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월 4일
아직 밤인지 아침인지 모를 어둠 속에서 눈을 떴다. 시계를 보니 5시. 텐트 안으로 스며든 새벽 공기에 몸을 움츠리며 조심스럽게 일어났다. 간단히 식사를 하고, 다시 배낭을 챙기다 보니 어느새 8시를 넘어간다. 아침 출발이 빠르지 않은 것은 아쉬웠지만, 둘이 함께 움직이는 일이니 서두를 이유는 없었다.
8시 반, 드디어 오늘 첫 발을 내디뎠다. 이른 아침 공기는 투명했고, 햇살은 부드럽게 산등성이를 비추고 있었다. 커다란 개가 야영장 주변을 뛰어다니는 모습을 바라보다가, 문득 집에 두고 온 '봄이'가 생각났다. 주인을 잘못 만나 맘껏 뛰놀지 못하는 '봄이'에게 미안한 마음이 들었다.
마을의 끝 부분에 이르자, 작고 단아한 조지성당이 나타났다. 외벽은 소박했지만, 문을 열고 들어서자 세월을 머금은 고요함과 함께 화려한 내부가 펼쳐졌다. 오래된 나무 벤치, 잘 그려진 성화, 창에 새겨진 스테인드글라스, 한쪽 구석의 작은 촛불까지. 이 작은 마을에 이런 성당이 있다는 사실이 새삼 놀라웠다.
성당 앞 이정표에는 '본옴므 산장까지 4시간 50분'이라 적혀 있었다. 하지만 우리는 안다. 우리의 걸음은 언제나 이정표의 시간보다 더디다. 아마도 7시간쯤 걸릴 것이다. 느린 만큼 더 많이 보고, 더 깊이 걷기로 했다.
곧 낭보낭 산장에 도착했다. 산장 앞 작은 정원에는 꽃들이 흐드러졌고, 나무 테이블에 드문드문 트레커들이 모닝커피를 즐기고 있었다. 우리도 그 사이에 자리를 잡았다. 따뜻한 커피 한 잔을 손에 쥐고, 햇살 아래 나른히 앉아 있자 시간이 느리게 흐르는 듯했다.
옆 테이블에는 할아버지와 손자가 앉아 있었다. 할아버지는 숨을 고르며, 손자는 잔뜩 들뜬 표정으로 지도를 들여다보고 있었다. 그 모습을 바라보며, 할아버지와 산행을 하는 손자가 대견스럽고, 손자와 산행하는 할아버지가 대단하다고 생각되었다.
산장을 지나자 시야가 확 트였다. 광활한 풀밭을 가로지르는 길이 멀리까지 이어지고, 그 끝에는 거대한 돌산이 우뚝 솟아 있었다. 여름 햇살에 돌산은 희미한 연기를 두른 듯 반짝였다. 길을 따라 걷다 보니 발므 산장이 나타났다. 점심을 먹기 위해 멈춰 선 곳이다.
직장 동료인 제임스 형님의 조언대로, 치킨 샐러드와 'plat du jour'를 주문했다. 제임스는 몇 해 전 같은 코스를 다녀온 선배 트레커였다. 그의 말로는 고기와 감자튀김이 나온다고 했는데, 우리의 접시 위에는 녹아내릴 듯한 모차렐라 치즈와 바삭한 바게트 빵, 그리고 신선한 채소와 올리브오일로 버무린 샐러드가 놓였다.
종업원에게 물으니 "plat du jour는 요리 이름이 아니라 오늘의 요리"라고 웃으며 대답했다. 기대와는 달랐지만, 담백한 맛은 허기를 충분히 달래주었다. 점심을 마치고 다시 길을 나섰다. 발므 산장을 뒤로하고 본격적인 오르막에 들어섰다.
계곡 옆, 아직 녹지 않은 잔설 사이를 지나며 숨을 골랐다. 조배 호수로 가는 갈림길에선 많은 사람들이 그쪽으로 향했지만, 우리는 미리 세운 계획대로 본옴므 고개를 향해 걸었다. 고개를 넘는 일은 쉽지 않았다. "이게 마지막 오르막이야?" 안해의 질문에 나는 그저 미소로 답할 뿐이었다.
어깨는 뻐근했고 다리는 감각이 무뎌졌다. 몇 번이고 멈춰 서서 물을 마시고, 깊게 숨을 들이마셨다. 그래도 앞을 막아서는 멋진 풍경에 가끔 걸음을 멈추게 된다. 드문드문 핀 꽃들, 바람에 흩날리는 풀잎, 자연은 힘들게 하지만 침묵으로 응원의 메시지를 보내는 것 같았다.
본옴므 고개에 도착해서는 짧게 간식을 먹고 다시 발걸음을 옮겼다. 고개 하나를 넘었다고 끝나는 것이 아니었다. 산허리를 돌 때마다 '저 너머면 목적지일까' 싶었지만, 또 다른 고개가 기다리고 있었다. 길은 마치 비밀을 간직한 연인처럼 끝을 쉽게 보여주지 않았다.
드디어 본옴므 산장이 시야에 들어왔다. 돌길을 몇 굽이돌아야 겨우 닿을 수 있는 곳. 산장에 도착해 야영지를 둘러보니, 곳곳이 소똥으로 얼룩져 있었다. 쉽게 텐트를 칠 만한 곳이 보이지 않았다.
문득 역시 직장 동료인 북설지가 산장 위로 올라가 야영했다고 했던 말이 떠올랐다. 북설지는 먼저 이 트레일을 완주한 후 자세한 정보와 조언을 나눠주었다. 그의 말처럼 산장 위로 올라가 보니, 다행히 좋은 터가 눈에 들어왔다.
조심스럽게 텐트를 치고 나니, 주변으로 또 다른 사람들이 하나둘 텐트를 치기 시작했다. 각기 다른 나라에서 온 듯한 트레커들이 간간이 목례를 건네며 저마다의 작은 집을 세우고 있었다. 비슷한 길을 걷는 이들이 함께 있다는 사실은 그 자체로 위안이 되었다.
본옴므 야영지는 가히 절경이었다. 주위를 둘러싼 산들이 마치 성벽처럼 우리를 둘러싸고 있었고, 바람은 부드럽게 능선을 넘다 야영지로 흘러들었다. 늦은 저녁, 산장에 가서 간단히 샤워를 하고 돌아왔다. 작고 소박한 두 사람의 만찬을 준비한다.
오늘 우리는 이 멋진 풍경 속에, 우리의 작은 집을 세웠고, 산들이 우리를 지켜주는 이곳에서, 긴 하루를 마감했다. 몸은 고됐지만, 마음은 더없이 충만했다. 내일은 더 높은 고개를 넘어 이탈리아 국경으로 향할 예정이다. 길은 이제 시작이지만 그 끝을 향해 우리는 천천히 나아가기로 했다.
<레 꽁타민 야영장 → 조지 성당 → 낭보낭 산장 → 발므 산장 → 본옴므 고개 → 본옴므 산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