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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피유, 오늘은 여기에서 쉰다.

8월 5일

by 오시리스 김일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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새벽 공기가 텐트 안으로 스며들며 몸을 깨웠다. 텐트 안은 새벽의 기운으로 다소 차가웠고, 몸은 아직 어제의 피로가 회복되지 못한 듯 무거웠다. 뻐근한 다리를 천천히 움직이며, 나는 조심스럽게 텐트의 지퍼를 열었다. 새벽 공기가 얼굴을 스치고 들어왔다.


오늘은 수드 데 푸르(Sud des Fours)를 넘어 300미터를 오르고, 다시 천 미터를 내려온 뒤, 또 하나의 고개인 세뉴를 넘어야 했다. 그리고 국경 너머, 이탈리아의 엘리자베타 산장까지 이어지는 여정. 하루에 소화하기에는 다소 긴 일정이었다.


지도를 펼쳤다. 안해와 나는 오늘 일정을 살피며 어떻게 진행해야 할지 의견을 나누었다. 어제 본옴므 고개를 힘들게 넘어 이곳까지 왔는데, 오늘 다시 사피유 고개를 넘어 이탈리아로 가는 코스를 감당할 수 있을지 의문이 들었다. 그때 서울에서 온 트레커의 말이 떠올랐다.


“사피유로 내려가면, 거기서 글라시에까지 가는 버스가 있을 거에요.”


처음 듣는 정보라 믿음은 희미했지만, 우리에겐 믿고 싶은 소식이었다. 만약 버스를 탈 수 있다면, 오늘의 일정을 무사히 이어갈 수 있을지도 몰랐다. 그런 생각을 하며 우리는 사피유를 향해 발걸음을 옮겼다.


먼저 출발하는 다른 트레커들의 뒤를 따라 길을 나섰다. 그 길에 표시된 TMB 마크를 믿고 한 치의 의심도 없이 길을 따라갔다. 하지만 구비를 몇 번 돌아도 고도는 떨어지지 않았다. 길은 능선으로 이어지고 있었다.


이건 하산이 아니라, 능선을 이어가는 길이다. 지도를 다시 펼치고 현재 우리의 위치를 가늠해 보았다. 순간, 우리가 가야 할 곳과 다른 방향으로 가고 있다는 것을 알아차렸다.


“길이 좀 이상해, 잘못 들어선 것 같아.”


나는 조심스레 안해에게 말했다. 안해는 멍하니 나를 바라보았다. 놀람보다는 실망감이 안해의 얼굴에 어렸다. 한숨이 길게 나오고, 그 한숨은 우리를 더욱 침묵하게 했다. 되돌아가는 길은 한 시간 정도 걸렸다. 갈 때보다 돌아 나올 때 길이 더 멀게 느껴졌다.


출발했던 산장으로 돌아와 우리는 걸음을 멈췄다. 1시간 정도를 허비한 셈이다. 이미 오늘의 빡빡한 일정을 소화하기에는 어렵게 되었다. 체력보다 더 예민한 것은 마음이었다. 안해의 표정을 살피며, 나는 커피를 한잔 마시며 좀 쉬었다가 가자고 다독였다.


따뜻한 커피를 두 손으로 감싸 쥐고, 우리는 서로 말없이 창밖을 바라보며 커피를 마셨다. 나는 천천히 가자고 생각했다. 지난 이틀간의 산행이 우리에겐 힘들었던 것이다. 말은 없었지만 우린 비슷한 결론에 닿아 있었다.


정신을 차리고 다시 걷기 시작했다. 이번에는 진짜 사피유로 향하는 길로 내려간다. 그리고 TMB의 길은 한길로 나 있는 것이 아니라 다양한 많은 길이 있다는 걸 알고서 길 찾기에 더 신경을 썼다. 하산 길은 마치 우리의 마음을 알아차리기라도 한 듯 아주 부드러웠다.


광활한 초원이 열리고, 수백 마리의 양 떼가 구름처럼 들판을 채웠다. 양 치는 목동은 언덕 높은 곳에 서서 양 떼를 살피고 있고, 개는 낮은 짖음으로 이리저리 양 떼를 몰았다. 양 떼들의 부산한 방울 소리는 바람을 따라 언덕 멀리까지 퍼졌다.


정오가 조금 지난 시각, 언덕을 다 내려와 사피유에 도착했다. 마을은 조용했고, 평화로웠다. 우리는 조그마한 식당으로 들어가 맥주를 시키고, 점심을 주문했다. 접시 위에는 얇게 저민 생베이컨과 샐러드, 고소한 바게트가 담겨 있었다. 맥주는 긴장을 풀어주었고, 음식은 더없이 맛있었다.


식사를 마치고 인포메이션 센터에 들렀다. 버스는 실제로 있었다. 사피유에서 글라시에까지 가는 버스. 하지만 오늘은 이미 막차가 끊어진 늦은 시각이었다. 오늘 그 길을 걸어가기에도 너무 늦었다. 우리는 여기 사피유에서 멈추기로 했다.


사피유 야영장에서 멈추기로 결정한 이후 우리는 다시 평화를 되찾았다. 더구나 사피유 야영장은 무료였다. 화장실은 인포메이션 센터 옆에, 유료 샤워는 레스토랑에 마련되어 있었다. 냇가에 앉아 발을 담그고 빨래를 했다. 물은 차갑고 투명했고, 걱정과 피로는 그 물결을 타고 어디론가 흘러갔다.


아직 해가 중천에 있는 오후. 우리는 평평한 자리를 골라 텐트를 세웠다. 시간이 지나자 하나둘 텐트가 더해지며 야영장은 색색의 텐트로 얼룩졌다. 어쩌면 이 멈춤은, 우리에게 꼭 필요했던 쉼이었던 것 같다.


우리 옆자리에 텐트를 친 네덜란드 커플이 웃으며 인사를 건넸다. 트레킹길에서 몇 번 마주쳤던 사람들이다. 친근하게 인사를 나눈 그들의 존재가 마음을 부드럽게 해 주었다. 냇물 소리와 소의 방울 소리가 교차하며 들려왔다. 이 낯선 풍경 속에서 우리가 하루를 보내고 있다는 사실이 새삼 다행스럽고 고맙게 다가왔다.


길을 잘못 들면서 시작한 오늘 하루가 어쩌면 아주 힘들어질 수도 있었다. 하지만 그 실수로 우리는 사피유에서 길을 멈추었다. 아마 실수가 없었다면 우리는 계속해서 앞으로 나아갔을 것이고 3일간 연속된 힘든 산행으로 몸과 마음은 더욱 지쳤을 것이다.


그러나 우리는 실수로 인해 멈추었고, 멈추었기 때문에 더 충만해질 수 있었다. 이 멈춤은 포기가 아니라 다시 걷기 위한 준비였다. 내일은 몸도 마음도 새롭게 충만된 상태로 프랑스에서 이탈리아로 넘어갈 것이다. 오늘은, 사피유 여기에서 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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