 제6대 대통령으로 재선에 성공했으나, 제3공화국 헌법(1962년 개정) 제69조 3항은 대통령의 중임을 1차에 한해 허용하고 있었다. 이에 따라 1971년 대통령 선거에 다시 출마하기 위해서는 헌법 개정이 필수적이었다. 박정희 정권은 권력의 장기 집권화를 위한 3선 개헌을 추진하기 시작했다.


이 과정은 권력 내부의 반발부터 직면했다. 후계자로 유력시되던 김종필과 그를 지지하는 세력은 3선 개헌에 반대했고, 이에 박정희는 1968년 '국민복지회 사건'과 1969년 '4·8 항명 파동'을 통해 이들을 숙청하며 당내 기반을 확고히 다졌다. 이어서 민주공화당은 1969년 초부터 개헌의 필요성을 공론화했고, 야당인 신민당은 '3선개헌저지투쟁위원회'를 결성하며 격렬한 반대 투쟁을 벌였다.


격렬한 반대 여론과 야당의 저항 속에서, 3선 개헌안은 1969년 9월 14일 새벽 2시 30분, 일요일이라는 변칙적인 시점에 통행금지가 있던 상황에서 기습적으로 통과되었다. 야당 의원들이 국회 본회의장에서 농성 중인 틈을 타, 여당 의원 122명은 국회 3별관에 모여 개헌안과 국민투표법안을 날치기로 통과시켰다. 이 날치기 통과된 개헌안은 이후 국민투표를 거쳐 확정되었다. 이는 헌정 질서를 훼손하면서도 '국민의 동의'라는 형식적 절차를 통해 독재를 합법화하려는 시도였다.


박정희 3선개헌.jpg 1969년 당시 정부와 여당인 공화당이 ‘3선 개헌’을 추진하자 야당 의원들이 국회 본회의장 단상을 점거한 채 철야 농성을 벌이고 있다


1.2 10월 유신. 영구 집권 체제의 완성 (1972)

3선 개헌을 통해 장기 집권의 길을 연 박정희는 1972년 10월 17일, 대통령 특별선언을 발표하며 헌정 질서를 완전히 중단시켰다. 이 조치로 국회는 해산되고, 정당 및 정치활동은 중지되었으며, 전국에 비상계엄령이 선포되었다. 이는 헌법적인 근거가 전혀 없는 초법적인 행위로, 박정희는 스스로 법 위에 군림하는 '주권적 독재'의 길을 택했다.


'한국적 민주주의'를 표방하며 제정된 유신 헌법(제8호)은 삼권분립의 원칙을 완전히 무너뜨리고 대통령에게 모든 권력을 집중시켰다. 유신 헌법의 독재적 설계는 다음과 같은 주요 내용에 명시적으로 드러난다.


대통령 간선제: 대통령 선출 방식이 국민의 직접 선거에서 통일주체국민회의의 간선제로 변경되었다. 통일주체국민회의는 사실상 정부의 통제를 받는 관제 기구에 불과했다.


종신 집권의 법적 기반: 대통령의 임기는 6년으로 연장되었고, 연임 횟수 제한이 철폐되어 사실상 종신 집권이 가능해졌다.


삼권분립의 붕괴: 대통령은 국회의원 정수의 3분의 1에 해당하는 수의 의원을 추천하고 통일주체국민회의가 승인하는 방식으로 국회를 장악했다. 이들이 만든 단체가 유신정우회였다. 또한, 대통령에게 긴급조치권과 국회 해산권을 부여하여 입법부를 무력화했고, 모든 법관에 대한 임명권까지 가져 사법부마저 장악했다.


기본권 침해: 유신 헌법은 국민의 기본적 자유와 권리의 본질적 침해를 금지하는 조항을 삭제했으며, 노동 3권 등 국민의 기본권을 대폭 제한했다.


