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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신지음 Oct 04. 2022

하루의 끝을 오래도록 붙잡았습니다.

가을, 회복의 계절

맥주가 원래 이렇게 달고 은은했는지 약간의 의문을 가진다. 하얀 기포가 컵 위로 빠르게 올라오는 걸 바라본다. 맥주 한 잔이 주는 위로로 하루를 마무리 하기에는 남겨진 하루가 아까워서 오늘을 보내줄 수가 없다.


 

이 맛을 좋아하게 된 건, 내가 머물고 있는 감정에 따라 맛이 달라지고 있다는 걸 알게 되었을 때였다. 눈물이 떨어질 것 같은 날은 미적지근하고 텁텁한 맛이 내 안에 맴돌아 더 이상 마실 수 없다고 느꼈고, 일주일을 끝내고 하루를 정리하며 평화롭게 하루가 흘러갈 때는 깔끔하고 시원한 맑은 맛이 났다.



아직은 정리하고 싶지 않은 하루를 앞에 두고 맥주 한 캔을 따서 가장 좋아하는 유리잔에 따랐다. 맥주로 나의 감정을 평가해보고 싶은 생각은 없지만, 맥주를 마실 때면 어른이 되었다는 기분이 든다. 사는 게 쉽지 않다 싶으면서도 내가 어떤 사람이든 믿어주는 사람들과 함께 하루를 마무리하면 하루는 밝아진다.



금요일보다 목요일에 술 마시는 게 좋은 건 아직 일주일이 다 끝나지 않았다는 안도감 때문이다. 금요일은 일주일이 정말 다 끝났다는 후련함과 함께 아쉬움이 찾아온다. 일주일을 최선을 다해 보내지 못했다는 아쉬움이 가득 차면 술맛은 또 변할 테다. 텁텁하고도 쓰리게.



"사회생활 처음 할 때는 바쁜 게 좋아. 이리저리 구르고 여러 어려운 사람들 만나면서 버텨내야 결국에는 잡초가 될 수 있어."



사회생활 처음에는 보다 바빠야 하고, 보다 어려워야 한다는 말을 가만히 듣고 있었다. 일련의 과정들을 잘 버텨내고 잡초가 되는 과정을 감당해만 한다는 이야기들이 나에게로 향한다. 버티며 사는 인생은 그만하기로 이미 정한 뒤에 들은 대사는 의미 없게 다가오더니 곧바로 흩어져버린다.



잡초? 나는 잡초가 될 생각이 없는데. 비바람 안 맞을 수 있으면 좀 안 맞아도 되고, 무너질 것 같이 힘들면 도망 좀 갈 수도 있지. 글쎄, 막말과 부조리함을 견뎌내는 게 끔찍하게 싫어졌는걸.



의미 있게 들어오지 않은 대사들을 뒤로하고 안전한 집에 도착했으니, 흩어져버린 대사에 의문을 품는데 쓸 시간은 없다. 이미 나의 삶은 달달하고, 인생의 방향을 모를 만큼 어리석지도 않다.



달달하고 은은한 맥주를 입에 가져다 댄다. 내 일주일은 내 기분이 만들어 내는 공간이다. 살아내고 있는 것만으로도 고귀하고 아름다운 세상에서 사랑하는 사람과 함께 하는 한 잔이 주는 위로는 모든 걸 잠시 잊을 만큼 근사해진다. 잔을 기울여 부딪히는 소리가 맑게 퍼진다. 아직 정리되지 않은 하루를 함께 마무리한다. 함께 미소를 짓고, 잔을 기울인다.



사랑하는 시람과 맛있는 것을 먹는 게 행복이라는 아주 단순한 사실이 다시금 나 여기 있다고 외친다. 사랑하는 사람이 있고, 맛있는 음식이 있어서 안도감이 드는 건 내가 지금이 얼마나 소중한 순간을 보내는 건지 알게 된 사람이라서일 것이다.



안도한다. 사랑하는 사람들이 곁에 있고, 내가 그들 옆에 살아있는 게 감격스럽기까지 한 날이 저문다. 고마운 사람에게 고맙다고 말하고, 사랑하는 사람에게 사랑한다고 말한다. 오래도록 끝나지 않던 하루가 평온하게만 흘러가고 잔잔한 하루 끝에 기대 조금 더 머문다.



한 잔 기울인 약간의 취기가 싫지 않다. 정신이 몽롱한 상태가 아닌 기분 좋은 미소를 머금고 나만의 공간에 들어와 읽던 책을 마저 읽어 내려간다.



만끽하며 살아가는 게 뭔지 배우는 것도, 후회하고 실망하고 또 사랑하는 과정도, 그렇게 어른이 되어가는 과정까지도 내게 필요한 만큼 다가온다. 오늘이 나에게 남긴 건 또 사랑이었을까 아니면 술의 새로운 맛이었을까. 밤의 공기가 문틈 사이로 들어와 내 뺨을 스친다. 놓아주고 싶지 않은 하루가 저문다.




'신지음 계절집'의 사계절 중 '가을 : 회복의 계절'편 입니다.

4계절의 이야기가 틈틈히 올라올 예정입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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