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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치학 쉽게 읽기 26)전두환 신군부

권력 장악, 유지, 그리고 저항

by 김광민

독재 이론에서 핵심적인 개념인 '권위주의'는 강력한 중앙집권적 권력과 제한적인 정치적 다원주의를 허용하는 반면, '전체주의'는 국가가 사회의 모든 측면을 통제하려는 이념적 통제를 특징으로 한다. 전두환 정권은 국민의 사생활 전반을 통제하는 전체주의적 성격보다는, 물리적 억압과 더불어 법적-제도적 장치, 언론 통제, 그리고 문화적 통제 등 복합적이고 다층적인 통치 기술을 활용했다는 점에서 '권위주의적 독재'의 특징을 강하게 드러낸다. 이는 1980년대 한국 사회에서 나타난 독재의 진화된 형태로, 독재가 더 이상 노골적인 폭력만으로 유지되지 않는다는 점을 시사한다.


12.12와 5.17의 연쇄 쿠데타


전두환 정권은 1979년 10.26 사태로 박정희 유신체제가 붕괴하면서 발생한 권력 공백기를 틈타 일련의 군사적 행동을 통해 권력을 장악했다. 이는 단순히 정권의 교체를 넘어, 폭력적 수단을 동원한 계획적이고 단계적인 권력 찬탈 과정이었다.


12.12 사태는 1979년 12월 12일, 군 내부의 사조직인 '하나회'의 핵심 인물인 전두환과 노태우가 주도하여 일으킨 군사 쿠데타다. 당시 합동수사본부장이라는 직위를 이용하여 군 내에서 막강한 권력을 행사하던 전두환이 그의 권력 확장을 경계하던 정승화 육군참모총장을 박정희 대통령 시해 사건에 연루된 것으로 조작하여 체포하면서 사건이 시작되었다.


최규하 대통령의 재가 절차를 무시하고 진행된 이 사건은 훗날 판결에 의해 '군사반란'으로 규정되었다. 이는 전두환과 신군부 세력이 육군 지휘부를 무력화하고 군 전체를 장악하기 위한 물리적 기반을 마련하는 결정적인 사건이었다. 12.12 군사반란은 '숙군(肅軍)'이라는 명분을 내세웠지만, 실질적으로는 군부 내 반대 세력을 제거하고 군을 전두환의 사적 도구로 만들기 위한 수직적 권력 장악 과정이었다. 이는 정권 찬탈을 위한 필수적인 전초전이자, 이후 5.17 쿠데타를 가능하게 한 물리적 토대가 되었다는 점에서 역사적으로 '내란의 시작점'으로 평가된다.


서울의 봄.jpg 12.12 군사 쿠데타를 소재로한 영화 '서울의 봄'


정치권력의 전면적 장악


12.12 사태로 군권을 완전히 장악한 신군부는 이듬해인 1980년 5월, 본격적인 정치 권력 장악 시나리오에 착수했다. 1980년 5월 17일, 신군부는 '시국 수습'을 명분으로 비상계엄령을 전국으로 확대했다. 이는 기존의 계엄령이 전국으로 확장된 것에 불과하지만, 실질적으로는 정권 장악을 위한 계획적인 '정치 쿠데타'였다.


전국 비상계엄령 선포와 함께 신군부는 정당 및 정치활동 금지, 국회 폐쇄, 그리고 당시 민주화 운동을 주도하던 학생 및 정치인들에 대한 대규모 구금 조치를 단행했다. 특히, 당시 정치적 라이벌이었던 김영삼과 김대중을 각각 가택 연금 및 체포함으로써 모든 정치적 견제 세력을 사전에 제거하는 노골적인 시도를 보였다. 또한, 대학가 시위를 잠재우려는 의도로 전국의 92개 대학에 계엄군 병력 2만 2천여 명을 집중 배치하여 민주화 운동의 핵심 주체였던 학생들을 선제적으로 진압하려는 의도를 드러냈다. 5.17은 군사 반란을 통해 얻은 군사력을 바탕으로 정치권력을 완전히 장악하려는 목적을 지닌, 12.12 사태와 분리할 수 없는 일련의 권력 찬탈 과정이었다.


