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베르토네, 눈 앞에 나타난 몽블랑

8월 7일

by 오시리스 김일번



쿠르마예르의 아침은 여전히 젖어 있었다. 밤새 내리던 비는 멈출 기색도 없이 회색 하늘을 적시고 있었다. 바깥세상은 조용했고, 사람들의 그림자도, 일상의 소리도 들리지 않았다.


우리는 오랫동안 창밖을 바라보았다. 떠나야 한다는 것을 알고 있지만, 비는 우리의 발목을 붙잡았다. 걷기로 예정된 하루, 그러나 비 오는 날의 산행은 늘 각오가 필요했다. 방수 재킷과 비옷, 커버를 단단히 챙기고 나서도, 출발은 한참을 망설였다.


결국 정면으로 맞서기로 했다. 더는 시간을 미룰 수 없었다. 비를 맞으며 젖은 도시의 돌길을 걸었다. 안 해와 나는 광장으로 나갔다. 바닥의 빗물, 회색 하늘, 그리고 멈추지 않는 빗소리, 그 속을 우리는 천천히, 조심스럽게 걸었다.


그때, 낯선 광장 한가운데서 누군가 우리를 부르는 것 같았다. 사피유 야영장에서 옆에 텐트를 쳤던 베르사유 커플이었다. 반가움은 이내 묘한 동지애로 변해갔다. 그들 역시 보기에도 안쓰러울 정도로 비에 흠뻑 젖어 있었다.


그들은 메종 마을에서 하룻밤을 지낸 뒤, 아침 일찍 비를 맞으며 쿠르마예르로 내려왔다고 했다. 우리도 호텔 예약이 없었다면 같은 길을 걸었을 것이다. 어긋난 계획 속에서 다시 만난 이 인연이, 왠지 오늘의 여정에 힘을 더해주는 듯했다.


그들과 함께 슈퍼를 찾았다. 앞으로 며칠간의 식량을 준비해야 했다. 빵과 과일, 간식거리, 그리고 약간의 와인과 위스키까지. 내가 술을 고르자 안해는 못마땅한 눈빛을 보냈다.


낯선 곳에서 술을 마시는 게 불안하다는 안해의 마음은 이해했지만, 하루 끝의 피로를 달래는 한 잔의 위로를 포기하기는 어려웠다. 우리는 티격태격 장바구니를 채우고, 다시 길을 나섰다.


베르사유 커플은 먼저 출발했고, 우리도 준비를 마치고 베르토네 산장을 향해 길을 나섰다. 비는 여전히 내리고 있었다. 산으로 오르는 발걸음은 물에 잠긴 듯 무거웠다. 돌계단 사이로 흐르는 빗물은 이미 작은 실개천이 되어 있었다.


곧 등산길을 가리키는 이정표가 나타나고 곧이어 산길이 시작되었다. 숲길로 들어서자 나뭇잎에 맺힌 물방울이 이따금 얼굴과 어깨에 쏟아졌다. 비와 땀으로 온몸이 젖어갔다. 걸음을 멈추면 몸이 추워지기 때문에 우리는 멈추지 않고 계속 걸어야 했다.


슈퍼에서의 작은 언쟁 때문일까, 안 해는 말없이 뒤를 따랐다. 뒤돌아보면 안해는 무표정한 얼굴로 조용히 뒤를 따라오고 있었다. 나는 걷는 동안 머릿속은 복잡했다. 이 상황을 어떻게 끝낼 수 있을까. 이 비는 언제쯤 그칠까. 오늘 밤 우리는 어디서 자게 될까. 이런저런 생각을 하며 걸었다.


산장이 가까워졌다는 이정표가 나타났을 때, 문득 앞서 걷던 한 남자가 눈에 들어왔다. 그는 우크라이나에서 왔다고 하며 이름은 알렉스라고 하였다. 그는 비를 맞으며 혼자 걷고 있었다. 우리와 눈이 마주치자 간단한 눈인사를 나누었다.


