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월 3일, 트레킹 1일차
샤모니에서 아침이 밝았다. 잠을 설친 탓인지, 새벽 공기가 유난히 차갑게 느껴졌다. 몸은 아직 낯선 땅의 공기에 적응하지 못했지만, 마음은 이미 산으로 향하고 있었다.
아침 일찍 숙소 앞에서 시티버스를 탔다. 샤모니 계곡을 따라 운행되는 이 버스는, 일정 요금만 지불하면 체류 기간 동안 마음껏 이용할 수 있다. 시간 여유만 있다면 이 버스 하나만 타고도, 계곡 이곳저곳을 찬찬히 둘러보는 여행이 될 것 같았다. 푸르른 숲과 붉은 지붕의 집들, 수줍은 표정의 사람들이 창밖을 스쳐갔다.
레우쉬에 도착한 우리는 다시 케이블카로 갈아탔다. 케이블카는 벨뷰라는 이름의 전망대까지 순식간에 데려다주었다. ‘아름다운 풍경’이라는 뜻 그대로, 전망대에 발을 내딛자마자 알프스의 산자락이 한 폭의 그림처럼 펼쳐졌다.
사실 트레킹이라면 걸어서 오르는 것이 당연한 일일 것이다. 하지만 안해와 함께하는 이번 트레킹에서는 필요할 땐 케이블카와 곤돌라의 힘도 빌릴 생각이다. TMB의 완주보다 중요한 건, 우리 두 사람이 ‘끝까지 즐겁게 걷는 일’이라는 걸 알기 때문이다.
전망대에서 내려와 조금 걷자 작은 기차역이 나왔다. 이 열차는 알프스의 심장부로 운행하는 관광열차다. 우리도 언젠가 기차를 타고 이 산을 가로지르는 날이 올까. 알프스라는 곳은 걷기에도, 달리기에도, 그저 바라보는 데에도 좋은 아름다운 산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산자락을 타고 이어지는 트레일에 접어들자, 본격적인 오르막이 시작된다. 등 뒤로는 기차역이 작아지고, 앞으론 숲과 능선이 열렸다. 미아주 산장까지는 이정표에 3시간 10분이라 표시되어 있었지만, 실제로는 그보다 더 걸렸다. 이정표의 시간에 얽매이지 않고 페이스를 유지하며 걷기로 했다.
한참을 걷다 보니, 사진으로만 보던 출렁다리가 나타났다. 계곡 아래로는 물살이 빠르게 흐르고, 수직의 벽처럼 깎인 협곡 사이로 바람이 세차게 불었다. 안해는 조금 겁이 나는 눈치였다. 안해의 손을 꼭 잡고, 천천히 다리를 건넜다. 다소 출렁였지만, 기억에 남을 스릴 넘치는 장면이 될 것이다.
다리 건너편, 야생화가 만발한 초원이 펼쳐졌다. 짙은 초록 사이로 보랏빛, 노란빛, 흰 꽃잎들이 가득했다. 초원을 가로지르며 걷자, 멀리 트리콧 고개가 모습을 드러냈다. 꽤 높고 가파르게 느껴지는 고개였다. 눈앞에 보이는 고개라 해도, 막상 닿기까지는 한참이 걸린다. 그게 산길의 법칙이었다.
쉬엄쉬엄 첫 고개에 도착하니, 전 세계에서 온 트레커들이 모여 있었다. 어떤 이들은 햇살을 온몸으로 받고 있었고, 어떤 이들은 나무 그늘 아래 고요히 앉아 있었다. 누군가는 혼자였고, 또 누군가는 가족과 친구들과 함께였다. 모두 다른 모양이지만, 그 풍경 안에는 ‘함께 걷는 사람들’의 따뜻한 온기가 담겨 있었다.
트리콧 고개에서 미아주 산장까지는 급경사 내리막이다. 눈 앞에 산장이 보이지만 한참을 내려가야 한다. 단체 여행객들이 뒤엉켜 내려가는 바람에 우리는 쉬지도 못한 채 속도를 맞춰 내려갔다. 팔과 어깨에 무리가 왔다. 배낭이 짓누르는 어깨의 고통을 참으며 예상보다 긴 하산길을 내려왔다.
드디어 미아주 산장에 도착했다. 긴장이 풀리자 생각나는 건 시원한 맥주였다. 산장에서 마시는 첫 맥주는 꿀맛이었다. 산장 앞 테라스에 앉아 맥주를 마시고 있는데, 서울에서 온 분들과 마주쳤다. 식사 중이던 그들은 오믈렛이 맛있다고 권해줬고, 우리는 오믈렛을 시켰다. 부드럽고 고소한 맛, 그리고 푸짐한 양. 산에서의 점심으론 더할 나위 없었다.
긴 휴식 후 다시 길을 나섰다. 오늘의 목적지는 트룩 산장이었지만, 길을 따라 걷던 중 방향을 잘못 들고 말았다. 앞사람을 무심코 따라 걷다가 길을 잘못 든 것이었다. 되돌아가기엔 이미 한참을 내려왔고, 결국 ‘라 그룬바스’라는 전혀 다른 마을에 도착하게 되었다.
마을에서 한 민가의 문을 두드렸다. 당황한 얼굴을 본 주인 아저씨는, 처음에는 난감한 표정을 지었다. 그러다 이내 차 키를 들어 보이며 말했다.
"걱정 마세요. 제가 데려다줄게요."
프랑스 산골의 아저씨는 주저 없이 우리를 차에 태워 주었다. 사례를 하겠다고 했지만, 그는 고개를 저었다.
"나중에, 누군가 도움이 필요할 때, 당신이 도와주세요."
프랑스의 시골마을에서 경험한 산 아래 작은 마을의 한 사람. 그 따뜻한 말은 오랫동안 내 마음에 남았다. 안해와 난 그분을 트레킹 기간동안 프랑스 천사 아저씨라고 불렀다.
프랑스 천사아저씨 덕분이 무사히 야영장에 도착했다. 싸이트는 배정받고 텐트를 쳤다. 샤워를 하고 근처에서 쌀과 간단한 식재료를 사서 저녁을 준비했다. 길쭉하게 생긴 낯선 쌀알은 물을 아무리 부어도 고슬고슬 찰기가 없다. 국에 말아 먹으니 의외로 괜찮았다.
옆 텐트에는 서울에서 혼자 트레킹을 온 사람이 있었다. 작은 불빛 아래에서 이런저런 이야기를 나누었다. 세계 곳곳을 혼자 다녔다던 그의 목소리에는 외로움보다 자유가 묻어 있었다.
투르 드 몽블랑의 첫 날이 이렇게 끝났다. 길을 잘못 들어 헤매기도 했고, 뜻밖의 도움을 받기도 했다. 하지만 무엇보다도, 이 하루는 '에피소드가 많았던 첫날’로 오래 기억될 것이다.
<샤모니 – 레우쉬 – 벨뷰 – 출렁다리 – 트리콧 고개 – 미아주 산장 – 라그룬바스 – 레 꽁타민 야영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