겨울, 위로의 계절
할머니 집에 놀러 갔던 날 할머니는 나에게 "너희랑 함께 갔던 여행사진을 보고 있으면 웃음이 난다"라고 말했다. 할머니 집에서 돌아온 날은 외할머니에게 전화를 걸었다. 전화를 받은 외할머니는 "너 목소리만 들어도 기분이 좋다"라고 말했다.
나를 이유 없이 사랑하고, 믿어주고, 아껴주는 이들은 대체 왜 그런지 몰라도 나를 너무나도 사랑했다. 이유 없이 사랑을 받았던 많은 날들에 이유를 묻는다. 그들 자신보다 더 아꼈던 내가 이렇게 아무렇지도 않은 사람이 되어도 괜찮냐고 자꾸만 되묻는다. 이들은 늘 그렇듯 이렇게 똑같이 대답한다.
"우리 강아지가 힘들어서 어떡할까.
힘들면 할머니 집에 와서 조금 쉬다 갈래?"
굳이 즐기는 척 버텨야 하는 이유를 찾지 못하면 늘 이들에게 가곤 했다. 이곳에서는 늘 안전했다. 벗어나고 싶을 때 도망갈 수 있는 공간이 있고, 안전한 공간 안에 머물며 아무런 소음도 없이 가만히 앉아서 멍 때려도 된다는 사실이 나를 안도하게 만들었다. 나의 세상에서 벗어나 다른 세상으로 온 며칠간은 일상의 속도는 아무것도 느낄 수가 없다. 완전히 다른 속도의 하루가 천천히 시작된다.
읍내에 나갈 일이 있다고 하신 할머니를 배웅하고는 멍하니 앞에 있는 산을 바라본다. 그리고는 귀여운 강아지 덕덕이와 한참을 놀다가 할머니가 온다는 소리에 버스정류장으로 마중 나간다. 할머니는 환하게 웃으며 검은 비닐봉지를 나에게 내민다. 검은 비닐봉지 안에는 30분 거리의 버스를 타고 와 살짝 녹은 아이스크림이 들어있다.
바쁘지만 한가한 일주일이 빠르게 지나간다. 사주고 싶은 음식이 아직 남았으니 일주일만 더 있다 가면 안 되냐고 묻는 복순 할머니를 뒤로 하고 버스에 올라탔다. 버스가 떠날 때까지 손을 흔드는 복순 할머니가 보이지 않을 때까지 나도 열심히 손을 흔들며 또 한 번 소중한 여행을 하고 왔다는 걸 실감했다. 짧은 이곳에서의 시간은 유일한 도피처이자 행복하고 안전한 여행이었다.
그들이 건네는 사랑이 얼마나 소중한지 쯤은 이미 알고 있었던 것 같은데도 나는 표현을 많이 하는 사람은 아니었다. 그리고 지금도 여전히 모든 것에 서툰 사람이다. 그 어떤 여행보다도 소중한 여행을 할 수 있는 시간이 얼마나 남았는지는 모른다. 그럼에도 평생 그 여행을 할 수 있을 것처럼 안도하며 그들에게 간다.
너무 소중했던 나의 할아버지들이 떠났던 것처럼 너무나 사랑하는 이들이 떠나는 날이 오면 더 이상 내가 도망갈 곳은 남아있지 않겠지만, 그럼에도 그들과 함께 하는 여행을 계속한다. 최선을 다해 여행하고, 웃음을 남긴다. 그들의 사랑이 아직 내 옆에 있음에 안도하며.
'신지음 계절집'의 사계절 중 '겨을 : 위로의 계절'편 입니다.
4계절의 이야기가 틈틈히 올라올 예정입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