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월 6일
조용한 하루가 시작되었다. 사피유 야영장, 트레킹 중 작은 쉼표 같은 그곳은 어제의 알바 사건 덕분에 얻게 된 선물이었다. 잠시 머물렀던 그 멈춤의 자리에서 일어나 오늘 새롭게 시작한다.
오늘은 이탈리아 꾸르마예르까지 가야 하는 날이다. 여행을 계획할 때 우리는 이번 트레킹 여정 중 세 곳의 도시인 프랑스의 샤모니, 이탈리아의 꾸르마예르, 스위스의 제네바에서 각 하루씩 머물 호텔을 예약해 두었다. 서로 다른 문화와 언어, 그리고 밤을 경험하려는 뜻에서였다.
하지만 여행은 계획대로 되질 않는다. 특히, 트레킹이란 변수가 많아 쉽지 않다. 계획보다 더 늦는 경우가 대부분이다. 오늘도 꾸르마예르까지 도착할 수 있을지 확신할 수 없었지만, 일단 한번 가보기로 한다.
아침 8시 40분, 우리는 사피유에서 출발하는 첫 버스를 탔다. 버스 창 너머로는 여름의 초원이 흐르고, 바위 언덕이 겹겹이 펼쳐졌다. 안해는 창가에 기대 조용히 창밖을 바라보고 있다.
버스 안에서 뜻밖에 한 한국인 여성을 만났다. 놀랍게도 그녀는 우리와 같은 부산, 그것도 같은 해운대 좌동에서 왔다고 했다. 이 알프스 한복판, 멀고 먼 산길에서 이웃을 만난다는 게 너무 신기했다.
반가운 마음이 컸지만 버스 안이라 조용히 반가운 마음을 나누었다. 우리는 모테 산장 근처에서 하차했다. 산장 뒤로는 세뉴 고개가 서 있었다. 오늘의 가야 할 가장 높은 고개이자, 프랑스에서 이탈리아로 넘어가는 고개이다.
우리가 걷기 시작할 즈음, 어제 사피유 야영장에서 보았던 네덜란드 커플이 멀리 앞서 걸어가고 있었다. 서로 말을 걸진 않았지만, 눈이 마주칠 때면 반가운 웃음을 건네었다.
세뉴고개를 오르면서, 몇 번이고 숨을 골랐다. 긴 오르막은 사람을 지치게 한다. 언제나 고갯길의 마지막은 힘이 드는 것 같다. 세뉴 고개에 올라서자 갑자기 익숙한 말소리가 들렸다. 낯익은 억양, 익숙한 단어들. 한국인 단체 관광객들이 고개 위에 모여 있었다.
세뉴고개에서 사람들과 짧은 만남을 뒤로하고, 고개 너머 이탈리아로 걸음을 옮긴다. 풍경은 순식간에 달라졌다. 프랑스 쪽이 완만한 녹색 공원이었다면, 이탈리아는 뾰족한 암봉과 거친 협곡이 도열한 땅이었다. 회색 바위와 어두운 골짜기, 깊은 절벽이 묘한 긴장감을 만들어냈다.
우리는 바람을 피해 평평한 바위 위에 앉아 점심 식사를 꺼냈다. 사피유 슈퍼에서 산 샌드위치였다. 안 해는 빵을 좋아해서인지 맛있게 먹는 것 같았다. 그러나 나는 빵 안에 든 말린 생고기가 계속 거슬렸다. 고기를 빼고, 야채와 빵만으로 먹었는데, 빵도 굳어 있었고 짜기도 했다.
우리나라 사람들이 음식을 짜게 먹는다고 들었는데, 내가 먹어본 유럽의 음식들이 더 짰다. 짜도 많이 짰다. 먹기에 부담스러웠지만 억지로라도 먹어야 했었다.
점심식사 후, 길은 계곡을 따라 완만하게 내려가기 시작했다. 자전거를 멘 이들이 반대편에서 언덕을 오르고 있었다. 그들은 어깨에 자전거를 메고 땀을 흘리며 경사를 넘고 오고 있었다. 레저생활을 즐기는 것인지 고행을 하는 것인지 궁금했지만, 열정이 없으면 할 수 없을 것이다.
