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발므고개, 스위스를 넘어 다시 프랑스로

8월 12일

by 오시리스 김일번
발므고개


밤새 들려오던 빗소리는 아침이 되어도 멎지 않았다. 텐트 밖을 내다보니 희뿌연 회색빛 비가 야영장 주변을 뿌옇게 감싸고 있었다. 몽블랑을 도는 여정의 후반부로 접어들었지만, 산의 날씨는 여전히 제 멋대로였다. 준비를 마치고 출발할 채비를 갖추었으나, 차마 이 빗속을 뚫고 걷기란 선뜻 내키지 않았다.


바람은 텐트 위를 윙윙 때리며 예사롭지 않은 기세로 몰아쳤다. 결국 다시 호텔 건물 안으로 들어왔다. 하늘은 곧 내려앉을 듯 낮았고, 사람들은 로비와 식당 안에 삼삼오오 모여들었다. 비슷한 이유로 출발을 망설이는 트레커들이었다. 모두 저마다의 일정에 따라 같은 이유로 이곳에 머물고 있었다.


우리는 창밖을 바라보며 모닝커피 한 잔을 마셨다. 30분쯤 지났을까, 빗방울이 조금씩 잦아들기 시작했다. 떠날 수 있겠다는 용기가 솟아났다. 다시 배낭을 메고, 오늘의 길을 향해 나섰다. 트리앙 마을을 지나, 르푸티 마을에 도착했다.


어제 이곳까지 올 계획이었지만, 비와 예상보다 지체되어 예정대로 오지 못했던 곳이었다. 이제는 조용해진 야영장. 텅 빈 사이트에 텐트 하나 없었다. 우리보다 앞서 떠난 이들의 자취만이 남아 있었다.


그곳에서 다시 만난 반가운 얼굴이 있었다. 미국에 살다 영국으로 이주한 딸과 미국인 엄마. 며칠 전부터 앞서거니 뒤서거니 하며 마주쳤던 이들이었다. 눈짓으로 인사를 나누고, 그들은 먼저 발걸음을 옮겼다.


곧 본격적인 산길이 시작되었다. 산길로 접어들자 안해의 발걸음이 갑자기 더디어졌다. 어제 마신 와인이 문제였을까. 어깨를 감싸는 비와 바람, 그리고 여전히 회색인 하늘이 안해의 기분을 짓누르는 듯했다.


나는 자주 안해를 돌아보며 걸었다. 산행은 더 더디게 이어졌다. 점차 고도를 올릴수록 안개가 더욱 짙어졌다. 바람은 끊임없이 산 능선을 휘돌아 몰아쳤다.


아무리 여름이어도, 이정도 고도에선 바람이 불면 겨울처럼 추워진다. 허기가 느껴지기에 적당한 바위 위에 앉아 간식을 꺼낸다. 허기와 바람 앞에서도 입안으로 번지는 빵과 치즈, 그리고 과일의 향이 진하고 생생하게 느껴진다.


우리 옆 너른 공터에는 프랑스 대가족이 자리를 잡았다. 모두 비에 젖은 옷차림에도 웃음을 터트리며 빵과 음료수를 먹고 있었다. 어린아이들도 무용담을 나누는 것인지 서로 나누는 이야기가 흥겹고 정겨워 보였다.


다시 배낭을 메고 길을 나섰다. 발므 고개 오름길은 안개에 삼켜져 있었다. 좌우로 펼쳐졌을 풍경은 온통 짙은 회색 속에 감춰졌다. 아무것도 보이지 않는 산길을 우리는 서로의 호흡만을 느끼며 걸었다.


얼마나 올랐을까. 시야가 조금 트이자 회색 건물이 모습을 드러냈다. 발므산장이었다. 드디어 끝을 알수 없었던 세찬 바람이 몰아치는 산길이 끝난 것이다. 그 순간 안도감이 온 몸 깊숙이 스며들었다.


산장으로 들어가 따뜻한 커피부터 주문했다. 산장엔 바람을 피하기 위한 산행객들이 커피를 마시고 이야기를 나누고 있었다. 우리도 그들과 같이 커피를 마시며 젖은 옷을 말렸다. 바람을 피할 수 있는 공간이 너무나 소중하게 느껴졌다.


발므고개는 스위스와 프랑스를 가르는 경계다. 그렇게 다시, 우리는 스위스를 너머 프랑스로 돌아왔다. TMB의 마지막 고개를 넘었다는 생각에 기분이 묘하게 들떴다. 마치 한 바퀴를 돌아 처음의 자리로 돌아온 느낌이었다.


하산은 곤돌라는 타기로 하고 탑승구로 향했다. 갑작스레 등장한 기계 문명 앞에서 나는 조금 당황했고, 안내원의 주의 사항도 듣지 못하고 우리는 곤돌라에 탑승했다.


곤돌라는 허공을 가르며 산 아래로 급히 내려갔다. 안해는 불안했는지 미동도 없었다. 조금이라도 움직이면 뭔가 사고가 날 것 같은 느낌이라 도착할 때까지 지금 상태를 유지하려 했다. 절반 정도 내려와서는 케이블카로 갈아탔다. 케이블카는 벽과 지붕이 있는지라 편하게 내려왔다.


비에 젖은 몸, 흔들리는 곤돌라, 케이블카. 그 비바람 속에서 어느덧 케이블카는 르투어에 도착했다. 도착지에서 요금을 지불하고 밖으로 나오니, 산골 마을 길이 눈앞에 펼쳐졌다.


르투어에서 몽트룩을 걸으며 야영장을 찾아보았다. 한 야영장을 찾았지만 5시 이후에 체크인이 가능하다는 말에 다시 다른 곳을 찾아 보기로 했다. 또 다른 곳에 들어갔지만 안해는 마음에 들지 않아했다. 결국 다시 배낭을 메고, 야영장을 찾아 트레레샹 방향으로 걸음을 옮겼다.


그때였다. 반대편 산기슭에 야영장 표지가 하나 보였다. 표지판을 따라 좁은 오솔길을 따라 들어서자, 작고 아늑한 산장이 모습을 드러냈다. 이름은 보에르네(Boerne).


따뜻한 불빛이 새어 나오는 이 야영장은 그간의 여정 중 가장 마음에 드는 곳이었다. 작고 단정한 텐트 자리, 소박한 공용 공간, 무엇보다 저녁과 아침 식사가 가능한 것이 좋았다. 지금 식량이 거의 바닥나 있었기에 더욱 반가웠다.


저녁 식사 자리엔 낯선 이들과 함께 앉았다. 남프랑스에서 온 젊은 커플, 그리고 미국에서 온 청년 둘. 간단히 서로 자기소개를 하고, 각자의 여행 이야기를 나누었다.


따뜻한 닭고기 요리와 야채, 그리고 와인의 잔이 오갔다. 어색한 영어와 바디랭귀지를 섞은 말에도 귀를 기울여준 이들이 고마웠다.


식사를 마친 뒤 텐트로 돌아와 눕자, 오늘 하루가 파노라마처럼 스쳐갔다. 빗속에서 시작해, 능선을 넘고, 고개를 넘고, 마침내 편안한 쉼터에 이르기까지—이 길은 단지 걷는 것 이상의 의미가 있었다.


앞으로 이틀이면 여정이 끝난다. 그러나 내일은 가장 험난한 구간이 기다리고 있다. 나는 이 기분을 글로 남기려고 휴대폰에 간단히 느낌을 기록했다. 무사히, 이 여정을 마무리할 수 있기를 기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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