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정치학 쉽게 읽기 28)김영삼과 문민독재

문민독재 논쟁의 서막과 김영삼 정부의 이중적 유산

by 김광민

1993년 2월, 김영삼 정부의 출범은 대한민국 현대사에서 32년간 이어졌던 군사 독재를 공식적으로 종식시키고 문민정부를 수립한 역사적 전환점으로 평가된다. 김영삼 대통령은 취임 초부터 '역사 바로 세우기', '부패와의 전쟁', '하나회 척결', '금융실명제 실시' 등 대담하고 강력한 개혁 정책을 추진하며 국민적 지지와 기대를 한몸에 받았다. 특히 군부 내 사조직인 '하나회'를 전격적으로 해체하고 군의 정치 개입을 차단한 것은, 군사 정권과의 단절을 상징적으로 보여준 사건이었다. 이러한 개혁 조치들은 군부와 무관한 민간 정부가 권력기관의 도움 없이도 국정을 운영할 수 있는 기반을 마련했다는 점에서 긍정적인 평가를 받았다.


그러나 김영삼 정부의 이러한 개혁은 취임 초기 강력한 지지 기반을 바탕으로 '막강한 대통령 권한에 의해 국회를 무시한 채 이루어졌다'는 비판에 직면하게 되었다. 이러한 권위주의적 리더십은 자유주의와 민주주의의 가치와 상충된다는 지적과 함께 '문민독재'라는 비판적 프레임을 낳았다. 더욱이, 임기 말에 불거진 대통령 아들의 국정 개입 및 각종 비리 스캔들은 정부의 도덕성을 실추시켰다. 급기야 1997년의 IMF 외환위기는 개혁의 성과를 퇴색시키고 정부에 대한 국민적 신뢰를 크게 흔들었다.


김영삼 정부에 대한 '문민독재' 평가는 단순히 가치 판단의 문제가 아닌, 그 배경에 깔린 구체적인 역사적 사건들을 통해 해부하고 그 함의를 고찰해야 한다. 특히, 과거 권위주의 정권의 핵심 통치 수단이었던 국가안전기획부(이하 안기부)가 문민정부에서 어떤 역할을 수행했는지에 초점을 맞추어 '미림팀 운영', '간첩조작 및 대북몰이', 그리고 '총풍 사건'을 심층적으로 분해볼 필요가 있다. 이를 통해 김영삼 정부의 개혁과 한계, 그리고 민주화 이후 한국 사회가 직면했던 권력과 제도의 문제를 다층적으로 살펴볼 수 있을 것이다.


국가안전기획부의 정치 개입


김영삼 정부는 과거 군사정권의 권력 유지를 위한 도구였던 안기부, 검찰 등 권력기관을 '문민'에 맞게 쇄신할 것이라는 국민적 기대를 모으며 출범했다. 실제로 김영삼 대통령은 취임 초 군부 내 사조직인 하나회를 척결하며 군 정보수사기관장의 관행적 임명을 깨뜨리는 등, 군부의 정치 개입을 차단하는 데에는 상당한 성공을 거두었다. 이는 군이라는 가시적이고 조직적인 권위주의 세력을 청산했다는 점에서 역사적으로 중요한 의미를 지닌다.


그러나 군부의 영향력이 약화된 자리에는 또 다른 형태의 권력 지형이 형성되었다. 이 과정에서 안기부의 역할은 근본적으로 변화하지 않았다. 비록 군사 정권은 끝났지만, 안기부는 여전히 민간인 사찰, 여론조작, 간첩 조작 의혹 등 과거 권위주의 정권의 유산을 완전히 청산하지 못한 채 존속했다. 이는 단순한 정권 교체가 아니라, 민주주의적 제도를 정착시키기 위해서는 눈에 보이지 않는 권력 기구의 역할과 행태를 근본적으로 개혁하는 것이 얼마나 중요한 과제였는지를 보여준다.


