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월 13일
보에르네 산장의 아침은 상쾌했다. 어젯밤 야영장에 도착했을 때의 그 아늑함이 여전히 공기 속에 머물러 있는 듯 느껴졌다. 식사 전, 산장 주변을 가볍게 걸었다. 풀잎에는 이슬이 맺혀 있고, 시냇물은 분주했고, 공기는 촉촉했다.
산장 안은 식사 준비로 분주했다. 식당 안, 나무 테이블마다 예약한 사람들의 이름이 적혀 있었다. 우리도 이름을 찾아 자리에 앉았다.
빵과 커피, 콘플레이크와 과일. 식단은 간단했지만 충분했다. 든든히 식사를 마쳤다. 오늘은 락블랑으로 향하는 날이다. 오르막이 많은 험로가 이어질 것이기에 도시락도 하나 주문했다. 오늘 구간이 지금까지의 여정 중 가장 긴 구간이기도 했다.
식당에서 남프랑스에서 왔던 커플을 다시 마주쳤다. 그들은 플레제르(Flegère) 방향으로 바로 간다고 했다. 락블랑은 들르지 않느냐는 우리의 질문에, 일정이 빠듯하다며 고개를 저었다. 그제야 기억이 났다. 뚜르 드 몽블랑(TMB) 공식 루트엔 락블랑이 포함되지 않는다는 것을.
그래도 우린 락블랑 코스를 택했다. 다시 오기 어려운 길이었고, 락블랑이 그만큼 멋진 곳이라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안해에게는 락블랑이 TMB의 공식루트에는 포함되지 않는다는 말은 하지 않았다.
출발당시 산길에는 안개가 자욱했지만, 시간이 흐르자 서서히 안개가 걷히기 시작했다. 곧 사진에서 보던 암릉 구간이 눈앞에 모습을 드러냈다. 본격적 암릉 구간에 앞서 일단 간식으로 체력을 보충했다.
스틱을 접어 배낭에 넣고, 본격적인 암릉 오름에 들어섰다. 철계단으로 정비된 구간이었지만, 눈앞에 펼쳐진 수직의 바위들과 급경사 바위길은 어느 한 순간에도 긴장을 놓을 수 없었다.
안해는 겁이 난 듯 조심스레 한 걸음씩 발을 옮겼고 나는 그 곁을 지켰다. 천천히, 그리고 천천히. 그렇게 바위 하나, 계단 하나를 함께 넘으며 올라갔다.
어느새 돌탑이 나타나고, 작은 호수가 모습을 드러냈다. 순간 락블랑에 도착한 줄 알았다. 그러나 산장은 보이지 않았다. 또 다른 작은 호수들이 연이어 나타났다. 흐릿한 안개 속에서 길을 찾아 다시 위로 올랐다.
드디어, 락블랑 산장이 시야에 들어왔다. 고도 2,352m, 산장 옆으로는 차분히 펼쳐진 호수, 락블랑이 나타났다. 잔잔한 바람이 만들어내는 윤슬은 물고기의 비늘처럼 반짝거렸다. 그 풍경은 그간의 고된 발걸음의 노고를 충분히 보상해 줄만큼 아름다웠다. 락블랑을 마주보고 한참을 앉아 있었다.
산장으로 들어서자 익숙한 얼굴이 보였다. 보스턴에 사는 엄마와 런던에 사는 딸, 이전에도 몇 번 길 위에서 마주쳤던 이들이었다. 그들은 2년에 한 번 만나 함께 트레킹을 한다고 했다.
이번 여정이 끝나면 다음엔 페루의 마추피추로 갈 계획이라고 한다. 타국에서 반갑게 만난 두 모녀의 만남을 보면서 안쓰러운 감정과 부러운 감정이 교차했다.
우리는 다시 호숫가 바위에 앉아 준비한 도시락을 먹었다. 빵, 치즈, 사과 몇 조각이 도시락의 전부였지만, 락블랑을 마주하며 먹는 이 식사는 특별했다. 락블랑 주위에 텐트를 친 이들도 있었다. 이런 곳에서 하루를 보내는 것도 분명 멋진 추억으로 남을 것이다.
하산 길은 예상보다 순탄치 않았다. 플레제르 방향의 주 등산로가 공사 중으로 막혀 있었던 것이다. 우회로를 찾아 한참을 돌아가야 했다.
길을 따라 산허리를 돌았다. 다시 플레제르 이정표가 나타나고, 플레제르 산장이 멀리 보였다. 다가가 보니 산장은 폐쇄되어 있었다. 그제야 산장으로 향하는 길이 왜 막혀 있었는지 이해가 되었다.
식수라도 구하고자 산장을 이리저리 돌아다녔지만, 물 한 방울 구할 수 없었다. 할 수없이 길을 나서는데, 작은 계곡 몇 곳을 건너며 식수를 찾아 나아갔다. 식수를 구해야 야영을 할 수 있기에 물을 구하는 것이 급선무였다.
지도를 보니, 샤라론 부근에 큰 계곡 하나를 지나는데 그곳에서 물을 구할 수 있을 것 같았다. 샤라론 부근에 도착하여 계곡 아래쪽을 살펴보니 텐트 몇 동이 눈에 들어 왔다.
그곳으로 내려가 식수를 구할 곳을 물어보니 친절히 물길을 알려주었다. 우리는 마침내 식수를 확보했고, 그들 근처에 자리를 잡았다. 자리가 고르고 평탄하진 않았지만, 하루를 보내기엔 충분했다.
텐트 주위엔 야생 블루베리가 지천에 널려 있었다. 텐트를 설치한 뒤, 우리는 모자를 벗어 블루베리를 담았다. 금세 한가득 열매를 땄다.
불르베리를 한주먹 입안에 넣자 달콤하면서도 새콤한 맛이 입안 가득 번졌다. 아마도 그동안 부족했던 비타민이 온몸으로 스며드는 듯했다.
예상치 못한 곳에서 야영하게 되었지만, 식수도 구하고, 오늘 하루의 계획도 무사히 마칠 수 있어 다행이었다. 텐트 앞에 서서 고개를 들자, 구름 너머로 하얀 봉우리가 보였다.
오른쪽 가장 높은 곳이 몽블랑, 그리고 왼편 능선 아래로는 에귀디미디 전망대가 어렴풋이 보였다. 해가 지고 밤이 찾아오자, 기온이 뚝 떨어졌다. 손끝이 시릴 만큼 찬 밤이었다.
침낭 속으로 몸을 웅크리고 들어가 길었던 하루를 마감했다. 내일이면 TMB 트레킹이 끝난다고 생각하니 기쁨과 아쉬움이 묘하게 교차되는 밤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