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월 30일
새벽 공기가 창문 틈으로 스며들었다. 몸을 일으키기 전, 누워서 천장을 바라보며 오늘 하루를 상상해 본다. 오늘은 드디어 트레킹 첫 발을 내딛는 날이다. 어젯밤 늦게까지 가방을 열고 닫기를 반복했지만, 정작 필요한 게 뭔지는 발걸음을 떼봐야 알 것이다. 설렘과 긴장, 오래 품어온 기대와 막연한 두려움이 한데 엉켜 있다.
포카라의 아침은 잠에서 깨어난 높은 산의 숨결이 잔잔하게 퍼져 있는 듯했다. 한동안 한식을 먹을 일이 없을 것 같아, ‘산마루’라는 한국 식당을 찾았다. 문을 열자마자, 익숙한 된장 냄새가 우릴 반겼다. 2층 창가 자리, 창밖으로는 설산이 아침 햇살을 머금고 서 있었다. 네팔이라는 시간과 공간이 한순간 물러서고, 고향 집 밥상에 앉은 듯한 기분이 들었다.
된장찌개 한 숟가락을 뜨며, 창밖의 안나푸르나를 바라본다. 머릿속에서 여정의 첫 장이 펼쳐지기 시작했다. 식당 주인은 우리를 마치 오래 알고 지낸 사람처럼 친근하게 대했다. 숙소로 돌아와 배낭을 멨을 때, 온몸으로 느껴지는 배낭의 무게는 단순한 짐의 무게가 아니었다. 걱정과 설렘이었다.
봉고가 숙소 앞으로 도착했다. 포터들도 모습을 드러냈다. 우리와 함께할 포터들은 <수거든>, <타구>, <산드라>, 그리고 막내 <부나>이다. 짐을 내려놓으며 문득 이들의 삶이 궁금해졌다. 나는 일생에 한 번이 될지 모를 안나푸르나를 찾아왔지만, 이들은 이 길을 자주 오르내릴 것이다. 우리는 각자의 역할로 이 여정에 참여하는 동반자가 될 터였다. 나는 여행자로서 이 길을 걷고, 그들은 일로 걷는다는 차이가 있을 뿐.
봉고가 포카라의 뒷골목을 빠져나가는 동안, 창밖으로 스치는 풍경은 또다른 모습이었다. 벽돌과 나뭇가지, 시멘트 가루와 헝겊 조각으로 만든 집들. 들판을 가로지르는 가축 떼, 때 묻은 셔츠를 걸친 채 바삐 오가는 사람들. 그 풍경은 여행자가 꿈꾸는 이국적 정경이 아니라, 삶의 냄새와 질감이 고스란히 묻어 있는 땅이었다. 그 땅 위에서 아이들은 맨발로 뛰어다녔고, 논밭의 여인들은 허리를 숙인 채 손끝으로 하루를 일구고 있었다.
포카라를 벗어나자, 풍경은 서서히 여유를 찾았다. 추수를 앞둔 황금빛 들판이 펼쳐지고, 산과 산 사이를 가르는 흙길 위로 바람이 흘렀다. 그 바람 속에서 <북설지>가 창밖 풍경에 매료된 듯 기사에게 차를 세워달라고 했다. 차창 밖으로 보이던 안나푸르나와 마차푸차레의 모습을 감상했다. 저 산을 향해 가고 있다는 사실이 실감 났다.
멀리 포카라의 페와호수가 반짝이는 언덕길을 넘어, 나야풀에 도착했다. '트레킹 출발지'라는 간단한 명찰 같은 이름을 붙이기엔, 나야풀은 너무 조용하고 소박한 마을이었다. 산 아래에 기대어 숨 쉬는 오래된 마을. 그곳에서 우리는 9시 40분, 첫 발걸음을 떼었다. 오랜 꿈이 현실이 되는 순간은 그렇게 담담하게 시작되었다.
아이들이 "스위트!"를 외치며 달려왔다. 손바닥 위에 올려진 사탕 하나에 환하게 웃는 얼굴들. 우리는 사탕을 쥐여주며, 낯선 땅에서 가장 쉬운 방식으로 인사를 건넸다. 그렇게 우리는 이곳 네팔이라는 땅에 발을 들이고, 이곳의 삶과 조금씩 엮여갔다.
퍼밋 체크포인트를 지나, 당나귀 떼와 마주쳤다. 길 한가운데를 점령한 채 천천히 행진하는 당나귀들의 발걸음은 우리가 이방인임을 선명히 알려주는 장면이었다. 이 길의 진짜 주인들은 저들일지도 몰랐다. 사람들은 조용히 길을 비켜서며, 당나귀들이 지나가는 풍경을 배경 삼아 각자의 숨을 돌렸다.
마을과 마을을 잇는 길은 산사면을 따라 구불구불 이어졌다. 산사면에 몸을 기대며 걷다가 다시 마을 안길로 접어들었다. 낮볕은 의외로 따가웠고, 계단 길이 이어지자, 몸은 금세 무거워졌다. 길가 롯지에서 맥주를 한잔씩 마셨다. 포터들에게도 맥주를 건넸는데, 그중 막내 <부나>는 미성년자라 제외됐다. 포터의 리더 <수거든>은 아주 기뻐했다. 그 얼굴에 선명히 새겨진 웃음은 짧은 휴식보다 더 큰 위안이었다.
람다왈리에서 점심을 먹으며, 일본인 트레커를 만났다. 북알프스 산장에서 일한다는 그들과의 대화는 잠시나마 산 너머 다른 산을 꿈꾸게 했다. 산은 그렇게 사람과 사람을 이어주고, 오늘의 걸음 위에 내일의 약속을 얹어두었다.
양 떼가 길을 가득 메운 길목에서, 우리는 길가에 앉아 잠시 숨을 돌렸다. 저녁 빛이 길게 드리워진 논밭에는 수확하는 농부들의 손길이 분주했다. 우리가 떠나온 시골 풍경과 겹쳐 보이는 장면들 속에서, 사람 사는 모습은 국경과 언어를 넘어 서로 맞닿아 있음을 느꼈다.
울레리로 향하는 돌계단은 끝이 없어 보였다. 숨이 턱까지 차오르고, 다리가 무거웠지만, 누구도 걸음을 멈추진 않았다. 걸을 수 있다는 것 자체가 축복이라는 걸, 느꼈던 것이리라. 들숨과 날숨 사이에서 살아있음을 확인하는 시간이었다. 걷는다는 것은 단순한 물리적 이동이 아니라, 나 자신을 한 걸음 한 걸음 앞으로 밀어내는 의미있는 행위라는 생각이 들었다.
해 질 무렵이 되어서 울레리 롯지에 도착했다. 포터 막내 <부나>는 늦게 도착하여 일행들이 모두 걱정했지만 <부나>의 얼굴은 밝았다. 오는 도중 친한 친구를 만났단다. 네팔 롯지의 밤. 나무판자 문을 닫고, 하루를 마무리했다. 창밖으로는 안나푸르나 사우스와 히운출리가 어제보다 더 가까이 있었다. 오늘 걸었던 하루의 모든 감각이, 그 풍경과 함께 나를 감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