광주민주화운동의 폭력적 진압


5.17 쿠데타에 대한 저항으로 광주 시민들이 일으킨 민주화운동은 전두환 정권의 독재적 성격을 가장 극명하게 보여주는 사례다. 이는 단순히 한 지역의 저항을 누르는 것을 넘어, 전 국민에게 공포를 심어 독재 체제에 대한 저항 의지를 꺾으려는 '국가 테러'의 성격을 갖는다.


5.17 쿠데타 조치에 따라 전남대학교에도 계엄군, 특히 공수부대가 투입되면서 학생과 시민들의 분노는 폭발했다. 1980년 5월 18일, 휴교령에 반발하며 등교하려던 전남대학교 학생들을 공수부대가 곤봉과 대검으로 잔혹하게 구타하며 진압하기 시작했다. 이 잔혹한 폭력은 광주 시민들의 분노를 자극하여 항쟁의 주체를 학생에서 시민 전체로 확산시키는 직접적인 원인이 되었다.


계엄군의 과격 진압에 분노한 시민들은 금남로로 모여들어 시위에 참여했고, 이는 단순 시위에서 대규모 시민 봉기로 전환되었다. 5월 20일에는 수백 대의 차량 시위대가 항쟁의 새로운 단계로 진입하는 데 결정적인 역할을 했다. 5월 21일 오후, 계엄군이 도청 앞에서 시위대에 일제 사격을 감행하여 다수의 사상자가 발생하자, 시민들은 더 이상 비폭력 저항만으로는 한계가 있음을 인식하고 무장하기 시작했다. 시민들은 인근 무기고와 아시아자동차 공장 등에서 무기를 확보하여 자체적으로 시민군을 결성하고 계엄군과 시가전을 벌였다.


5월 22일부터 26일까지, 시민군이 계엄군을 광주 외곽으로 퇴각시키면서 광주는 사실상 시민들의 자치 하에 놓이게 되었다. 이 기간 동안 시민들은 식량과 생필품을 나누고 자체적으로 질서를 유지하며 '해방 광주'를 경험했다. 이는 독재 정권의 '혼란' 선전과는 달리, 시민들이 스스로 민주적 질서를 구축하고 유지할 수 있는 능력을 보여준 상징적인 사례였다. 그러나 5월 27일 새벽 2시, 탱크를 앞세운 약 2만 5천 명의 계엄군이 다시 광주 시내로 진입하여 최종 진압 작전을 감행했다. 도청에 남아있던 시민군이 저항했지만, 계엄군의 무차별적인 사격으로 항쟁은 막을 내렸다.


518 연표.png


광주민주화운동은 독재 정권이 국민을 상대로 '국가 폭력'을 행사하는 극단적 사례였다. 정권은 이를 '폭동'으로 규정하려 했지만, 훗날 대법원은 시민들의 행위를 '헌법 수호를 위한 정당한 저항'으로 판결했다. 이는 정권의 폭력성과 그 정당성의 부재를 극명하게 드러낸다. 전두환 정권은 '힘의 논리'를 기반으로 정권을 공고히 했으며, 광주를 향한 잔혹한 진압은 그 폭력적 정체성을 규정하는 핵심 사례로 남았다.


제도, 통제, 그리고 통치 기술


전두환 정권은 단순히 물리적 억압에만 의존하지 않고, 권력의 합법성을 위장하고 사회 전반을 통제하기 위한 복합적인 통치 기술을 사용했다.


군사반란과 쿠데타를 통해 얻은 권력을 합법화하기 위해 신군부는 1980년 10월 27일 헌법을 개정하고 '제5공화국 헌법'을 제정했다. 이 헌법은 대통령의 임기를 7년 단임제로 명시하여 유신체제와의 차별화를 꾀하는 것처럼 보였다. 그러나 대통령 선거는 국민의 직접 선거가 아닌, 정권이 통제하는 '대통령 선거인단'에 의한 간접선거로 이루어졌다.