드디어 산장이 모습을 드러냈다. 산장의 따뜻한 실내를 향해 발걸음을 재촉했다. 문을 열고 들어서자, 젖은 옷과 습기를 털어내는 따스한 공기가 우리를 감쌌다. 그 안에, 베르사유 커플이 먼저 도착해 있었다. 그들은 웃으며 우리에게 손을 흔들었다.

따뜻한 커피 한잔이 온몸을 데우는 듯했다. 이제 비를 맞지 않아도 된다는 안도감과 함께 무언의 평화를 찾아왔다. 우리의 안도감과 달리 프랑스 커플은 오늘 이 비를 뚫고 보나티 산장까지 가겠다고 한다.

그들은 우리에게 여기서부터 보나티까지는 산장이 없다고 하면서, 우리에게 이곳 산장에 남은 침대가 하나 있다고 알려주었다. 하지만 우리는 아직 오늘 밤을 어디서 보낼지 정하지 못했다. 이곳 산장에서 머무를 수도 있지만, 시간이 많아 남아 있어 그러고 싶지는 않았다.

산장에서 물 4리터를 수낭에 채워 다시 길을 나섰다. 하늘은 여전히 구름 속이었지만, 빗줄기는 현저히 가늘어졌다. 베르토네 산장을 뒤로하고 오르막을 지나 사핀고개 갈림길에 도착했다. 사핀고개의 풍경은 우리를 잠시 멈춰 세웠다. 멀리 흐릿하게 보이는 몽블랑의 봉우리들, 구름 사이로 언뜻 암릉과 빙하가 보였다.


능선을 따라가면 조망이 좋다고 했지만, 우리는 부드럽게 이어진 사면 길을 택했다. 사면길은 경사가 완만하고, 시야는 탁 트여있어 좋았다. 풍경을 감상하며 걷다 보니, 오른편으로 낮은 구릉지대가 열렸다. 길에서 살짝 벗어난 그 언덕은 사람의 눈에 잘 띄지 않으면서도, 풍경을 한눈에 담을 수 있는 멋진 곳이었다.


여기다. 오늘 하루를 끝낼 장소가 바로 여기라고 생각했다. 다행히 이제 비는 그쳤다. 우리는 배낭을 내리고 짐을 풀었다. 먼저 조망이 멋진 곳에 텐트를 쳤다. 젖은 풀 위에 텐트를 고정시키는 동안, 주변의 풍경은 황홀하게 변해갔다.


그때, 뒤편에서 인기척이 들렸다. 알렉스였다. 베르토네 산장을 오르면서 만난 그도 이곳에서 하루를 지내려고 한다는 것이다. 알렉스는 우리 텐트로부터 약 50미터 떨어진 곳에 텐트를 치기 시작했다. 이 고요한 풍경 속에 함께 머무는 누군가의 존재는 묘한 위안을 안겨주었다.


마침내 구름 사이로 산이 모습을 드러냈다. 눈부시게 하얀 몽블랑이 손에 잡힐 듯 가까이에 있었다. 오늘 하루 종일 숨어 있다가 이제야 얼굴을 보여주는 것만 같았다.


광활한 계곡 위로 흘러가는 구름들 사이로, 몽블랑과 주변 봉우리들, 능선과 절벽, 바위와 빙하가 너무나도 잘 어울렸다. 카메라의 셔터를 누루고 또 눌렀다. 그러나 어떤 프레임도 이 감동적은 풍경을 온전히 담을 수는 없었다.


어쩌면 이 하루는, 이 장면을 위해 준비된 것일지도 몰랐다. 비에 젖고, 마음을 무겁게 했던 그 모든 시간이, 이 순간의 찬란함을 위한 전조였을지도. 오늘의 풍경은 시간이 흘러도 잊지 못할 것이다. 궂은 날씨에도 불구하고 묵묵히 걷는 이들이 마주할 수 있는 축복. 오늘은 그런 날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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