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투르 드 몽블랑, TMB 마지막 날

8월 14일

by 오시리스 김일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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샤라론 계곡의 야영지는 평탄하지 않았다. 얇은 침낭 아래로는 울퉁불퉁한 땅의 형태가 고스란히 느껴졌고, 밤새 스며든 냉기가 천천히 등을 타고 몸속으로 들어왔다. 잠은 자꾸만 깼고, 온몸을 둥글게 말아가며 다시 잠들기를 여러 번. 그날 밤은 휴식의 시간이 아니라, 기다림과 인내의 시간이었다.


새벽녘, 텐트의 지퍼를 열기 위해 손을 뻗었을 때, 손끝에 닿은 천의 감촉이 이상했다. 축축했던 텐트 안쪽 벽면이 단단하게 얼어 있었다. 결로가 성에로 바뀐 것이었다. 한여름이라 믿기 어려운, 영하의 새벽. 하지만 이곳은 해발 2,000미터가 넘는 알프스였다.


텐트의 지퍼를 조심스레 열자, 숨이 멎을 듯한 풍경이 펼쳐졌다. 어제 하루 종일 시야를 가렸던 두터운 구름이 말끔히 걷히고, 하늘은 그 어느 때보다 깊고 맑았다. 해가 떠오르기 직전의 푸른빛, 그 선명한 쪽빛 아래로 알프스 산군이 찬란하게 모습을 드러내고 있었다.


왼편에는 몽 돌랑(Mont Dolent)의 능선이 자리했고, 오른편엔 거대하고 장엄한 그랑드조라스(Grandes Jorasses)가 마치 몽블랑의 파수꾼처럼 서 있었다. 그리고 그 중심엔 우뚝 솟아 있는 거대한 백색의 덩어리, 몽블랑(Mont Blanc)이 보였다. 눈앞의 풍경이 너무도 또렷해서, 꿈인지 생시인지 헷갈릴 정도였다.


그 광경 앞에선 더 이상 말이 필요하지 않았다. 밤새 뒤척이며 쌓였던 피로, 바닥에서 올라온 냉기, 설핏 들었던 두통까지 모두 그 한 순간에 사라졌다. 그저 바라보는 것만으로 충분했고, 충만했다. 알프스는 마지막 날 아침에야 비로소 그 진짜 얼굴을 보여준 것이었다.


우린 한참 동안 그 풍경을 가만히 바라보다가, 천천히 텐트를 걷었다. 아직 얼어 있는 텐트의 이음매의 성에를 손으로 털어가며 짐을 꾸렸다. 오늘은 이 긴 여정의 마지막 날이다. 브레방 전망대(Brévent)를 지나, 종착지인 레 우쉬(Les Houches)까지 내려가는 마지막 날이다.


산을 내려가는 날이지만, 오늘 아침의 발걸음은 유난히 가벼웠다. 오히려 새로운 길을 향해 출발하는 사람처럼 느껴질 만큼 상쾌했다. <안해>도 말이 없었다. 하지만 우리는 말하지 않아도 알았다. 오늘은 무언가 느낌이 다르다는 것을.


브레방을 향한 오름길은 다양한 풍경을 보여주었다. 돌길과 사면, 햇살과 그림자, 식은 땀과 희미한 바람. 능선을 따라가는 길의 굽이굽이마다 새로운 풍경이 펼쳐졌다.


우리는 자주 걸음을 멈추고, 지나온 길을 돌아보았다. 발아래로 샤모니 계곡이 점점 가까워졌고, 우리가 걸어온 알프스의 풍경들이 멀리 안개처럼 아련히 펼쳐졌다.


브레방 전망대에 도착했을 땐, 몇몇 하이커들과 관광객들이 자리를 잡고 있었다. 누군가는 망원렌즈를 통해 몽블랑을 담고 있었고, 누군가는 바위에 걸터앉아 맥주와 샌드위치를 먹고 있었다.


우리도 배낭을 내려놓고, 맥주를 한 병 샀다. 그리고, 몽블랑의 장엄한 풍경을 앞에 두고 맥주를 천천히 마셨다. 그때, 아래쪽 계곡을 향해 날아오르는 패러글라이더 눈에 들어왔다. 무지갯빛 패러슈트를 단 사람 하나가 바람을 타고, 우리가 내려갈 긴 능선을 한순간에 활강하고 있었다.


우리는 마지막 풍경을 가슴에 담고, 벨라샤 산장을 지나 하산을 시작했다. 숲길로 이어지는 내리막은 거칠었고, 돌이 많아 자칫 방심하면 미끄러질 수 있었다. 무릎엔 서서히 통증이 느껴지기 시작했다. 산은 마지막까지 우리를 쉽게 보내려 하지 않았다.


한참을 걸어 내려오던 길목에서 나무로 만든 작은 표지판 하나가 눈에 들어 왔다. ‘Les Houches’. 마지막 종착지의 이름이었다. 우리는 말없이 서로를 바라보았다. 짧지도, 길지도 않은 시선이 오갔다. 그리고 마침내, 조용히 배낭을 내려놓았다.


TMB, 뚜르 드 몽블랑. 12일간의 트레킹. 이 길은 단지 산을 도는 트레킹이 아니었다. 몸으로 걷고, 마음으로 듣고, 풍경과 감정이 동시에 교차하는 길이었다. 산은 때때로 우리에게 말을 걸어왔고, 우리는 산의 말없는 소리에 귀를 기울이며 몸으로 응답하며 걸었다.


<안해>와 함께한 12일간의 이번 트레킹은, 두 사람 사이의 소중한 어떤 것을 더 깊고 단단하게 만드는 시간이었다는 생각이 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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