왼편으로는 암봉들이 그림자처럼 늘어섰고, 계곡은 마치 운동장처럼 너른 평지로 펼쳐졌다. 걸음은 자연히 느려졌다. 우리는 천천히 걸으며 주변의 풍경에 매료되어 갔다.
멀지 않은 언덕 위로 엘리자베타 산장이 나타났다. 산장이라기보다 작은 성채 같았다. 골짜기 위에 고요히 앉아, 오는 자와 가는 자를 묵묵히 바라보고 있는 듯했다. 산장 앞에서 한국인 가이드를 만났다. 여기서 꾸르마예르를 가려고 하는데 어떻게 갈 수 있느냐는 질문에, 그는 대답했다.
“비자일레에서 차를 타면 돼요.”
그들에겐 전용 차량이 있었지만, 우린 사정이 다르다. 그는 마을에 가면 일반 버스도 온다고 했다. 그 말이 마치 오늘 일정을 잘 마무리할 열쇠처럼 느껴졌다. 우리는 곧 갈림길에 도착했다. TMB의 공식 루트는 오른쪽으로, 메종 마을을 지나 꾸르마예르까지 이어지는 산능선을 따르는 길이다.
왼쪽은 비자일레 마을로 향하는 길. 그곳에서 버스를 타면 꾸르마예르까지 갈 수 있다. 오늘 밤은 꾸르마예르의 호텔이 기다리고 있었기에, 우리는 왼쪽을 택했다.
비자일레 마을에 도착하니 근처에 슈퍼가 있었다. 슈퍼에 들러 맥주를 사서 돌담 아래에 앉았다. 시원한 맥주 한 캔을 마시면서 버스가 오기를 기다렸다. 4시 40분, 버스가 도착했다. 꾸르마예르까지는 20여 분 남짓 걸렸다. 창밖으로 빠르게 사라지는 들판을 보며, 왠지 모를 아쉬운 생각이 들었다.
꾸르마예르는 산악 도시로서 규모가 작지 않았다. 도시라는 단어가 어울릴 만큼 정돈된 풍경과 붐비는 골목, 상점과 레스토랑. 호텔을 찾아 체크인했다. 하얀 침대 시트가 깨끗이 정돈되어 있었다.
이탈리아에서의 첫 저녁 식사는 피자와 또 다른 요리였다. 음식에 많은 기대를 했는데, 조금 먹다 보니 짜다는 말이 절로 튀어나왔다. 안해는 눈살을 찌푸렸다.
“이 좋은 분위기에서 음식 타령 좀 하지 마.”
나는 말없이 고개를 숙였다. 내 입맛이 유별난 것인지. 알 수 없다. 하지만 먹기 힘들 만큼 짜지는 않았는데 짜다고 말하는 나의 음식타령이 듣기 싫었던 모양이다.
식사를 마치고 호텔로 돌아와 휴대폰 등의 충전을 하려 했지만, 어댑터가 맞지 않았다. 프런트에도 여분은 없다고 했다. 결국 충전은 포기해야 했다.
충전을 할 수 없는 아쉬움은 있지만, 오늘은 텐트가 아닌 침대에서 자는 날이었다. 야영의 추위와 고개의 바람, 멈출 수 없던 다리의 피로가 그 하얀 침대 속에서 사라져 갔다.
오늘 우리는 프랑스에서 이탈리아로 국경을 넘었다. 계획은 일부 수정되었지만, 다행히 예약한 호텔에 숙박을 했다. 길은 어긋났지만, 우리의 트레킹 계획은 계속 이어지고 있었다. 다음 고개는 이탈리아를 지나 스위스로 넘어가는 일정이 기다리고 있다. 걷는다는 것이 무엇보다 소중하게 생각되는 하루였다.
<사피유 야영장 – 모테 산장 – 세뉴 고개 – 엘리자베타 산장 – 비자일레 – 꾸르마예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