유신 헌법은 군사적 조치 이후 '국민투표'라는 절차적 정당성을 가장하여 독재를 제도화하려는 시도였다. 이는 단순히 물리적 힘에 의존하는 것을 넘어, 법률과 제도의 외피를 교묘하게 활용해 합법성을 부여하려는 독재의 점진적이고 세련화된 양상을 보여준다. 박정희가 내세운 '한국적 민주주의'는 서구의 자유민주주의를 대체하려는 이념적 시도였으나, 실질적으로는 1인 전제정치 또는 파시즘적 통치에 불과하다는 비판을 받았다.


유신헌법.png


공권력을 동원한 반대 세력 탄압과 사회 통제


유신 헌법의 핵심이자 독재 통치의 상징적인 도구는 바로 '긴급조치권'이었다. 이는 대통령에게 헌법 효력까지도 일시적으로 정지시킬 수 있는 초법적인 권한을 부여했다. 이 권한을 근거로 발동된 긴급조치들은 반정부 운동을 탄압하고 국민의 기본권을 억압하는 데 무자비하게 활용되었다.


예를 들어, 긴급조치 제1호는 대한민국 헌법에 대한 부정, 반대, 비방을 금지했고, 제4호는 민주화 운동의 구심점이었던 '전국민주청년학생총연맹(민청학련)'을 해체하고 관련자들을 무더기로 검거하는 데 사용되었다. 긴급조치의 결정판이라 불리는 제9호는 유신헌법에 대한 일체의 비방을 금지하고 영장 없는 체포와 구금을 가능하게 했다. 이 조치로 "박정희는 나쁜 놈이다"라고 말한 한 농민에게 징역형이 선고되는 등, 사소한 비방 행위조차 가혹하게 처벌함으로써 국민의 일상적인 언론의 자유마저 철저히 억압했다.


유신 궐기대회.jpg 유신투표에 참여하자는 권기대회. 사진=경향신문


사법 살인과 조작 사건


박정희 독재 체제는 긴급조치라는 초법적 수단과 함께 사법부를 통치의 도구로 전락시켰다. 이를 상징적으로 보여주는 대표적인 사례가 바로 인민혁명당 사건이다. 1964년에 발생한 1차 인혁당 사건은 '북한의 지령을 받은 반정부 조직'이라는 명목으로 혁신계 인사들을 탄압한 조작 사건이었으며, 1974년 2차 인혁당 사건(인혁당 재건위 사건)은 민청학련의 배후로 지목된 관련자 8명이 재판 18시간 만에 사형이 집행된 '사법 살인'으로 평가된다.


이 사건들은 훗날 재심을 통해 그 진실이 밝혀졌다. 재판부는 관련자들이 고문과 불법 수사를 받았으며, 인혁당이 강령을 가진 구체적인 조직이라는 사실이 입증되지 않았다고 판단하여 모두 무죄를 선고했다. 이는 당시 사법부가 정권의 의도에 따라 판결을 내리는 '정치 재판소'의 역할을 했음을 명확하게 보여준다.


이처럼 박정희 정권은 '반공주의'를 체제 정당성의 핵심으로 내세우면서, 정작 반공 이데올로기를 외부의 위협(북한)뿐만 아니라 내부의 반대 세력(학생, 지식인)을 제거하고 무고한 시민들을 탄압하는 데도 활용하는 이중적인 면모를 보였다.


비밀경찰을 통한 공포 정치. 중앙정보부


박정희의 독재는 '중앙정보부'라는 막강한 물리적 강제력을 통해 완성되었다. 5.16 군사정변 직후 창설된 중앙정보부는 초기부터 최고 권력자의 비호를 받는 비밀경찰로 기능했다. 1963년 이후 대통령 직속 기구로 위상이 격상되었고, 비상계엄 상태가 아니어도 군부가 모든 분야에 실질적인 통치력을 행사할 수 있는 기구가 되었다.


