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라풀리, 쉼과 여유를 만난 보석 같은 휴식처

8월 9일

by 오시리스 김일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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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른 아침, 풀잎마다 밤새 내린 이슬이 촘촘히 맺혀 있었다. 어젯밤 보았던 눈 덮인 하얀 능선은 구름 한 점 없는 하늘 아래 그대로였다. 우리는 그 곁에서 조용히 아침을 준비했다. 차가운 공기가 아직 텐트에 배어 있었지만, 햇살이 능선을 타고 텐트를 비추자, 세상은 다시 깨어나고 있었다.


식사를 마치고 텐트를 걷으며 우리는 오늘 마음이 조금 가벼웠다. 오늘은 긴 거리를 가지 않아도 되는 날이기 때문이었다. 상페까지 가볼까도 했지만, 무리일 것 같았다. 라풀리 야영장이 좋다는 이야기를 여러 번 들었던 터라, 한번 가보고 싶기도 했고, 오늘은 그곳에서 멈추기로 했다.


페렛 고개는 스위스와 이탈리아를 나누는 국경이다. 국경이라고 해봐야 경계선 하나 없는 능선이다. 산과 산 사이 고개를 넘어서는 곳이다.


우리는 알렉스보다 먼저 출발했다. 그의 텐트 앞에서 손을 흔들며 저녁에 보자고 말은 못 했지만, 그런 내용의 인사를 나누고, 스위스로 향했다.


아침을 든든히 먹고 나선 길은 상쾌했다. 고개를 넘자 바람은 잦아들었고, 공기는 부드러웠다. 빙하에서 녹아 흐르는 물줄기가 길옆으로 졸졸 흐르고, 풀밭에는 야생화들이 작은 색으로 말을 걸어왔다. 고개 하나를 넘었을 뿐인데, 이렇게 풍경이 달라질 수 있구나. 스위스의 초록은 유난히도 부드럽고 다정했다.


초원의 길을 내려오고 있을 때, 양 떼들이 길을 막고 섰다. 덩치 큰 숫양들이 어린양들 사이사이에서 경계를 서며 우리를 바라보고 있었다. 혹시 우리에게 달려들까 멈칫했지만, 녀석들은 고개만 끄덕이고 다시 풀을 뜯었다. 우리는 천천히 그 옆을 지나쳤다.


길옆에는 온갖 야생화들이 피어 있었고, 공기에는 풀과 꽃 냄새가 섞여 있었다. 오늘의 길은 부드럽고 한적했다. 발걸음은 가벼웠고, 가끔씩 서로의 얼굴을 바라보며 웃었다. 비로소 걷는다는 것이 주는 단순한 기쁨과 자연 속 해방감을 온몸으로 느낄 수 있었다.


능선 아래로 내려서자 조그마한 가게가 하나 나타났다. 라풀라였다. 작고 소박한 가게 앞에서 주스를 한 잔씩 마셨다. 잠시의 휴식이었지만, 평온한 아침에 어울리는 곳이었다. 물을 보충하고 다시 길을 나섰다.


스위스 구간에 들어선 뒤로는 한국인을 거의 보지 못했다. 길 위에서 만나는 동양인은 대부분 일본인과 중국인이었다. 아마 이 구간은 인기 구간이 아니어서일 것이다. 프랑스 사람들은 나이가 많든 적든, 부부이든 연인이든, 함께 걸었다. 가벼운 배낭을 메고 손을 잡고 걷는 그들의 모습은, 우리가 잊고 있던 중요한 무언가를 떠올리게 했다.


우리는 그들과 마주치면 짧게 눈을 마주치며 인사를 나눴다. 트레킹을 즐기는 그들의 모습이 부럽게 느껴졌다. 곧 도로가 나타났고, 작은 시골 마을이 길을 따라 이어졌다. 창가마다 꽃이 피어 있었고, 울타리는 단정하게 정돈되어 있었다. 전원주택 하나하나가 정성을 들여 가꿔 아름다웠다.


적당한 그늘을 찾아 앉아 간식을 꺼냈다. 그늘에서는 서늘한 바람이 불어왔고, 햇볕 아래로 나오면 금세 강렬한 햇살이 내려앉았다. 그 두 가지가 함께 있는 적당한 자리에서 잠시 쉬었다가 다시 걸었다.


얼마 지나지 않아, 오늘의 목적지인 라풀리 야영장에 도착했다. 아직 이른 시각이라 좋은 자리를 배정받았다. 텐트를 치고, 샤워를 하고, 젖은 옷을 빨아 널었다. 햇볕이 옷을 빠르게 말려주었다. 그리고 우리는 마을 구경에 나섰다.


야영장 근처에는 제법 큰 슈퍼가 있었다. 저녁 식사를 위해 맥주 한 캔과 함께 고기를 샀다. 텐트로 돌아와 저녁 준비를 하는 동안, 알렉스도 도착했다. 알렉스는 우리와 조금 떨어진 곳에 자리를 잡았다.


그때, 라 꽁타민에서 만났던 노부부 트레커가 우리에게 다가왔다. 반갑게 인사를 나누며, 서로 어떤 길을 걸어왔는지 지도를 펼쳐 확인했다. 그들은 정규 루트가 아닌, 자신들만의 루트를 정해 산을 넘어왔다고 했다. 자신들만의 속도로, 자신들만의 방식으로 트레킹을 즐기는 모습이 인상적이었다.


고기를 구워 알렉스에게 함께 먹자고 권했지만, 그는 조용히 웃으며 고개를 저었다. 언어 때문이었을까, 아니면 혼자만의 시간이 필요했을까. 함께 식사를 하지 못했지만 그가 우리 옆에 있다는 것만으로도 충분히 좋았다.


어느새 저녁이 찾아왔다. 하늘에서는 별빛이 하나둘 떠올랐고, 야영장에는 작은 불빛들이 반짝이기 시작했다. 하루의 마무리로는 더할 나위 없는 밤이었다. 따뜻한 식사와 샤워, 그리고 산들산들 불어오는 바람 속에서, 오늘 하루가 또 무사히 지나갔음을 감사하며, 우리는 잠들 준비를 했다.


오늘은 그렇게, 편안한 쉼과 여유가 깃든 하루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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