이는 독재 정권이 자신의 폭력적 탄생을 가리기 위해 '법치주의'의 가면을 쓴 사례다. 겉으로는 민주적 절차를 따르는 것처럼 보였으나, 실질적으로는 정권의 의도대로 대통령을 선출하는 '체육관 선거'의 틀을 유지했다. 제5공화국 헌법은 독재가 단순히 법을 무시하는 것이 아니라, 법을 자신의 통치 목적에 맞게 '재단'하여 합법성을 위장하는 교활한 방식을 보여준다.


언론과 사회 전반의 감시


독재 정권은 국민의 저항 의지를 꺾고 정권의 선전만을 허용하기 위해 사회 전반에 걸친 통제를 강화했다. 가장 대표적인 사례는 '언론 통폐합'이다. 보안사령부의 주도로 64개에 달하던 언론사를 18개로 강제 통합했다. 이 과정에서 933명의 언론인이 강제 해고되었다. 이는 단순히 언론사를 줄인 것이 아니라, 정권의 명령에 복종하는 '단일한 목소리'만을 허용함으로써 정보 독점과 여론 조작을 완성한 체계적인 정보 통제 전략이었다. 국민들은 뉴스 시작을 전두환 대통령의 동정 보도로 채우는 '땡전뉴스'를 접하게 되었다.


또한, 독재 정권은 '사회악 일소'를 명분으로 영장 없는 무차별적 체포를 통해 6만 명 이상의 국민을 구금하고 인권유린을 자행한 '삼청교육대'를 운영했다. 이 조치는 정적을 넘어 일반 국민에게도 공포를 심어 체제에 대한 저항을 뿌리부터 제거하려는 목적이었다. 이러한 정책들은 독재 정권이 폭력적 억압(삼청교육대)과 심리적 통제(언론 통폐합)를 병행하며 국민의 저항을 뿌리부터 제거하려 했음을 보여준다.


보도지침.jpg 보도지침


국가안전기획부


국가안전기획부(안기부)는 10.26 사태 이후 위상이 추락했던 중앙정보부의 후신으로 1981년 제5공화국 출범과 함께 재정립된 정보기관이다. 안기부는 국가 안보를 명목으로 정치적 반대파에 대한 사찰과 탄압을 전담하는 '정치적 경찰' 역할을 수행했다.


안기부의 정권 유지를 위한 역할은 '수지 김 간첩 조작 사건'에서 극명하게 드러난다. 1987년, 안기부는 홍콩에서 남편에게 피살된 한 여성(김옥분, 일명 수지 김)을 간첩으로 조작하고, 남편(윤태식)을 납북 미수 피해자로 둔갑시켜 대국민 기자회견까지 진행했다. 이는 정권이 내부의 적을 '제조'하여 국민에게 공포를 주입하고, 이를 통해 정권의 필요성과 억압을 정당화하려 한 극단적 사례였다. 이 사건은 독재가 물리적 힘뿐만 아니라 '조작된 진실'을 통해 국민의 이성을 마비시키고 체제에 대한 복종을 강요했음을 보여준다.


우민화와 정치적 무관심 유도, 3S 정책


전두환 정권은 억압과 함께 대중을 회유하는 전략도 병행했다. 국민의 관심을 정치에서 멀어지게 하기 위해 스포츠(Sports), 스크린(Screen), 섹스(Sex)를 장려하는 이른바 '3S 정책'이 그것이다. 프로야구 출범, 통행금지 해제, 스크린 검열 완화 등이 대표적인 사례로, 이는 폭력적 억압과 정반대되는 '유화책'이었다.


3S 정책은 독재 정권의 '통치 기술'이 얼마나 정교했는지를 보여준다. 이는 국민에게 소소한 자유와 오락을 허용함으로써 정치적 불만을 희석시키고, 자발적인 무관심 상태로 유도하려는 전략이었다. 이처럼 전두환 정권은 억압과 회유라는 양면 전략을 통해 권력을 공고히 했다.