중앙정보부는 반공과 방첩이라는 본연의 임무를 넘어, 쿠데타에 저항하는 세력을 제거하고, 정부 시책을 홍보하며, 여론을 정권에 유리하게 조성하는 등 권력의 말초신경 역할을 수행했다. 이러한 공포 통치 메커니즘은 '긴급조치'라는 법적 외피를 쓴 초법적 수단과 '중앙정보부'라는 물리적 강제력이 결합하여 반대 세력을 제거하고 국민을 통제하는 방식으로 작동했다. 인혁당 사건과 민청학련 사건 같은 조작 사건들은 이 메커니즘이 얼마나 자의적이고 무자비하게 작동했는지를 보여주는 상징적인 사례다.


언론 통제와 정보 독점의 기제


유신 체제는 모든 정치활동 목적의 집회와 시위를 금하고, 언론, 출판, 보도, 방송에 대해 명시적인 사전 검열을 요구했다. 이는 언론을 정부의 비판적 감시자에서 '정부 시책 홍보'와 '여론 조성'의 수단으로 전락시키는 결과를 초래했다.


정권은 이러한 물리적, 정치적 압력뿐만 아니라 교묘한 경제적 수단을 활용하여 언론을 통제했다. 비판적 논조를 견지하려는 언론사에 대해 주요 광고주들을 협박해 광고 계약을 일방적으로 해지하도록 압력을 넣는 방식을 사용했다. 이는 독재 체제가 사회의 다양한 분야(경제, 기업)를 통치 도구로 동원하는 방식을 보여준다.


동아일보 백지 광고 사태


1974년, 동아일보 기자들은 '자유언론수호대회'를 열고 결의문을 발표하며 정권의 언론 탄압에 대한 저항 의지를 표명했다. 이에 당황한 박정희 정권은 중앙정보부를 동원해 동아일보의 주요 광고주들에게 광고 계약 해지를 강요하는 압력을 행사했다.


1974년 12월 26일부터 동아일보는 광고 지면을 채우지 못하고 백지로 발행되거나 기사로만 채우는 사태에 직면했다. 이 사태에 대해 시민들은 자발적으로 동아일보를 지지하며 '격려 광고'를 게재하고 성금을 보내는 방식으로 정권의 언론 탄압에 저항했다. 이는 정보 독점 시대에도 시민들의 자발적 연대와 저항이 가능했음을 보여주는 사례였다.


결국 동아일보 경영진은 정권의 압력에 굴복하여 1975년 3월부터 저항하던 기자들을 대량 해고했다. 하지만 해고된 기자들은 '동아자유언론수호투쟁위원회'를 결성하여 민주화 운동에 투신했으며, 이는 훗날 시민 기금으로 '한겨레신문'을 창간하는 밑거름이 되었다. 이 사건은 독재가 언론을 통제하려는 시도가 역설적으로 더 큰 저항을 낳아 민주화 운동의 중요한 동력이 되었음을 보여준다.


동아일보 백지광고.jpg 동아일보 백지광고. 민주주의기념사업회


'개발'과 '국가주의' 이념을 통한 독재의 정당화


박정희는 5.16 쿠데타로 집권한 이후, 정권의 정당성을 확보하기 위해 경제개발을 최우선 과제로 내세웠다. 당시 국민들이 절대 빈곤에 시달리던 상황에서 "잘 살아보세"라는 구호와 강력한 경제성장은 대중의 지지를 얻는 중요한 명분이 되었다.


박정희 시대는 국가 주도의 강력한 경제개발 계획을 통해 경이적인 경제성장(연평균 8.9%)을 이루었고, 1인당 국민총생산(GNP)은 1961년 87달러에서 1979년 1,597달러로 크게 증가했다.3수출액은 100억 달러를 달성하기도 했다.


