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보통사람'의 역설과 하이브리드 체제
노태우 정권은 대한민국 현대사에서 독특하고 복합적인 위치를 차지한다. 1987년 6월 항쟁이라는 거대한 민주화 요구의 물결 속에서 직선제 개헌을 수용하고 직접 선거를 통해 출범했다는 점에서 이 정권은 이전의 군사 독재 정권과는 명확히 구분된다. 그러나 동시에 권력의 핵심을 구성했던 인물들과 통치 방식에는 전두환 정권의 권위주의적 유산이 깊숙이 배어 있었다. 노태우 정권은 단순한 '독재' 또는 '민주주의'라는 이분법적 틀에서 벗어나, 정치학의 '하이브리드 체제' 또는 '선택적 권위주의'의 관점에서 그 복합적인 성격을 분석해야 한다.
독재에 대한 ‘하이브리드 체계론' 또는 '하이브리드 체제론(Hybrid Regime Theory)'은 특정한 한 명의 학자가 단독으로 주창했다기보다는, 1990년대 탈냉전 이후 등장한 민주주의와 권위주의의 중간 단계에 있는 새로운 형태의 정치 체제를 설명하기 위해 여러 정치학자들이 동시다발적으로 발전시키고 개념화한 이론이다. 주요 학자로는 테리 칼, 토마스 캐로더스, 스티븐 레비츠키와 루칸 웨이 등이 있다. 이들은 모두 민주주의와 권위주의의 이분법으로는 설명할 수 없는 새로운 중간 형태의 정치 체제를 정의하고자 노력했다.
하이브리드 체제는 표면적으로는 다당 경쟁 선거와 같은 민주적 제도를 갖추고 있지만, 실질적으로는 권위주의적 통치 방식을 유지하거나 은밀하게 활용하는 정치 체제를 의미한다. 이러한 체제는 완전한 민주주의로의 이행을 거부하면서도 물리적 억압보다는 제도의 관리와 통제를 통해 권력을 유지하려 한다. 노태우 정권은 이러한 개념적 틀에 완벽하게 부합하는 사례로 평가될 수 있다. 이 정권은 민주화의 외피를 두른 채 권력 구조의 본질적 속성을 변형시켜 존속을 모색했다. 자유로운 언론 창간을 허용하고 지방자치를 부활시키는 등의 전향적 조치를 취했으나, 동시에 국가안전기획부(안기부)를 동원한 공안 통치와 정경유착을 통해 권위주의적 지배를 이어갔다.
이러한 이중성을 규명하기 위해 노태우 정권의 권력 획득 과정, 통치 방식, 그리고 대외 정책을 세 단계로 나누어 분석해 볼 필요가 있다. 첫째, 6.29 선언과 1987년 대선 과정에서 드러난 민주적 절차의 역설이다. 둘째, '보통사람' 시대의 이면에서 진행된 자유화와 권위주의적 통치의 공존이다. 마지막으로, 북방외교가 노태우 정권의 낮은 정통성을 어떻게 보완하고 대내외적 안정 기반을 구축했는지 살펴보아야 한다.
민주적 외피 아래의 권위주의적 재구성
노태우 정권의 출범은 단순히 정치적 계획에 따른 것이 아니라, 대한민국 역사에서 가장 거대한 국민적 저항 운동인 1987년 6월 민주항쟁의 압도적인 힘에 의해 강제된 결과였다. 이 항쟁은 1987년 1월 박종철 고문치사 사건이 알려지면서 전국적인 반독재 시위로 격화되었다. 당시 전두환 대통령은 기존 헌법을 고수하겠다는 '4.13 호헌 조치'를 발표하며 국민적 요구를 정면으로 거부했다. 그러나 이는 저항의 불길에 기름을 부은 격이 되었다.
