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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박범기 Oct 22. 2023

아무 것도 아닌 존재가 되었지만,
괜찮습니다.

                                                                                          1


  산다는 것은 이러면 이런대로, 저러면 저런대로, 고통이 이어지는 일인 것만 같다고 생각할 때가 많습니다. 매순간 다양한 방식으로 찾아오는 고통들을 그럭저럭 견디면서 삶은 이어지더군요. 때때로 그것들이 버겁게 느껴지기도 하지만, 어떠한 고통이라도 결국에는 지나가고는 합니다. 그런 점에서 저에게 찾아오는 고통에 대해서 너무 크게 생각하지는 않으려고 하는 편입니다. 오히려 그 순간의 고통들을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는 것이 제 자신의 행복을 위해 더 나은 태도라고 여겨집니다. 

  지금부터 말씀드리려고 하는 것은 그동안의 실패의 여정들입니다. 살아오면서 나름대로 이런 저런 시도들을 했었습니다. 여러 시도들과 그에 대한 결과들이 지금의 저를 만들어 왔습니다. 말하자면, 제가 백수가 될 수밖에 없었던 과정에 대한 이야기인 셈입니다.      


                                                                                        2


  저는 대학교에서 문예창작을 공부하고, 대학원에서 문화연구를 공부했습니다. 제가 석사 학위를 받은 곳은 학위논문 심사가 까다롭기로 유명한 곳이었습니다. 박사과정은 물론이고 석사과정 역시 논문 심사가 까다로워 통과율이 아주 낮았습니다. 제가 입학했던 학기에는 저를 포함하여 6명이 입학했는데, 학위 논문을 통과한 졸업한 이는 저를 포함해서 두 명 뿐입니다. 논문을 쓰는 과정은 참 힘들었습니다. 그렇게 힘들게 논문을 쓰고, 그래도 석사학위 논문 치고는 이런 저런 관심들을 받았습니다. 몇 몇 자리에서 논문에 대해 강연을 하기도 했고, 제 논문을 수업 교재로 활용하는 학교도 있었습니다. 하지만 거기까지였습니다. 도저히 공부를 더 할 마음이 나지 않았고, 박사 과정에 진학하지 않기로 했습니다. 

  2016년에 석사 과정을 마친 후, 모 지역에 있는 00발전연구원이라는 곳에서 일을 시작했습니다. 석사학위를 받자마자, 거의 곧장 했던 취업이었습니다. 꾹 참고 잘 다녔다면, 그 이후의 행로가 편해졌을까요? 지금도 가끔씩 생각합니다. 

  저는 그곳을 한 달 반 만에 그만두었습니다. 상사 때문이었습니다. 그 상사가 특별히 나쁜 사람이었다고 말하고 싶지는 않습니다. 한국 사회 평균적 꼰대라고 할까요. 열 명 중에 여덟 명이나 아홉 명은 졸라 욕하면서 그럭저럭 참고 다닐 수 있을 수준 정도의 어려움이었던 것 같습니다. 그렇다고 하더라도, 제가 참고 견디면서 다닐 수 있는 곳은 아니었습니다. 그래서 그만 두었습니다.

  잠깐 놀았고, 2017년부터 크고 작은 연구 프로젝트를 수행하면서 생계를 이어 나갔습니다. 충분하지는 않았지만, 그럭저럭 혼자의 몸을 감당할 만큼의 수익은 있었고, 사는 데 크게 문제가 없었습니다. 

  2019년에는 어떤 공공기관에서 계약직으로 일하게 되었습니다. 육아휴직 대체였습니다. 월 150만원. 주 20시간. 1년이 채 안 되는 짧은 기간의 일이었지만, 제게는 좋은 조건이었습니다. 집에서 직장까지 거리는 제법 멀었지만, 일주일에 3일만 출근하면 되었기에 크게 부담이 되지는 않았습니다. 당시 저는 어떤 비영리민간단체에서 연구원으로 활동하고 있었고, 공공기관에 파트타임으로 일하면서, 제가 소속된 비영리민간단체 활동도 열심히 했습니다. 그러다가 그 해 10월, 내부 사정으로 인해 파트타임이었던 일이 풀타임으로 바뀌게 되었습니다. 일이 많이 바빠졌습니다. 그만큼 돈도 더 많이 벌었습니다. 월급은 기본급이 세전 290만원이었습니다. 제가 여태껏 벌었던 액수 중에서 가장 많은 돈이었습니다. 그 조건으로 12월 말까지 일을 할 수 있었습니다. 이 두 달 남짓의 시간은 제가 일을 하면서 가장 많은 돈을 벌었던 시기였습니다. 

