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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박범기 Oct 22. 2023

주어진 상황을 받아들여야 하더군요.

  2017년 겨울. 산티아고 순례자의 길을 걸었던 적이 있습니다. 유럽의 이상 한파로 기온이 영하까지 떨어지는 때였습니다. 처음에는 활기차게 걸었지만, 시간이 지날수록 몸이 힘들었습니다. 나날이 날씨는 추웠고, 몸은 무거워져만 갔습니다. 그렇다고 걸음을 멈출 수 없었습니다. 제가 할 수 있는 일은 길을 걷는 것뿐이었습니다. 

  산티아고 순례자의 길에서 유독 기억에 남았던 날은 2017년 2월 4일입니다. 2월 4일은 저의 양력 생일입니다. 그러니까, 저는 순례의 길 한 가운데에서 그해 생일을 맞았습니다. 순례길의 과정에서 맞았던 생일이라 기억이 남은 것도 있습니다만, 그보다 더 기억에 남는 이유는 그 날이 유독 힘든 날이었기 때문입니다. 비가 많이 내린 날이었습니다. 날은 아주 추웠고, 비까지 내려서 걷기 좋은 날이 아니었습니다. 더욱이 전날에 평소보다 무리를 해서 몸 컨디션이 말이 아니었습니다. 오늘은 조금만 가야겠다, 고 생각하면서 길을 나섰습니다. 하지만 중간에 멈출 수가 없었습니다. 순례자의 길에는 알베르게라고 부르는 숙소가 있습니다. 게스트하우스와 비슷한 개념인데, 순례자들을 위한 숙소입니다. 여름에는 대부분의 알베르게가 문을 엽니다만, 겨울에는 많은 알베르게가 문을 닫습니다. 순례자의 수가 적으니, 운영되는 알베르게 역시 적은 것입니다. 더욱이 이상 한파까지 닥쳤던 때여서 순례자의 수도 적었고, 운영되던 알베르게 역시 적었습니다. 알베르게가 있는 곳까지 겨우겨우 당도를 했는데, 막상 가보니 문을 열지 않아서, 한참 더 멀리 떨어진 알베르게까지 억지로 걸어가야만 하는 상황이었습니다. 게다가 근처에 식당 역시 마땅히 없어서, 밥을 굶어가면서 억지로 억지로 길을 걸었습니다. 그러다가 겨우 식당을 한 군데 찾아서 점심을 먹고, 다시 길을 걷다가 겨우 저녁 무렵에 알베르게에 도착했던 기억이 있습니다. 한데, 그때 도착했던 알베르게는 식사가 제공되지 않아서 저녁 밥을 챙겨먹지 못하고 잠을 자야만 했습니다. 

  그러니까, 2017년의 생일은, 밥도 제대로 먹지 못하고, 몸은 몸대로 힘든 고행의 기억으로 남아있습니다. 




  산티아고 순례길에서 만났던 한 문장이 여전히 기억에 남아 있습니다. “JUST BE.” 라는 짧은 글귀입니다. 지금 이 순간에 존재할 것. 지금 이 순간을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면서, 지금 이 순간에 존재하는 것이 삶이라고, 그렇게 밖에 할 수 없다고, 저에게 가만히 속삭이는 것 같았습니다. 이상 한파로 기온이 영하 이하로 내려갔던 고된 순례길에서, 제가 할 수 있는 일은 주어진 모든 순간들을 받아들이면서 걸어 나가는 일 뿐이었습니다. 비가 내리던, 날씨가 춥던 상관하지 않고 내가 갈 길을 가는 것밖에 다른 방법이 없었습니다. 주어진 상황을 제가 바꿀 수는 없었지요. 그저 제게 주어진 상황들을 받아들이면서, 그 안에서 순간순간 마주한 것들을 있는 그대로 받아들일 뿐이었습니다. 

  상황과 조건이 어떻든 그것을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면서 단지 나의 존재 안에서 살아내는 일. 그것이 산티아고 순례길에서 배운 것이었지요. 그때의 가르침은 여전히 제 안에서 살아 숨 쉬고 있다고 생각합니다. 