항쟁의 절정은 6월 9일 연세대학교 학생 이한열이 시위 도중 경찰이 쏜 최루탄에 맞아 중태에 빠진 사건이었다. 이 비극적인 사건은 억눌렸던 국민적 분노를 폭발시켰고, 다음 날인 6월 10일에 예정되었던 '민주헌법쟁취국민운동본부'의 국민대회를 전국적이고 조직적인 시위로 확산시키는 결정적인 계기가 되었다. 시위는 서울의 명동성당을 비롯한 주요 거점뿐만 아니라 전국 각지에서 동시다발적으로 전개되었다. 시위 참여 인원이 400만~500만 명에 달할 정도로 대규모로 확산되었고, 경찰력은 사실상 마비 상태에 이르렀다. 이러한 국민적 저항의 힘은 전두환 정권이 더 이상 물리적 강압만으로 통치할 수 없는 새로운 시대가 도래했음을 상징적으로 보여주었다. 군대 투입설까지 나돌던 상황에서 정권이 결국 이를 철회하고 민주화 요구를 수용할 수밖에 없었던 것은, 대중의 힘을 정권이 더 이상 무시할 수 없었음을 보여주는 결정적인 증거였다.
전략적 후퇴로서의 민주화 수용. 6.29 선언
1987년 6월 29일, 민주정의당 대통령 후보였던 노태우는 국민들의 거센 민주화와 직선제 개헌 요구를 수용하는 내용의 특별 선언을 발표했다. 이른바 '6.29 민주화 선언'이라 불리는 이 조치는 대통령 직선제 개헌, 김대중의 사면복권, 자유언론 창달, 인권 신장, 지방자치 실시 등 8개 항의 파격적인 내용을 담고 있었다. 이 선언은 당시 일촉즉발의 시국을 일거에 해결한 '폭탄선언'으로 평가받으며 국민들에게 안도의 숨을 몰아쉬게 했다.
그러나 6.29 선언은 단순히 민주화 투쟁의 승리 결과만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었다. 선언문 초안은 당시 노태우의 측근인 박철언을 비롯한 민정당 핵심 인사들에 의해 작성되었다. 이 조치가 단순한 '항복'이 아니라 위기를 타개하고 권력을 재장악하기 위한 치밀한 정치적 전략이었음을 시사한다. 이는 정권이 국민의 압도적인 힘에 밀려 물리적 억압으로는 더 이상 통치가 불가능하다는 점을 인지하고, 민주적 절차의 일부를 수용함으로써 권력 구조를 재구성하려 했다는 것을 의미한다. 즉, 6.29 선언은 독재가 완전히 해체된 것이 아니라, 대중의 민주적 요구를 일부 흡수하며 '관리된 민주주의'로 체제를 변형시키는 전형적인 모습을 보여준다.
제9차 개헌과 1987년 대선
6.29 선언에 따라 한국 헌정사에서 처음으로 합헌적 절차를 거친 개헌이 이루어졌다. 제9차 헌법 개정안은 대통령 5년 단임 직선제, 국회해산권 폐지, 국회 국정감사권 부활, 헌법재판소 신설 등 민주주의의 핵심적인 제도적 장치들을 포함했다. 이는 형식적으로는 민주화의 제도적 완성이었다.
그러나 이어진 제13대 대통령 선거는 민주적 절차의 이면을 여실히 드러냈다. 노태우 후보는 '보통사람'이라는 선거 슬로건을 내세우며 군부 이미지 지우기에 나섰고 , 36.6%라는 저조한 득표율로 당선되었다. 이는 당시 '군정종식'을 외치며 민주화 운동을 이끌던 김영삼과 김대중 두 후보가 단일화에 실패했기 때문이었다. 김영삼 후보는 28.0%를, 김대중 후보는 27.1%를 득표하며 야권 표가 분열되었고, 이 결과는 노태우의 당선으로 이어졌다. 이 선거는 독재가 물리적 억압이 아닌, 야권 분열이라는 민주적 절차의 '결함'을 교묘하게 이용하여 승리한 사례다. 이는 권위주의 정권이 대중의 민주적 요구에 정면으로 맞서기보다는, 민주적 절차의 빈틈을 이용해 권력을 유지하는 하이브리드 체제의 특징을 보여준다.
나아가 선거를 불과 며칠 앞두고 발생한 대한항공 858편 폭파사건은 야당 후보들에게 치명타로 작용하며 노태우 후보에게 유리한 국면을 조성했다. 또한 노태우 당선을 위해 외교 라인을 동원했다는 의혹이 제기되는 등, 정부 기관이 특정 후보에 편향된 태도를 취하며 권위주의적 통치의 유산을 계속 사용하고 있었음을 보여준다.