  풀타임으로 일을 하면서 적지 않은 돈을 벌었지만, 좋지만은 않았습니다. 몸이 힘들었고, 그만큼 정신도 병이 드는 것 같았습니다. 매일 출퇴근 시간만 왕복 3시간이 넘게 걸렸습니다. 출퇴근을 하는 것만으로도 힘이 빠졌습니다. 더욱이 주 5일 내내 9시부터 6시까지 일하는 루틴이 잘 적응 되지 않았습니다. 여러모로 몸은 바빴고, 정신이 편치 않은 나날들이었습니다. 

  그런 중에 외할아버지가 돌아가셨습니다. 병중이시긴 했지만, 갑자기 돌아가실 거라고는 생각하지 않았단 때였습니다. 병원에서 회복되고 있다고 말했었고, 긴 입원 생활을 끝내고 다시 집으로 돌아오려고 하셨던 중이었습니다. 가까운 사람의 죽음을 본 것은 그때가 처음이었습니다. 얼마간의 정신적인 충격이 있을 수밖에 없었습니다. 그렇지만 그 충격을 갈무리해야 하는 것은 온전히 저의 몫이었습니다. 

  분명히 몸과 정신은 건강하지 못했지만, 경제적으로 여유가 있다는 것은 여러 이점을 주었습니다. 그리고 그런 이점들을 몸으로 느끼면서, 얼마간의 월급을 받으면서 안정적으로 살고 싶다는 욕망이 마음속에서 샘솟았습니다. 

  하지만 제가 원하는 대로 삶의 흐름이 흐르지는 않더군요. 2019년 계약이 종료되었고, 그 이후에 열심히 구직활동을 했습니다. 다시 어딘가에 소속되어 ‘보통의 삶’을 살고자 했지요. 쉽지 않았습니다. 지원한 곳들은 모두 떨어졌고, 또 다시 백수가 되었습니다. 구직활동을 하고, 실업급여를 받고 있는 중에 봄이 되었습니다. 2020년 봄. 뜻밖의 재난이 전 세계를 덮쳤던 때이지요. 코로나라는 재난 말입니다. 

  제게 있어 코로나는 하나의 기점이었습니다. 구직할 수 있는 자리가 현저히 줄었고, 팬데믹의 영향으로 면접이 미뤄지거나 취소되는 경우도 많았습니다. 겨우 잡힌 면접에서도 좋은 결과가 나오지 않았습니다. 점점 뜻하지 않은 방향으로 삶이 움직이기 시작했습니다. 원하는 대로 돈을 벌 수 없었고, 가지지 못한 것에 익숙해져야 했습니다. 벌이가 좋았다가 다시 나빠지니 상대적 박탈감이 더 커졌습니다. 

  2020년 여름께에는 정부 주도로 만들어진 일자리 사업에 참여했습니다. ‘희망일자리 사업’이라는 이름의 일이었습니다. 말이 좋아 ‘희망’ 일자리지, 희망이 있는 일은 아니었습니다. 최저임금이었고, 몇 개월짜리 계약직이었습니다. 한시적인 최저임금 일자리에 희망 따위가 있을 리 없었습니다. 이름만 바꿨을 뿐이지, 대규모로 채용한 공공근로에 불과했습니다. 정말 하고 싶지 않은 일이었지만, 통장 잔고가 바닥을 보이고 있어, 그것이라도 해야 했습니다. 

  저는 희망일자리 사업에 참여하면서 집 근처에 있는 구립 미술관에서 일했습니다. 도보로 10분 거리에 있는 곳이었기에 출퇴근에 대한 부담은 없었습니다. 그 점을 빼곤, 딱히 긍정적으로 생각할만한 여지가 없는 일자리였습니다. 할 일은 많지 않았습니다. 일이 많아서 사람을 뽑은 게 아니라, 직업이 없는 이들에게 공공에서 일시적으로 단기 일자리를 공급한 것이기 때문입니다. 

  하루 일과 중에서 가장 중요한 일은 미술관 근처 거리를 청소하는 것이었습니다. 아침에 출근해서 30분 정도 청소를 하고, 대부분의 시간은 미술관과 조금 떨어진 거리에 있던 컨테이너 박스에서 대기했습니다. 전시가 있었던 기간에는 전시관을 지키는 것이 주된 업무였습니다. 사람들이 작품을 만지려고 할 때 “만지지 마세요.”라고 말하는 것 정도가 하는 일의 전부였습니다. 일자리가 필요한 사람들을 위해 공공에서 예산을 들여 만든 임시 일자리였기에 할 일이 없는 것은 당연한 일이었습니다. 일과 시간의 상당부분을 ‘대기’ 하는 데 보냈고, 코로나가 심해졌던 시기에는 본래 받기로 된 금액의 일부만 받고 아예 일을 쉬기도 했었습니다. 