  하지만 상황이 좋지 않을 때면, 쉽게 잊기도 했습니다. 잠깐 일하고 오래 쉬는 일이 반복 될 때, 내게 주어진 모든 상황들을 있는 그대로 받아들여야 한다는 마음이 잘 유지가 되지 않더군요. 마음이 많이 불안했습니다. 무엇보다, 제게 주어진 상황들이 만족스럽지 않았습니다. 나름대로 최선을 다해 살아왔다고 생각했는데, 고작 이 정도밖에 가질 수 없다는 것이 너무 원망스러웠습니다. 

  또 다른 한편에서 저를 괴롭혔던 것은 상대적인 박탈감이었습니다. 누구누구는 얼마를 번다더라, 같은 말들이 제 귀에 들려 왔습니다. 누구누구는 아파트를 샀다더라, 누구누구는 결혼을 한다더라, 누구누구는 사업을 해서 대박이 났다더라. 누구누구의 좋은 소식은 저 자신의 무능력을 자각하게 했습니다. 저 자신을 괴롭게 했습니다. 그런 일들이 괴로운 이유는 제 안에서 자꾸만 부정적인 생각을 키웠기 때문입니다. 

  상황이 좋지 않았을 때, 저를 괴롭힌 것은 무엇보다 저의 마음이었습니다. 외부적인 조건이나 상황보다도 저의 마음이 스스로를 괴롭혔습니다. 제 마음이, 저 자신을 폄하하고, 비하했습니다. 자신의 무능력을 책망하고, 자신의 빈곤함을 불행이라고 해석했습니다. 그렇게 스스로가 스스로를 과녁으로 겨누고 자신을 향해 나쁜 말들을 쏟아내고는 했습니다. 그런 식으로 스스로를 좀먹고, 스스로를 불행하게 만들었습니다. 그래도 다행인 것은 그런 순간들에 너무 깊게 빠지지 않았다는 점입니다. 

  명상을 하고 차를 마시면서 저의 마음을 보살폈습니다. 제가 저 스스로를 불행하게 만드는 행위를 멈춰내려고 했습니다.      

  우리는 이 세상에서 일어나는 일들을 통제할 수 없다. 그러나 나를 둘러싸고 일어나는 일, 그리고 내 안에서 일어나는 일들에 어떻게 반응할 것인지는 스스로 통제할 수 있다. 이를 정확하게 인지한 사람은 어떤 상황이든 편하게, 그러나 책임감 있게 받아들이게 된다.      

  명상을 배우고, 매일 일정한 시간을 명상을 수행하면서 알게 된 것들이 많습니다. 그 중에서 가장 큰 깨달음은 어떤 상황과 조건에 처해있든 주어진 상황을 받아들여야만 한다는 점입니다. 내가 원치 않은 상황과 조건이 내게 주어진다고 하더라도, 그것을 거부하거나 피하려고 하는 것은 저에게 별로 도움이 되지 않더군요. 그저 어느 상황이든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고, 그 순간에서 평정심을 지키는 일이 저에게 더 도움이 되었습니다. 

그렇게 상황을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면서, 저 자신을 향해 비난의 말을 쏟아내는 일이 조금씩 줄어들었습니다. 상황을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는 만큼, 저 자신에 대해서도 있는 그대로 받아들일 수 있게 되었기 때문이겠지요. 

  일을 하지 못하는 시간이 길어졌지만, 그것도 그것대로 장점이 있었습니다. 시간이 많은 만큼 저 자신을 돌보는 시간이 많아졌다는 것이 제가 느끼는 가장 큰 장점이었습니다. 정신적으로, 육체적으로 저 자신을 돌보는 시간이 많아졌습니다. 그만큼 저는 더 건강해질 수 있었습니다. 그 시간 안에서 가능한 만큼 일상의 풍요로움을 만들어 내었습니다. 그러다보니 제가 조금씩 행복해지더군요. 

  물론, 여전히 어느 정도는 불안합니다. 앞으로 어떻게 될지 조금도 알 수 없고요. 하지만 그럼에도 지금 이 순간 제게 주어진 것들을 기꺼운 마음으로 받아들이는 태도를 지니려 합니다. 그렇게 하여 하루하루의 삶을 행복하게 살고자 오늘도 결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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