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월 10일
밤부터 비가 텐트 위를 두드렸다. 한참을 자다 깼을 때도, 빗소리는 그치지 않았다. 일기예보에 따르면 오늘 하루 종일 비가 이어질 거라고 했다. 그래도 오늘 걸어야 할 길은 TMB 전체 코스 중 가장 쉬운 구간이라는 말을 들었기에 큰 걱정 없이 준비를 시작했다.
라풀리 야영장 근처 슈퍼에 들러 우의를 하나 구입했다. 고어 쟈킷만으로는 비를 막기에 부족하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비에 상체가 젖으면 바람에 쉽게 추위를 느끼기 때문에, 비옷을 덧입기로 했다. 안해에게 쟈켓 위에 비옷을 덧 입히자 안도하는 듯 미소 지었다. 우리는 짐을 정리하고 조용히 길을 나섰다.
비는 여전히 내리고 있었지만, 어제 하루를 푹 쉰 덕에 몸과 마음은 가벼웠다. 초입의 길은 안개가 자욱했다. 도로를 따라 걷다가 계곡 옆 산책길로 들어섰다. 주변은 안개에 둘러싸여 있었고, 젖은 흙냄새가 짙었다. 한동안은 바람도 없고, 사람도 없는 고요한 산길이었다.
시간이 지나면서 빗방울이 가늘어졌고, 몸에 열이 오르기 시작하면서 더운 느낌이 들어 비옷을 벗었다. 길은 점점 가파른 사면을 따라 이어졌고, 안개가 걷히면서 숨겨진 계곡의 풍경이 드러나기 시작했다.
우리가 걷는 길의 풍경을 감상할 수 있을 즈음, 풍경이 좋은 곳에서 자리를 잡고 쉬면서 간식을 하기로 했다.
간식은 어제 미리 삶아둔 계란이다. 껍질이 유난히 단단했다. 껍질이 단단한 것은 닭들이 건강하기 때문이 아닌가 생각했다. 슈퍼에서 산 계란이 이 정도의 품질이면, 앞으로 간식은 계란으로 해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길은 조금씩 스위스의 시골 마을로 이어졌다. 넓은 정원과 작은 주택들, 정갈한 울타리, 꽃으로 장식된 창가가 보이기 시작했다. Praz-de-Fort라는 마을에서 점심을 먹기로 했다. 마을의 골목 안 식당 간판을 따라 들어서니 작은 피자집이 나타났다.
식당을 들어서자 마침 아이들의 생일잔치가 한창이었다. 우리는 그들 옆에 조용히 자리를 잡고, 피자 한 판을 주문했다. 주인은 아주 친절했고, 우리가 주문한 피자는 이탈리아에서 먹었던 피자보다 훨씬 더 맛있었다. 피자를 남김없이 다 먹고, 그들의 생일도 함께 축하해 주었다.
식사를 마치고 마을을 벗어나자 들판이 열렸다. 그 너머로 한 무리의 학생들이 줄지어 걷고 있었다. 고등학생쯤 되어 보였는데, 배낭에 옷가지며 매트리스를 매달고 즐겁게 걷는 모습이 보기 좋았다. 학생들도 TMB코스를 가는 것 같았다.
그들의 재잘대는 소리는 한동안 우리 걸음에도 경쾌한 리듬을 불어넣었다. 햇살 좋은 곳에 벤처가 나타나 쉬었다 가기로 했다. 우리는 벤처에서 잠시 쉬면서 시골 풍경을 감상했다.
샹페로 이어지는 길은 생각보다 힘에 부쳤다. ‘가장 쉬운 구간’이라는 말은, 어떤 의미였는지 모르겠다. 걸을수록 지쳐갔다. 상페 호수가 고도가 낮은 곳에 있을 것으로 생각했는데, 길은 자꾸 산 위로 향했다.
산비탈을 돌아 오르던 중, 암벽등반 구간을 지나자 멀리 Champex-Lac이라는 이정표가 보였다. ‘Lac’이 호수라는 뜻인 줄 알기에, 이제 거의 다 왔구나 생각했다.
그리고 얼마 지나지 않아 눈앞에 호수가 나타났다. 낚시를 하는 사람들이 보였고, 사진을 찍는 사람들이 보였다. 호숫가 풍경은 그 자체로 조용한 휴양지처럼 느껴졌다.
호수를 따라 조금 더 걸으니, 오늘의 최종 목적지인 샹페 야영장이 나타났다. 야영장에 들어서자 반가운 얼굴이 기다리고 있었다. 알렉스였다. 우리보다 먼저 도착해 텐트를 쳐놓고 있었다. 우리는 자연스럽게 그의 옆자리에 텐트를 쳤다.
샤워를 하고 간단히 옷을 정리한 후, 근처 슈퍼에 가보았지만 이미 문이 닫힌 뒤였다. 6시 30분에 문을 닫는다고 한다. 우리가 도착한 건 딱 10분쯤 늦은 시간이었다. 하는 수 없이 야영장에서 맥주와 스낵 몇 가지를 사고, 남아 있던 음식으로 저녁을 해결하기로 했다.
야영장에서 한국인으로 보이는 한 청년에게 인사를 했는데, 그는 중국인이었다. 라풀리에서는 몇몇 한국인을 만났는데, 여기까지 온 한국인들은 없는 것 같았다.
돌이켜보면, 오늘 하루는 생각보다 길었던 것 같다. 쉽게 생각했지만, Champex-Lac이 이렇게 고지대에 있을 줄 생각하지 못했다. 은근히 계속되는 오르막이 사람을 지치게 하는 구간이었다.
비와 안개 자욱한 길을 걷기 시작했지만, 점차 비가 그치면서 주위의 멋진 풍경을 볼 수 있었고, 맛있는 피자와 훈훈한 생일잔치를 경험한 하루였다.
샹페의 밤은 조용했지만, 만족스럽고 행복한 하루였다는 생각이 들었다. 이제 우리도 잠자리에 든다. 빗속에서 시작된 하루가 평온한 밤으로 이어지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