그러나 이러한 성과는 '선택과 집중'을 내세운 정부 주도 통제 경제의 결과였다. 정부는 기업에 저금리의 특별 금융을 제공하고 각종 보조금을 지급했으며, 이는 시장 기능의 활성화를 저해하고 재량에 의존하는 정부-기업 관계를 고착화하며 '정경유착'이라는 심각한 폐해를 낳았다. 또한, 중화학 공업 중심의 경제 정책은 과잉 중복투자를 초래하여 제2차 석유 파동 시기에 경제 악화와 국민 불만으로 이어졌다.


'개발독재론'은 '경제 성장을 위해서는 민주주의를 잠시 유보해야 한다'는 논리로 독재를 합리화하는 대표적인 사례이다. 하지만 장기적인 경제성장은 민주화가 담보될 때 지속 가능하다는 반론도 제기된다. 이는 선(先)경제성장, 후(後)민주화라는 논리가 비현실적임을 보여준다.


반공주의와 국가주의의 신성화


박정희 정권은 자신의 권위주의 체제를 정당화하기 위해 반공과 국가안보를 적극적으로 활용했다. 북한의 위협을 끊임없이 강조하며 이를 국내의 정치적 반대자들을 '불순세력'으로 몰아 탄압하는 데 동원했다. 또한, 장발이나 미니스커트 단속과 같은 사소한 일상적 규제조차 '국가안보'와 동일선상에 놓으며 국민의 자유를 제약하는 논리로 활용했다.


이와 함께 박정희는 '국가주의' 이념을 신성화했다. 그는 '진충보국 멸사봉공'(盡忠報國 滅私奉公)과 같은 문구를 강조하며, 개인이 국가를 위해 희생하는 것이 당연하다는 사상을 내면화하도록 유도했다. 이는 국가가 개인의 자유나 시민 사회보다 우월한 존재라는 전제에 기반한 것으로, 정치적 반대 행위를 '국론 분열'이나 '사회 기강 해이'로 규정하며 억압하는 논리로 활용되었다. 박정희 시대의 독재는 단순히 '개발'이나 '반공'이라는 단일 이념에 기반한 것이 아니라, 경제적 국가주의, 반공주의, 그리고 일제강점기 파시즘적 교육과 같은 다양한 이념들이 혼합된 복합적인 '국가주의'였다.


미니스커트 단속.png 장발과 미니스커트 단속


여전히 살아있는 박정희 독재


박정희의 독재는 단기간에 국가적 역량을 동원하여 산업화와 경제 성장을 이끌어냈다는 긍정적인 평가를 받는다. 그러나 그 대가로 헌정 질서 파괴, 기본권 침해, 그리고 인권 탄압이라는 막대한 희생을 강요했다. 법치주의가 무너지고, 사법부는 정권의 시녀로 전락했으며, 긴급조치와 같은 초법적 수단을 통해 국민은 일상적인 감시와 공포에 시달려야 했다.


박정희 독재는 단순한 '철권통치'를 넘어, 3선 개헌과 유신 헌법이라는 법적·제도적 장치, 중앙정보부라는 물리적 강제력, 광고 탄압이라는 경제적 무기, 그리고 '개발독재'와 '국가주의'라는 이념적 명분을 총동원하여 권력을 영속화하려 했던 고도화된 권위주의 체제였다.


박정희 시대의 통치 방식은 '발전주의'와 '국가주의'를 한국 사회에 깊게 각인시켰고, 이는 '선택과 집중'에 따른 정경유착, 관 주도 경제 모델 등 현대 한국 사회의 정치, 경제, 사회 전반에 깊은 영향을 미쳤다. 이 유산은 여전히 한국 사회의 보수와 진보 진영 간의 평가 갈등을 일으키는 핵심적인 원인으로 남아 있다. 박정희 독재의 역사적 유산을 제대로 평가하기 위해서는 단편적인 경제적 성과만을 볼 것이 아니라, 그 시대에 자행된 모든 독재적 기제와 그로 인한 희생을 총체적으로 고려하는 균형 잡힌 시각이 필수적일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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