김영삼 정부가 군부라는 '구(舊) 권위주의' 세력을 성공적으로 숙청했음에도 불구하고, 정보기관의 정치 개입이라는 권위주의적 '행태'는 청산되지 않고 새로운 권력 핵심으로 옮겨갔다. 강력한 개혁을 추진하며 얻은 대통령의 막강한 권한은 제도적 민주주의의 완성을 향하기보다는, 대통령의 아들인 김현철을 중심으로 한 비선 인맥이 안기부 내에 형성되는 통로를 제공했다. 미림팀의 재가동과 그 보고 라인에서 김현철이 핵심적으로 거론되는 것은, 군부가 사라진 권력의 공백을 대통령의 비선 실세가 차지하며 정보기관을 사적으로 활용했음을 시사한다. 결국 '군사 독재'는 종식되었지만, '정보기관을 통한 정치 개입'이라는 권위주의적 그림자는 여전히 남아 '문민독재' 비판의 근거로 작용했다.


'미림팀' 운영과 불법 사찰의 실태


미림팀은 노태우 정부 시절인 1991년 9월부터 안기부의 정보 수집 과학화 방침에 따라 운영되기 시작한 비밀 도청 조직이었다. 문민정부 출범 직후인 1993년 7월, 미림팀은 조직 개편과 함께 해체되었고, 이때 보관 중이던 불법 테이프도 소각 처리되었다. 이는 문민정부가 과거의 불법적인 통치 방식을 청산하려는 의지를 보여주는 행보로 해석될 수 있다.


그러나 불과 1년 후인 1994년 6월, 미림팀은 오정소 대공정책실장의 지시에 의해 재조직되어 활동을 재개했다. 재가동된 미림팀은 호텔, 한정식집, 룸살롱 등 정·재계 유력 인사들이 자주 찾는 장소의 직원들을 '망원'으로 포섭하여 도청, 녹음, 감청 작업을 벌였다. 이들은 3년 5개월 동안 매일 한 건씩 총 1,000여 개의 불법 도청 테이프를 생산했으며, 도청 대상자는 연인원 5,400명에 달할 정도로 광범위했다.


미림팀의 도청은 단순히 야당 인사에만 국한되지 않았다. 도청 테이프에 등장하는 인물 중 가장 많은 비중을 차지한 것은 정치인(273명)이었으나, 이 외에도 고위 공무원(84명), 언론인(75명), 경제인(57명), 법조인(27명), 학계(26명) 등 사회 각계각층의 유력 인사가 망라되어 있었다. 특히 1997년 15대 대통령 선거 국면에서는 여야 대통령 후보군, 경선 주자 등 선거 관련 동향이 집중적인 도청 대상이었다.


미림팀의 운영에서 가장 중요한 쟁점은 정보의 보고 체계였다. 도청 정보는 공식 보고 라인인 팀장(공운영)→과장→부국장→국장을 거쳐 안기부장과 차장에게 보고되기도 했으나, 사안에 따라서는 공식 보고 라인을 건너뛰고 대통령의 차남인 김현철과 이원종 정무수석 등 권력 핵심부에 직접 전달된 것으로 드러났다. 김현철은 도청 정보를 보고받은 사실을 부인했으나, 이원종 수석과 오정소 차장은 이를 인정했다.


미림팀의 재가동과 그 운영 방식은 문민정부가 '문민'이라는 표면적 정체성에도 불구하고, 실제로는 과거 군사정권과 유사한 권위주의적 통치 방식을 내면화하고 있었음을 보여준다. 문민정부 출범 직후 불법 도청의 관행을 청산하겠다는 의지를 보였음에도 불구하고, 불과 1년 만에 이를 부활시켰다는 것은 정권이 합법적이고 민주적인 통치 기반 대신 비공식적이고 비민주적인 수단을 다시 선택했음을 의미한다. 특히 보고 라인이 국가 정보기관의 수장이 아닌 대통령의 아들 등 비선 실세로 향했다는 점은, 안기부가 국가 안보를 위한 공적 기관으로서의 역할에서 벗어나 특정 개인이나 세력의 정치적 목적을 위한 도구로 전락했음을 시사한다. 이는 '공적 권력'이 아닌 '사적 권력'에 의해 국가기관이 운영되는 '독재'의 전형적인 특징이 민주화된 정권에서 다시금 나타났다는 것을 보여준다.