프로야구 창단.jpg 3S 정책으로 추진된 프로야구 창단


경제적 성과와 그 한계


전두환 정권은 쿠데타로 성립된 태생적 한계를 극복하기 위해 '경제적 성과'를 정권의 가장 중요한 정당성으로 내세웠다.


전두환 정권이 출범한 1980년, 대한민국 경제는 마이너스 성장과 28.7%에 달하는 높은 물가상승률로 심각한 위기에 놓여 있었다. 정권은 물가안정을 최우선 과제로 삼고, 공권력을 동원하여 공산품 가격 인상, 근로자 임금, 추곡 수매가 등을 강제로 억제했다. 또한 중화학공업의 신규 진입을 금지하고 기존 업체의 사업 부문을 강제적으로 정리하는 구조조정을 단행했다. 이러한 독재 정권의 '완력'은 결과적으로 물가 안정에 기여했다는 평가를 받는다.


3저 호황의 정치적 이용


전두환 정권의 경제적 성과는 순수하게 정책적 능력만으로 얻어진 것은 아니었다. 정권 후반기인 1986년부터 1989년까지 전 세계적으로 발생한 '저유가, 저금리, 저달러'의 이른바 '3저 호황'이라는 외부적 변수가 복합적으로 작용하며 대한민국 경제는 유례없는 호황을 누렸다.


정권은 이러한 외부 요인에 의한 성과를 '강력한 리더십'의 결과물로 포장하여 정당성 확보에 이용했다. 경제적 성공은 독재 정권의 '기능적 정당성'을 제공하는 가장 강력한 수단 중 하나였다. 그러나 경제적 성과가 국민들의 '민주화에 대한 열망'을 완전히 대체할 수는 없었다는 것이 중요한 역사적 교훈이다. 1985년 제12대 국회의원 총선거에서 창당 한 달 만에 제1야당으로 부상한 신한민주당의 돌풍은 경제적 안정만으로는 국민의 정치적 자유에 대한 갈증을 해소할 수 없었음을 증명한다.


전두환 경제성장.png


이 표는 경제적 '안정'과 '성장'이라는 독재의 통치 명분과, 실제 사회의 정치적 동향이 어떻게 병렬적으로 진행되었는지를 보여준다. 독재 정권의 경제적 성과가 국민들의 민주화 요구를 잠재우기는커녕, 오히려 정치적 불만을 심화시켰다는 모순적 상황을 살펴볼 수 있다.


전두환 정권...


전두환 정권은 12.12와 5.17이라는 연쇄적 군사행동을 통해 권력을 장악하고, 광주민주화운동에 대한 국가 폭력을 통해 권력을 공고히 했다. 이는 국민을 상대로 한 국가 테러를 통해 저항 의지를 꺾으려 한 독재 정권의 폭력적 정체성을 규정하는 핵심 사례로 남았다.


또한, 정권은 제5공화국 헌법, 언론 통폐합, 삼청교육대, 안기부의 조작 사건, 그리고 3S 정책 등 다층적이고 정교한 통치 기술을 결합하여 국민을 억압하고 통제했다. 겉으로는 합법적 절차와 경제적 성과를 내세웠으나, 실질적으로는 법을 악용하고 여론을 조작하는 등 독재의 본질을 가리는 데 주력했다.


그러나 전두환 정권의 전방위적 억압은 역설적으로 국민들의 민주주의에 대한 열망을 더욱 강화시켰다. 광주민주화운동의 숭고한 희생은 '헌법 수호를 위한 정당한 저항'으로 평가받으며 꺼지지 않는 민주화의 불씨가 되었다. 이는 결국 1987년 6월 민주항쟁을 거쳐 대통령 직선제 개헌을 이끌어내는 원동력이 되었다.


전두환 정권의 사례는 독재가 무력과 폭력뿐만 아니라, 교묘한 법적 장치, 여론 조작, 그리고 경제적 성과를 통해 그 존재를 정당화하려 한다는 점을 시사한다. 이는 민주주의 사회가 독재의 다양한 형태를 경계하고 끊임없이 민주주의를 수호해야 하는 이유를 명확히 보여주는 역사적 교훈으로 남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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