자유화와 통제의 공존
노태우 정권은 이전의 군사 독재 정권과는 다른, 유화적인 통치 방식을 일부 도입했다. 특히 언론과 시민 사회 영역에서 중요한 변화들이 감지되었다. 이전의 전두환 정권이 언론 통폐합과 보도지침으로 언론을 철저히 통제했던 것과 달리, 노태우 정권은 '언론기본법'과 '보도지침'을 폐지했다. 그 결과, '한겨레신문', '국민일보'와 같은 새로운 일간지들이 창간되면서 언론의 수가 크게 늘어났다. 이는 언론 자유를 확장하고 언론 통제 관행에서 벗어나려는 노태우 정권의 의지를 보여주는 강력한 증거였다.
또한 이 시기에는 '경제정의실천시민연합'을 비롯하여 '공해추방운동연합', '전국빈민연합' 등 다양한 성격의 시민 사회 단체들이 결성되었다. 이러한 시민단체의 활발한 등장은 국민이 단순히 정치적 자유뿐만 아니라 사회적, 경제적 정의에 대한 요구를 표출할 수 있는 새로운 공론의 장이 열렸음을 의미한다. 언론과 시민 사회의 성장은 6.29 선언의 약속 이행이자, 노태우 정권이 이전의 노골적인 억압 통치에서 벗어나 대중의 요구에 최소한으로 부응했음을 보여준다.
'관리된 자유화'의 전형
노태우 정권은 오랜 중단 끝에 지방자치제도를 부활시키려는 시도를 했다. 1991년 지방의회 의원 선거가 30여 년 만에 다시 실시된 것은 지방에 권력을 분산하고 민주주의를 심화시키는 중요한 제도적 진전이었다. 지방자치는 권위주의 체제에서 중앙정부에 집중되었던 권력을 분산시키는 핵심적인 민주화 과제였다.
그러나 정권은 지방자치제도의 완전한 실현을 보류했다. 1991년 지방의회 의원 선거는 실시되었지만, 이듬해에 치르기로 되어 있던 지방자치단체장 선거는 '경제적 사회적 안정'을 이유로 연기되었다. 이는 지방자치의 절반만 허용함으로써 중앙정부의 통제권을 유지하려는 전략이었다. 앵커리즘적 관점에서 볼 때, 이는 전형적인 '관리된 자유화'의 사례다. 겉으로는 민주화를 약속하고 그 상징적인 제도를 도입했지만, 실제로는 권력 이양의 속도와 범위를 조절하며 권력의 본질적 속성을 유지하려는 의도를 보여준다.
권위주의적 유산의 지속: 공안 통치와 정경유착
노태우 정권은 민주화의 외피를 두르고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이전 군사 독재 정권의 권위주의적 유산들을 지속적으로 활용했다. 그 중심에는 국가안전기획부(안기부)가 있었다. 노태우 정권 하에서도 '황석영 방북 사건', '임수경 방북 사건' 등 수많은 공안 사건이 지속적으로 발생했다. 이는 안기부가 이전처럼 전면적인 인권 유린은 줄었을지라도, 여전히 반체제 세력을 감시하고 탄압하는 핵심적인 역할을 수행했음을 보여준다. 안기부의 '미림팀' 운영 등 정관계 고위 인사와 반대파 야당에 대한 광범위한 도청 행위는 권력 유지를 위해 비민주적 수단이 계속 사용되었음을 증명한다.
더욱이 노태우 정권은 '수서지구 택지 특혜 분양 사건'을 통해 뿌리 깊은 정경유착의 실체를 드러냈다. 이 사건은 한보그룹이 정관계 요인들에게 뇌물을 제공하여 아파트를 지어 무주택 서민에게 분양해야 할 땅을 특정 조합에 특혜 공급받은 사건이다. 이 비리에는 청와대, 정부, 국회, 여야 정치인 등 거의 모든 정관계 인물들이 연루되어 있었다. 특히 당시 민주당 측에서는 이 사건이 노태우 대통령 퇴임 후 승계 세력들의 '정치자금 조달'을 위한 구조적 범죄일 가능성을 제기했다. 이는 권력 구조의 본질이 민주적 전환에도 불구하고 변하지 않았으며, 권위주의적 통치의 핵심인 정경관 유착 관계가 지속되고 있음을 보여주는 결정적인 사례였다.