  2020년 12월 말, 희망일자리 사업이 종료되었고, 또 다시 ‘백수’가 되었습니다. 그 시간 동안에도 계속 지원서를 쓰고, 면접을 보러 갔지만 좋은 결과가 나오지 않았습니다. 실패만 계속 누적되었습니다. 그렇게 시간을 보내다가, 2021년 봄, 아는 사람의 소개로 어떤 협동조합에서 일을 하게 되었습니다. 6개월 한정의 단기 계약직이었습니다. 역시 좋은 일자리는 아니었습니다. 제가 그동안 해왔던 일들과 달랐고, 일 자체도 재미가 없었습니다. 하지만 딱히 할 일이 없었고, 그럭저럭 그곳을 다녔습니다. 그렇게 6개월이 지났고, 그대로 계약은 종료되었습니다. 그리고 그 이후부터 지금까지 백수로 지내고 있습니다.      

                                                                                           

                                                                                            3


  짧게 일하고, 많이 노는 시간을 반복해왔습니다. 그 시간 동안 통장 잔고는 빠르게 줄어들었습니다. 하지만 그것은 그것대로 견딜 수 있었습니다. 덜 먹고, 덜 쓰면서 가난에 익숙해지는 일은 불편한 일이긴 합니다만, 어느 정도 익숙해지면 그럭저럭 견딜만 했습니다. 도리어 견디기 힘들었던 것은, 제 스스로가 아무 것도 아닌 존재로 전락했다는 감각이었습니다. 사회적으로 인정받지 못하고, 쓸모없는 존재로 버려졌다는 감각이 저를 괴롭게 했습니다. 

  아예 일을 하지 않았던 시간에도 그런 감각들이 저를 괴롭혔지만, 단기 일자리를 전전할 때에도 그런 감각들이 저를 따라다녔습니다. 겨우겨우 최저임금을 받는 단기 일자리를 전전할 수밖에 없는 상황이 저에게 실패와 패배의 감각을 주고는 했습니다. 일을 하지 않을 때나, 최저임금을 받는 단기 계약직을 전전할 때 모두 제가 하는 일에 대해 떳떳하게 말하기 어려웠습니다. 그래서 사람을 만나는 일을 피하게 되기도 했지요. 누군가가 저에게 직업이 뭐냐고 물어볼 때, 할 말이 없었기 때문입니다. 당장에 통장 잔고가 얼마 남지 않은 것보다, 이런 식의 심리적인 불안정이 저를 더 많이 괴롭히고는 했습니다. 

  이런 상황에서 저에게 필요한 것은 제 스스로의 마음을 다스리는 일이었습니다. 제 마음은 계속해서 불안이나 불만족 따위의 부정적인 감정을 지어내면서 스스로를 불행하게 하고는 했습니다. 당장 상황을 바꿔낸다면 좋겠지만, 그렇게 할 수는 없었습니다. 단지 제가 할 수 있는 것은 저의 마음을 바꿔내는 일이었습니다. 제 마음이 더 이상 저를 불행하게 하도록 두지 않아야만 했습니다. 

  제가 비록 불안정한 단기 일자리를 전전하면서 짧게 일하거나, 백수로서 많이 논다고 하더라도 제가 불행해야 할 이유는 없습니다. 언제나 저는 저의 삶을 살아야 합니다. 그리고 그 삶을 행복으로서 가득 채우기를 원합니다. 제 뜻대로 인생이 풀려나갈 때 뿐 아니라, 그렇지 않은 순간에도 저는 행복해야만 합니다. 인생이 제 뜻대로 풀리지 않을 때 조차도 저의 삶은 이어지기 때문이지요. 그런 식으로, 저의 모든 삶의 순간들을 행복으로서 채우기 위해서 저는 제 마음을 보살피는 방법을 찾으려 했습니다. 

  앞으로 제가 어떤 식으로 저의 마음을 보살피려 했는지 구체적인 예시들을 이야기 할 것입니다. 여기서는 간단하게만 말씀드리겠습니다. 제가 저의 마음을 보살피는 방법으로 삼은 가장 핵심적인 방법 두 가지는 명상하기와 차 마시기입니다. 차를 마시고 명상을 하면서 저의 마음을 다스리고, 저의 삶을 풍요롭고 행복하게 채웠습니다. 남들보다 돈은 없었지만, 남들 보다 시간은 많았기 때문에 남아도는 시간에 저의 마음을 보살폈습니다. 그런 식으로 저는 일이 뜻대로 잘 풀리지 않는 상황들 안에서도 나름대로 행복하게 잘 지낼 수 있었습니다. 

  이 글을 읽는 모든 분들이 행복하기를 바랍니다. 어떤 상황 속에서도, 자신의 마음을 보살피면서, 자신 안의 행복을 찾으시기를 빕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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