프롤로그
TMB, 투르 드 몽블랑.
그 이름을 입에 올리는 순간, 알 수 없는 흥분이 일어난다. 가슴 깊은 곳이 가볍게 떨리고, 목 안쪽에서는 알 수 없는 울컥함이 올라왔다. 설렘인지 긴장인지, 아니면 그 둘이 뒤섞인 또 다른 감정인지.
프랑스 샤모니에서 시작해, 이탈리아 쿠르마이어와 스위스 트리앙을 지나, 다시 프랑스로 되돌아오는 약 170km의 원형 트레일. 서유럽 최고봉인 몽블랑(4,809m)을 중심으로 고도를 오르내리며 알프스의 심장을 빙 두르는 11일간의 여정. 트레커들 사이에서는 'TMB'라는 이름으로 불린다.
이름만으로도 가슴을 벅차게 하는 이 길은, 유럽에서 가장 아름답고 완성도 높은 트레킹 코스다. 만년설을 머리에 이고 선 몽블랑, 들꽃으로 반짝이는 초원, 고요히 숨 쉬는 오두막과 아담한 마을들, 그리고 그 모든 것을 감싸는 도는 트레킹 코스이다.
총 열 개 남짓한 고개를 넘어야 하고, 하루 평균 15km를 걷는다. 때로는 짙은 숲의 그늘 아래로, 때로는 눈 덮인 능선과 맞닿으며, 길은 끊임없이 풍경을 바꾼다. 그러나 그 변화 속에서도 길은 묵묵히, 제 속도로, 걸음을 부른다.
이 길의 기원은 오래전으로 거슬러 오른다. 1786년 여름, 자크 발마와 미셸 파카르. 장비도 경험도 부족했던 그들은, 단 하나, 의지라는 이름의 도구만으로 몽블랑 정상에 올랐다. 과학과 모험의 이름으로 시작된 그 도전은, 이후 수많은 이들에게 '자기 안으로의 여행'을 시작하게 했다.
그리고 지금, 나와 안해도 그 대열에 합류하려 한다. 이번 여정은 나에게, 무엇보다 특별하다. 처음으로 '안해'와 함께 떠나는 장거리 트레킹이기 때문이다.
나는 아내를 '안해'라 부른다. 언젠가 '안해'는 원래 집안의 태양이라는 뜻이라 들었다. 그 말이 참인지 거짓인지는 뒤로하고, 이 호칭이 마음에 들었다. 그래서 나는 글을 쓸 때는 ''안해'라고 한다. 이제는 내게 가장 따뜻하고 자연스러운 언어가 되었다.
사실 안해는 걷는 것을 그리 좋아하지 않는다. 정확히 말하면, 스스로 좋아서 걷는 사람이 아니라, 누군가를 위해 조용히 걸어주는 사람이다. 트레킹은 늘 내가 혼자 다녀오는 일이었고, 안해는 그런 나를 묵묵히 응원해 주는 사람이었다. 그런데 이번에는, 함께 걷겠다고 했다.
처음에는 좀 의아했지만, 차츰 그 이유를 알게 되었다. 내가 직장에서 임금피크에 들어서며 시간적 여유가 생겨 떠나게 된 트레킹이라 나와 함께하고 싶다는 그 마음의 결을 읽었다. 그것은 나에 대한 배려였고, 우리가 삶의 동행자임을 말하는 것이었다.
그 말을 들은 순간부터, 나는 분주해졌다. 배낭을 고르고, 침낭을 준비하고, 안해에게 맞는 등산화를 신중히 골랐다. 가끔 트레킹 코스를 물어보고, 설렘과 걱정의 눈으로 지도를 살펴보던 모습이 아직도 눈에 떠오른다.
8월 2일 새벽 어스름에 우리는 김해공항으로 향했다. 김해공항으로 가는 길에 우리는 말없이 창밖을 바라보았다. 고요한 도로 위에 서린 안개, 여명을 기다리는 어둠, 심장을 조용히 두드리는 긴장.
비행기는 베이징과 뮌헨을 거쳐 제네바에 닿았다. 해는 이미 저물었고, 낯선 공기 속에 우리는 다시 짐을 챙겨, 예약해 둔 ALPY 버스에 몸을 실었다.
버스는 어둠 속 산길을 달렸다. 가로등조차 드문 도로를 따라, 마을 하나, 고개 하나를 넘어설 때마다 공기는 점점 더 맑아지고 차가워졌다.
샤모니에 도착했을 때, 우리는 마치 산의 품에 안긴 듯한 느낌을 받았다. 창문을 열자, 한여름임에도 서늘한 고산의 냄새가 밀려들었다. 늦은 시간이라 마을도 함께 잠든 듯했다.
호텔에 짐을 풀고, 간단한 요깃거리를 사러 나섰다. 문을 연 작은 슈퍼에서 샌드위치와 맥주를 샀다. 그리고 돌아오는 길, 광장 한복판에서 책에서 보던 동상을 만났다. 자크 발마와 미셸 파카르. 몽블랑을 처음으로 오른 이들이다.
한 사람은 손을 뻗어 산을 가리키고 있었고, 다른 한 사람은 고요히 그 손끝을 바라보고 있었다. 우리는 그들처럼, 말없이 산을 바라보았다.
숙소로 돌아와 침대에 몸을 눕혔지만, 쉽게 잠이 오지 않았다. 창문 너머로 바람이 밀려들었다. 그 바람 속에는 내일 우리가 넘어야 할 고개들의 기운이, 아직 걷지 않은 능선들의 숨결이 스며 있었다.
지금 나는, 산 아래에 있다. 그러나 마음은 이미 산길을 걷고 있었다. 이제 내일부터 시작이다. 안해와 함께, 투르 드 몽블랑을 향해 한 걸음 한 걸음 나아갈 것이다. 그 길 위에서, 우리는 지나온 삶을 되짚고, 앞으로 남은 삶을 새롭게 지어갈 것이다.
이 여정은 그리 순탄하게 끝날 것 같지는 않지만, 서로를 더 깊이 알아가는 시간이 될 것이다. 어쩌면 이 11일의 여정은 우리 인생의 또 다른 전환점이 될지도 모르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