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월 8일
이른 아침, 야영지의 풀잎 위에는 이슬이 맺혀 있었다. 어제 저녁 무렵, 몽블랑의 봉우리가 모습을 드러낸 이후, 하늘은 더 이상 비를 뿌리지 않았다. 밤새 찬 공기가 텐트를 스쳐 지나갔고, 새벽이 밝아오자 침봉들이 제 모습을 드러냈다. 세상은 다시 깨어나고 있었다.
우리는 고요한 정적 속에서 텐트를 정리하기 시작했다. 몽블랑의 풍경은 강렬하게 다가왔고, 어제의 피로가 신기하게도 그 풍경 속에서 녹아 내린 듯했다. 해는 능선을 따라 미끄러지듯 내려와 초원에 긴 그림자를 드리웠고, 우리는 그 길 위를 있었다.
우리가 걷는 길은 초록이었다. 푹신한 잔디와 부드럽게 경사진 사면길. 어제의 빗 길과는 달리, 오늘의 길은 포근하고 상큼했다. 왼쪽으로 우뚝 솟은 몽블랑과 그 옆으로 거칠고 뾰족한 그랑드조라스 침봉군이 숨을 멎게 할 듯 솟아 있었다. 험준한 절벽과 빙하의 모습이 손에 잡힐 듯 가까웠다.
그러나 우리가 걷는 이 길은 맞은 편 침봉과 달리 초원의 부드러움을 품고 있었다. 바위와 꽃, 하늘과 풀, 자연의 거친 것들과 섬세한 것들이 공존하는 묘하게 대비되는 그런 풍경이었다.
산길 중간, 염소 떼가 우리의 진로를 가로막았다. 혹시라도 위협을 느낄까 멈칫했지만, 녀석들은 우리에게 관심없이 풀을 뜯기만 했다. 우리는 조용히 옆으로 비켜 길을 계속 이어갔다.
아르미나즈(Arminaz)에 이르자 작은 목교가 모습을 드러냈다. 짧은 다리를 건너자, 곧 보나티 산장(Rifugio Bonatti)이 나타났다. 이탈리아의 산악인 월터 보나티의 이름을 딴 산장이다. 산장은 그랑드조라스 바로 앞, 드넓은 초원 위에 자리를 잡고 있었다. 산장에 도착하여 우리는 그늘진 테라스에 자리를 잡고서 커피를 마시고 맞은 편 그랑드조라스를 감상했다.
잠시 후, 산장 안으로 동양인 등산객 무리가 들어왔다. 한국인들이었다. 산장지기의 말로는 10년 전까지만 해도 일본인들이 많이 오더니 최근 몇 년 사이엔 한국인들이 많이 찾는다고 한다.
산장에서의 달콤한 휴식을 마치고 배낭을 다시 멨다. 보나티의 이름을 뒤로하고, 완만한 내리막을 따라 Arnouva(아르누바)로 향했다. 초록의 골짜기를 따라 내려가자 멀리 산장과 함께 작은 식당이 나타났다. 생각보다 많은 사람들이 붐비고 있었다. 우리도 그곳으로 들어가 식사를 하기로 했다.
식당에 들어서긴 했는데, 메뉴판을 보니 낯선 메뉴만 가득했다. 메뉴 선택이 어려워 종업원에게 추천을 받았다. 그가 추천한 메뉴는 사슴고기 스튜와 노란 옥수수 죽 같은 전통 요리였다. 추천 메뉴로 주문하고 기다리자 음식이 서빙되었다.
사슴고기 스튜는 한 입 먹어보니 의외로 부드럽고 감칠맛이 났다. 옥수수죽도 고소하고 달콤했다. 몸이 필요로 했던 에너지가 채워지는 느낌이었다. 허기진 배를 채우고 디저트와 커피까지 곁들여, 오랜만에 여유로운 식사를 즐겼다. 이런 식당은 트레킹코스에서 보석같은 존재다.
식당을 나서며, 오늘 밤 우리는 페렛 고개에서 야영을 해야 한다는 것을 다시 떠올렸다. 엘레나 산장까지는 완만한 오르막이 이어졌고, 그곳에서 식수를 확보하는 것이 오늘 남은 과제중 하나였다.
엘레나 산장은 평평한 고원 위에 있었다. 산장엔 ‘야영금지’라는 문구가 팻말로 새겨져 있었다. 우리는 콜라 한 캔으로 숨을 고르고, 식수 4리터를 배낭에 채웠다. 물 무게만으로도 어깨가 무거워졌다. 본격적인 오르막이 시작되었고, 경사는 가팔랐다.
페렛 고개(Col de Ferret)로 오르는 길은 오늘 하루의 산행 중 가장 힘든 구간이었다. 굽이진 길을 따라 올라가며 아래를 내려다보니 지나온 협곡이 장대한 모습을 드러냈다. 겹겹이 겹쳐진 절벽과 계곡, 그 위를 비추는 햇살이 극적인 명암을 만들고 있었다.
숨이 가빠지고, 걸음이 느려졌다. 그러나 멈추지는 않았다. 걷는다는 건 결국 그 끝이 있다는 걸 알기에 무심히 오른다. 드디어, 페렛 고개에 도착했다. 고개까지는 이탈리아이고 그 너머에는 스위스 땅이 펼쳐져 있었다.
우리보다 먼저 도착한 알렉스가 반갑게 손을 흔들었다. 그는 우리와 함께 전날 야영을 했었고, 오늘 이곳에서 함께 야영을 하게될 것이라고 생각했던 것이다. 그는 자신의 텐트 옆에 자리를 비워 두었다며, 가까운 친구처럼 우리를 맞아 주었다.
우리는 그가 마련한 공간에 텐트를 치고, 간단히 식사를 준비를 했다. 저녁이 빠르게 몰려오고 있었다. 조용히 앉아 ‘개와 늑대의 시간’이라 불리는, 낮과 밤의 경계가가 되는 그 순간의 미묘한 풍경을 기다렸다. 능선 너머로 해가 너머가고, 하늘은 분홍빛과 주황빛이 뒤섞여 있었다. 그렇게 서서히 어둠이 내려앉았다.
스위스와 이탈리아의 경계. 말이 국경이지, 자연은 그 어디에서도 나뉘지 않았다. 우리가 있는 이 작은 고개는 그저 지나온 하루를 감싸안는 풍경 속의 무대였다. 이렇게 또 하루가 지나갔다. 불빛도 전기도 없는 고개 위에서, 거대한 침묵과 절경을 마주하며 오늘 하루를 마무리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