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월 31일
울레리의 아침은 어제보다 조금 더 높은 곳에서 시작됐다. 해발 1,960미터, 눈앞에 펼쳐진 풍경은 여전히 장엄했지만, 몸은 그 장엄함을 느낄 여유보다 먼저 침낭 속에서 뻣뻣해진 허리를 어루만지는 일로 하루를 열었다. 전날 일찍 잠든 탓인지 새벽 4시가 되니 자연스레 눈이 떠졌다.
이불속에서 랜턴 불빛에 의지해 오늘의 일정을 훑어본다. 푼힐 전망대와 데우랄리까지, 지도 위에서는 손가락 몇 번만 움직이면 되는 거리지만, 이 산길에서는 그 손가락 한 번이 종일 발바닥을 울릴 거리였다.
아침 식사는 간단하게, 빵 몇 조각과 차 한 잔으로 때웠다. 한식이 그리워질 때쯤 '산마루' 같은 식당을 찾을 수 있길 바라며, 오늘도 네팔식 간소한 식단으로 하루를 시작한다.
숙소를 나서자마자 길가에 닭장 하나를 통째로 지고 있는 아저씨가 보인다. 닭들이 저마다의 방식으로 항의 중이지만, 아저씨는 닭들의 항의가 들리지 않는 듯 무덤덤한 표정이었다. '살아 있는 닭을 닭장 채 등짐을 지고 팔러 다니는구나'라는 깨달음과 함께, 네팔의 아침은 그렇게 소란스럽게 시작되었다.
마을을 벗어나자, 이번엔 길목마다 나무 울타리가 막고 서 있었다. 야크와 당나귀들의 무단침입을 막는 장치라고 한다. 울타리를 열고 닫는 포터들의 손놀림은 마치 그들의 집인양 익숙했다. 동물과 사람의 영역을 나누는 경계, 그 안에서 사람들은 각자의 걸음을 이어가고, 동물들은 그들의 길을 찾는다.
한 시간쯤 걸었을까, 길가에 소박하게 차려진 과일 가게가 나타났다. 사과를 한 개 샀다. 한입 베어 물고 나니, 과육보다 더 진하게 느껴지는 건 껍질에 스민 흙 내음이었다. 한국 사과에 익숙한 입에는 어딘가 덜 여문 맛이었지만, 그 투박한 맛조차 이곳에서는 제법 그럴듯하게 느껴졌다.
누군가의 손에서 손으로 건너온 사과 한 알에 이 아침의 공기와 흙, 손때가 다 배어 있었다. 사과 맛을 곱씹으며 걷다 보니 길은 점차 계곡으로 이어졌다. 포터들은 이 길을 정글 길이라 불렀다. 정글이라기엔 귀여운 숲길이겠거니 생각했는데, 웬걸, 나무와 덩굴들은 저마다의 방식으로 길을 틀어막고 있었고, 계곡물소리는 제법 웅장했다.
숨을 돌리려 멈춘 순간, 웬 사람들이 웅성이는 소리가 들렸다. 가까이 가보니 원숭이 한 마리가 우리를 내려다보고 있었다. 동물원 철창 너머에서 보던 원숭이와는 완전히 다른 기세였다. '여긴 내 구역인데?'라는 표정이 가득했고, 우린 그저 조용히 길을 비켜줄 수밖에 없었다.
작은 로지에서 블랙티를 한잔 마셨다. 고산병에 좋다기에, 설탕을 듬뿍 넣고 마셨지만, 머릿속으로는 과연 이게 고산병을 이길 만한 위력이 있을까 싶은 의구심이 가득했다. 그래도 따뜻한 차 한 잔이 속을 풀어주는 건 사실이다. 포터들도 차를 마시며 잠시 숨을 돌렸다. 서로 다른 말을 쓰고, 서로 다른 걸음을 걷지만, 그 순간만큼은 같은 차를 마시고 같은 하늘을 올려다봤다.
점심은 가지고 온 라면을 끓여 먹기로 했다. 꼬들한 면과 얼큰한 국물이 간절했기 때문이다. 포터들에게는 알아서 식사를 하라고 했지만, 나중에 알고 보니 그게 실수였다. 포터들은 트레커들과 한 테이블에서 식사하는 것이, 자신들이 대접받는 것이라 생각한다는 것이다. 그들과 따로 식사를 한 것이 그들과의 관계를 조금 멀게 만들었을지도 모르겠다.
고라파니에 도착한 건 오후 3시경이었다. 예상보다 이른 시각에 도착되어 당초 내일 아침에 오르려 했던 푼힐 전망대를 오늘 오르기로 했다. 그러나 그 결정이 후회로 바뀌는 데는 10분도 걸리지 않았다.
오르막을 몇 걸음 걷자마자 숨이 턱까지 차오르고, 손끝 발끝이 얼얼해졌다. 이게 그 유명한 고산병 증상이란 것인가. 두려움 반, 궁금증 반으로 천천히 숨을 고르며 한 걸음씩 내디뎠다. 숨을 쉬는 것조차 버겁게 느껴지는 순간이다.
해발 3,210미터 푼힐 전망대에 도착하자, 눈앞에 펼쳐진 다울라기리의 위엄이 모든 고통을 덮어버렸다. 바람은 거칠고, 햇살은 눈부셨고, 설산은 그 자체로 침묵하고 있었다. 손은 시렸지만, 그 순간을 놓칠 수 없어 사진을 남겼다. 그러나 사진은 눈에 담은 풍경의 반도 담아내지 못했다.
포터들과 다시 합류한 건 데우랄리에 도착한 뒤였다. 우리가 말한 데우랄리와 포터들이 예약한 데우랄리는 서로 다른 장소였다. 알고 보니 '데우랄리'는 네팔 곳곳에 흔한 이름으로, 언덕이나 고개를 의미하는 지명이라고 했다. 우리와 포터들은 같은 이름의 서로 다른 목적지를 향해 걷고 있었던 셈이다.
운 좋게 잡은 로지는 예상보다 깨끗하고 편안했다. 테라스에 서서 바라본 풍경은 로지 이름 그대로, 정말 'Nice View Point'였다. 해가 질 무렵, 각국의 트레커들이 마당으로 모여들었고, 그 순간만큼은 서로의 국적도 언어도 중요하지 않았다. 모두가 같은 산을 바라보고, 같은 하늘 아래 서 있었다.
일몰은 장관이었다. 붉게 물든 산자락과 길게 늘어진 그림자가 하루의 끝을 알렸다. 따로 설명하지 않아도, 그 풍경만으로도 오늘 하루가 얼마나 값졌는지 충분히 알 수 있었다.
그날 밤, 나는 침낭 속에서 하루의 발자국을 되짚었다. 예상치 못한 고생, 미처 몰랐던 문화 차이, 순간순간 터져 나온 웃음까지. 걸을 때마다 한 겹씩 벗겨지는 내 모습과, 그 빈자리를 채우는 새로운 감각들. 산은 그런 식으로 사람을 바꾸고 있었다. 나는 그저 조금 더 유연한 마음으로 내일을 맞이하기로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