김현ㅊㄹ.jpg 김영삼과 김현철



'대북몰이'와 안보정국의 정치적 활용


김영삼 정부는 과거 권위주의 정부의 유산이었던 '대북몰이'를 완전히 청산하지 못했다는 비판을 받는다. 이 시기 안기부는 '남매간첩단 사건'을 포함한 여러 사건들을 통해 간첩 조작 의혹에서 자유롭지 못했다. '남매간첩단 사건'은 반핵평화운동연합 정책위원인 김삼석과 그의 여동생 김은주가 반국가단체와의 회합 및 통신 등의 혐의로 구속된 사건이었다. 재판 과정에서 일부 혐의는 유죄로 인정되었으나, 이후 재심에서 형량이 크게 감형되면서 사건의 진위 여부에 대한 논란을 남겼다. 이처럼 '간첩'이라는 허위 프레임을 씌워 특정 인물을 압박하는 행태는 정보기관이 정권의 정치적 목적을 위해 활용되었다는 의혹을 낳았다.


이와 더불어 김영삼 정부는 '진짜 위협'의 정치적 활용이라는 측면에서도 주목할 만한 행태를 보였다. 가장 주목할 만한 사건은 1996년 9월에 발생한 '강릉 무장공비 침투 사건'이다. 이 사건은 북한의 상어급 잠수함이 강릉 앞바다에 좌초되면서 26명의 무장공비가 육지로 침투한 실제 사건이었다. 49일간의 대규모 군사 작전이 펼쳐지면서 국민적 안보 불안감은 극도로 고조되었다.


이 사건은 당시 교착 상태에 있던 남북 관계의 화해 분위기를 좌절시켰으며, '북한의 야욕을 확인하는 계기'로 작용했다.이는 정권이 안보 위기를 강조하며 지지율을 끌어올리고 정치적 주도권을 확보하는 데 활용될 수 있는 환경을 조성했다. '대북몰이'는 단순히 허위 정보를 유포하는 것에 국한되지 않는다. 김영삼 정부는 강릉 무장공비 사건이라는 실제 위협을 극대화하고 이를 정치적 자산으로 활용함으로써, 국민들 사이에 안보 이슈를 중요한 정치적 쟁점으로 부각시켰다. 이로써 '대북 위기론'을 통해 선거에 영향을 미치려 했던 '총풍 사건'과 같은 시도들이 등장할 수 있는 토양이 마련된 것으로 해석될 수 있다.


남매간첩단.png 남매간첩단 피해자들


'총풍 사건'의 진실과 정치적 파장


1997년 제15대 대통령 선거는 김영삼 정부의 임기 말에 치러졌으며, 당시 'DJP 연합'을 통해 김대중 후보의 지지율이 급상승하면서 판세를 뒤집기 위한 시도가 있었다. '총풍(銃風)' 사건은 1997년 대선 직전 한나라당 이회창 후보 측 관계자들이 중국 베이징에서 북한 측 인사를 만나 휴전선 일대에서 무력시위를 요청했다는 의혹에서 비롯되었다. 목적은 '총격 요청'을 통해 안보 불안감을 고조시켜 선거 판세를 자신들에게 유리하게 이끄는 것이었다. '북풍'은 북한 관련 소식이나 사건을 선거에 이용하는 정치적 행태를 일컫는 용어였다.


사건은 1998년 김대중 정부 출범 이후 집중적인 조사가 이루어지면서 그 전말이 밝혀졌다. 재판 과정에서 법원은 '총풍 3인방'(한성기, 오정은, 장석중)이 북한에 무력시위를 요청한 사실을 인정하며 실형을 선고했다. 재판부는 이들의 행위가 '자유민주적 기본질서의 핵심인 선거제도에 대한 중대한 침해'이자 '국가 안보에 심대한 위협을 끼친 범죄'라고 규정했다. 그러나 이러한 유죄 판결에도 불구하고, 법원은 이회창 후보 측이나 안기부의 조직적 개입에 대해서는 '기록상 확인할 수 없다'며 배후를 명확히 밝히지 못했다. 또한, 사건을 덮으려 했다는 의혹을 받았던 권영해 전 안기부장의 '특수직무유기' 혐의에 대해서도 무죄를 선고함으로써 국가기관의 개입은 없었다고 판단했다.