북방외교의 성과와 권위주의 정권의 정통성 확보
노태우 정권은 '보통사람'의 이미지를 국내 정치에 활용하는 한편, 대외적으로는 이전 정권과 차별화되는 외교 정책인 '북방외교'를 추진했다. 북방외교는 기존의 서방 국가 위주의 외교에서 벗어나 소련, 중국 등 사회주의 국가들과의 관계를 정상화하고 교류를 확대하는 데 주안점을 두었다. 이 정책의 핵심 목표는 한반도의 현실에 대한 국제적 인정을 확보하고, 북한으로 하여금 이를 수용하도록 유도함으로써 한반도 정세 안정과 평화 정착, 나아가 평화적 통일 환경을 조성하는 것이었다.
북방외교는 노태우 정권의 주요 업적으로 평가받으며, 다수의 구체적인 성과를 낳았다. 노태우 정부는 헝가리, 폴란드 등 동유럽 국가들과 수교를 시작으로, 1990년 소련과의 국교를 정상화했다. 이어 1992년에는 중국과도 수교를 맺으며 한국 외교의 영역을 전방위적으로 확대했다. 이러한 외교적 성과는 당시 얼어붙었던 남북 관계에 새로운 물꼬를 트는 결정적인 역할을 했다.
가장 중요한 성과는 1991년 남북한 유엔 동시 가입이었다. 이는 유엔에 단독 가입하여 한반도의 유일 합법 정부임을 주장하던 북한의 외교적 고립을 심화시키는 결과를 가져왔다. 또한 남북한 상호 체제 인정과 불가침을 담은 '남북기본합의서'와 '비핵화 공동선언'이 채택되면서 한반도 평화 논의의 물꼬를 트는 데 기여했다.
북방외교의 성공은 노태우 정권에 대한 국내외적 비판을 희석시키는 중요한 정통성의 원천이었다. 대통령 선거에서 낮은 득표율로 당선된 정권의 정당성 문제를 희석하고, '보통사람'이라는 슬로건이 비리 사건 등으로 인해 흔들릴 수 있는 이미지를 국정 운영의 탁월한 성과로 대체하는 효과를 낳았다. 이는 권위주의 정권이 성공적인 외교 정책을 통해 국내 민주화 요구를 관리하고 정권의 안정성을 확보하는 전형적인 방식을 보여준다.
이행기적 하이브리드 체제로서의 노태우 정권
노태우 정권에 대한 독재 이론적 분석은 이 정권이 '이행기적 하이브리드 체제'였다는 결론에 이른다. 이 정권은 6월 민주항쟁이라는 대중적 저항에 직면하여 직선제 개헌과 같은 민주주의의 형식적 제도들을 수용했다는 점에서 이전의 노골적인 군사 독재와는 명확히 구분된다. 그러나 동시에 권력형 부패, 공안 통치, 국가 정보기관의 정치 개입 등 권위주의적 통치의 핵심적 유산을 내재하고 있었다.
노태우 정권은 물리적 폭력에 기반한 전통적인 독재가 더 이상 불가능한 시대적 상황을 인식하고, 민주주의의 외피를 활용하여 권력을 재구성하는 전략을 취했다. 야권 분열을 이용해 낮은 득표율로 집권하고, 언론 자유와 지방자치를 부분적으로 허용하되 핵심적인 통제권은 유지했다. 이러한 '관리된 자유화'와 권위주의적 유산의 공존은 노태우 정권을 단순한 독재도, 완전한 민주주의도 아닌 복합적인 정치 체제로 규정하게 한다.
결론적으로, 노태우 정권은 군사 독재 시대의 종말을 고하는 신호탄이었지만, 동시에 민주주의가 사회 전반에 완전히 뿌리내리기까지는 여전히 많은 도전 과제가 남아있음을 보여주는 복합적인 사례였다. 그 성과와 한계는 이후 문민정부 시대에 권력형 비리와 정보기관의 정치 개입을 청산하는 중요한 역사적 과제로 이어졌다. 노태우 정권은 한국 현대사에서 권위주의적 통치의 종식과 민주주의의 제도화가 동시에 진행되는 과도기적 단계를 상징적으로 보여주는 사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