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월 11일
오랜만에 깊이 잔 것 같았다. 아침 햇살이 더없이 정겹게 느껴졌다. 텐트 밖으로 나서자, 어제의 빗 자락은 온데간데없고 하늘엔 구름 한 점 없는 맑은 날씨였다.
우리는 출발 준비를 마치고 어제 마감 이후 헛걸음했던 슈퍼에 다시 들렀다. 오늘 일용할 간식거리와 식수, 그리고 샌드위치를 챙겨 배낭에 넣었다.
오늘은 보바인 산장을 지나, 르푸티(Le Peuty) 야영장까지 가야 하는 날이다. 야영장에서 출발 전에 알렉스와 그곳에서 다시 만나기로 했었다. 조금 뒤, 알렉스는 우리보다 먼저 출발했다. 우리는 그보다 조금 늦게 출발했다.
안해는 어제 늦게 도착하여 제대로 보지 못한 샹페호수를 다시 가보고 싶다고 했다. 그런데, 나는 오늘 가야 할 길이 빠듯하다고 생각되어 "오늘 일정이 좀 빠듯하니까 그냥 가자."라고 말했다.
그 말 이후, 안해의 얼굴이 금세 어두워졌다. 말없이 묵묵히 내 뒤를 따르는 안해의 모습이 왠지 낯설었다. 잠깐 호수를 돌아보아도 되는 것을 내가 왜 그랬을까 하는 후회가 몰려왔다.
우리는 말없이 조금 떨어져 걷기 시작했다. 스위스의 고요한 시골 마을이 눈앞에 펼쳐졌다. 담쟁이가 담을 타고 오르고, 창가에는 형형색색의 꽃들로 장식되어 있었다. 이곳의 풍경은 자연과 조화를 이루고 있어 정겹게 느껴졌다.
뚜르 드 몽블랑 스위스 구간은 프랑스나 이탈리아에 비해 좀 더 유순하고 단정한 인상을 주었다. 둘레길처럼 부드러운 능선과 고즈넉한 숲길이 계속 이어졌다.
시냇물 따라 걷던 길 끝에서, 투명하게 흐르는 계곡물이 길을 가로막았다. 잠시 짐을 내려놓고 쉬어 가기로 했다. 쉬는 김에 등산화도 벗었다.
차가운 물에 발을 담그는 순간, 짜릿한 시원함이 온몸으로 퍼졌다. 나와 안해는 순간 동시에 환한 미소가 번졌다. 시원한 물이 발끝부터 심장까지 전해지며 기분을 일순간 전환시켰다.
"기분 좀 나아졌어?"내가 물었다. 안해는 이제야 살며시 미소를 지었다. 별일 아닌 일로 마음이 상해 있었기에, 시원한 계곡 물에 상했던 마음이 씻겨 내려간 듯했다.
슈퍼에서 사 온 샌드위치를 먹기로 했다. 계란을 반으로 나누고, 샌드위치를 한입 베어 물었다. 바삭한 빵 사이로 상추와 치즈가 씹혔다. 시장한 탓인지 무엇보다 맛났다.
식사를 마친 뒤, 즐거운 마음으로 산행을 나섰다. 이윽고, 보바인 산장이 초록의 능선 사이로 모습을 드러냈다. 산장은 목초지 한가운데, 소박한 목조 건물로 지어져 있었다.
맥주를 시켰고, 진열대에 놓인 사과파이가 유난히 맛있어 보여 주문했다. 사과파이는 직접 만들었다고 하는데 생긴 것보다 훨씬 맛있었다. 맥주와 사과파이, 그리고 멋진 알프스의 풍경이 그냥 좋았다. 우리는 이곳저곳 사진을 찍고 한참을 쉬었다.
산장을 떠나며 다시 산길로 접어들었다. 숲길 주변엔 야생 블루베리가 지천에 널려 있었다. 우리는 손에 닿는 블루베리를 따먹으며 천천히 걸었다. 새콤달콤한 맛이 입안 가득 퍼졌고, 걸음은 한결 가벼워졌다.
산의 날씨는 언제나 변덕스러웠다. 갑자기 짙은 구름이 몰려오더니, 하늘이 어두워지기 시작했다. 걸음을 재촉해 포클라즈(Fôclaz) 고개에 도착했지만, 르푸티(Le Peuty)까지는 30분 이상을 더 가야 하는 거리다.
안해는 이미 상당히 지쳐 있었고, 빗방울도 점점 굵어지고 있었다. 지금쯤 알렉스는 르푸티 야영장에서 우리를 기다리고 있을 것이다.
지금 상황에서 안해에게 라프티 야영장까지 가자는 말을 할 수 없었다. 만약, 그럴 경우 또다시 냉전으로 돌아갈 것 같았다. 나는 안해에게 오늘은 여기서 멈추자고 말했다.
폴크라즈에는 작은 호텔에서 운영하는 조그만 야영장이 있었고, 다행히 빈자리가 있었다. 야영장에서 텐트를 치고 있으니, 샹페에서 보았던 중국인 커플이 나타났다. 그들도 이곳에 머물기로 한 듯했다.
나는 안해에게 급할 것 없으니, 일정에 얽매이지 말고 즐기면서 트레킹을 하자고 했다. 호텔 매점에서 구입한 와인으로 건배를 나누며, 몸과 마음의 긴장을 풀었다. 폴크라즈의 밤은 그렇게 깊어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