총풍 사건은 형식적으로는 '개인의 일탈'로 결론났을지라도, 그 배경에는 안보를 정치적 이득을 위해 거리낌 없이 동원하려는 '문민' 시대의 새로운 권위주의적 기조가 깔려 있었다. 민주주의는 공정한 선거 과정을 통해 정당성을 확보하는 체제이며, 총풍 사건의 목적은 바로 이 민주주의의 핵심인 선거를 훼손하는 데 있었다. 이러한 시도에 동원된 수단이 '국가 안보'였다는 점은 민주화가 이루어진 사회에서도 안보가 언제든 정치적 무기로 변질될 수 있다는 경고를 던진다. 사법부가 배후를 밝히는 데는 실패했으나, 사건의 존재 자체만으로도 민주화된 정권의 일부가 구시대적 수법인 '대북몰이'를 여전히 유효한 전략으로 여겼다는 것을 증명한다. 총풍 사건은 민주주의가 외형적으로는 달성되었지만, 그 내부의 행태와 윤리적 가치가 아직 충분히 성숙하지 못했음을 보여주는 비극적인 역설이다.


총풍.jpg


김영삼 정권은 '문민독재'였나?


김영삼 정부에 대한 '문민독재' 평가는 단순히 개인의 리더십 스타일이나 임기 말의 실정에 대한 비판을 넘어, 한국 사회의 민주화 과정이 지닌 복합적이고 이중적인 성격을 보여주는 중요한 역사적 담론이다. 이 평가는 다음의 세 가지 핵심적인 논점을 통해 종합적으로 이해될 수 있다.


첫째, 김영삼 정부는 군부라는 가시적인 독재의 그림자를 성공적으로 걷어낸 역사적 성과를 남겼다. '하나회' 척결과 '역사 바로 세우기'는 한국 사회의 민주적 전환을 공고히 한 기념비적인 사건들로 평가된다. 그러나 이러한 '혁명적' 개혁을 단행했던 강력한 리더십이 다른 권위주의적 행태로 이어지면서, '군부 독재'의 종식이' 민주주의의 완결'과 동의어가 아님을 보여주었다.


둘째, 미림팀 운영은 민주정부가 과거 권위주의 정권과 유사한 통치 방식을 내면화하고 있었음을 드러냈다. 미림팀의 재가동과 그 보고 라인이 안기부장이 아닌 대통령의 아들 등 비선 실세로 향했다는 점은, 국가기관이 공적 목적이 아닌 사적 권력의 도구로 전락할 수 있다는 위험성을 보여주었다. 이는 군부 통제가 사라졌다고 해서 정보기관의 역할과 기능에 대한 근본적인 성찰과 개혁이 완료된 것이 아니라는 중요한 시사점을 남겼다.


셋째, '대북몰이'와 '총풍 사건'은 민주화된 사회에서도 안보가 언제든 정치적 무기로 변질될 수 있다는 것을 보여준다. 김영삼 정부는 강릉 무장공비 사건과 같은 실제 안보 위기를 정치적 자산으로 활용하는 데 그치지 않고, 대선 국면에서 '총풍 사건'과 같은 비열한 시도가 등장할 수 있는 정치적 환경을 조성했다. 이는 민주주의의 핵심인 선거의 공정성을 훼손하려는 시도였으며, 형식적 민주화 이후에도 비민주적 통치 행태가 여전히 잠재되어 있음을 드러냈다.


결론적으로, 김영삼 정부에 대한 '문민독재' 평가는 과거의 권위주의를 청산하려는 진취적 노력이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그 과정에서 또 다른 형태의 권위주의적 통치 방식이 드러난 한국 민주주의의 이중적 과제를 상징한다. 이는 단순히 YS 개인에 대한 비난을 넘어, 민주화 이후 한국 사회가 직면한 권력의 제도화, 그리고 안보의 정치화 문제에 대한 깊은 성찰을 요구하는 역사적 담론이다. 김영삼 정부의 유산은 한 시대를 마감하는 동시에, 새로운 시대가 해결해야 할 과제를 던져주었다는 점에서 그 의의가 크다.

keyword
작가의 이전글(정치학 쉽게 읽기 27)노태우의 하이브리드 독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