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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음운 Feb 02. 2024

다정한 퀴어는 외롭다

다정도 병이라지.

당당하게 말하는데 나는 내가 다정해서 외롭다는 걸 인정한다. 단지 퀴어라서 외로운 건 아니다. 난 '다정한 퀴어'라서 외로운 것이다.


아침에 일어나 사랑하는 개그우먼, 장도연 님의 살롱드립을 보면서 사랑하는 애인이 사놓은 LA갈비를 구워 먹었다. 먹은 그릇들을 설거지 통으로 가져다 놓고 추위에 대비해 내복도 야무지게 챙겨 입으며 외출복을 입었다.


그러곤 문 앞에서 무너졌다.

아무것도 하기 싫다. 더 이상 살고 싶지가 않다. 이 문을 열고 밖으로 나가고 싶지가 않다. 아침에 눈을 뜨면 너무나 자연스럽게 자살충동이 떠오른다. 언제부터였는지 가늠할 수 없을 정도로 오래된 자살 충동은, 어린 시절 상상친구처럼 항상 내 옆에서 날 쿡쿡 찌르며 존재감을 드러낸다.


정신과 병원도, 심리상담도 모두 받아봤다. 옮긴 병원의 새 선생님에게 내 증상을 설명하는 것이 이제는 글을 잘 갈무리해서 게시하는 것처럼 이제는 익숙하기까지 하다. 처음 방문한 병원에서 감정을 쏟아내고 내 눈앞에 있는 구원자가 약물처방으로 날 구원해 줄 것이라는 기대감은 조금 희박해지기도 했다.

선생님에게 내 증상을 말할 때 쓰는 말이자, 나 스스로도 내가 날 정의했다고 생각하는 말이 있다.


"항상 물에 잠겨 있는 것 같아요. 평상시에는 정강이쯤까지. 매일 잠겨있으니 물이 목까지 차오르기 전까지는 내가 위험하다고 생각을 안 해요. 얼굴까지 차오르고 이내 숨을 못 쉬게 되면 그때서야 살려달라고 외치게 되는 거죠."


당연히 이렇게 말하면 선생님은 우울증을 진단한다. 때로는 이유를 찾겠다며 내 인생의 역사를 거슬러올라가 부모님과 관계, 형제 관계 심지어는 조부와의 관계까지 물어본다. 그들의 치료 의지에 악의나 비방의사를 느끼는 것은 아니다. 하지만 선생님에게 외치고 싶은 말이 있다.


선생님. 저는 제가 다정한 퀴어라서 우울해요.




내가 무어라고 다정한 퀴어에 대해 정의를 내릴 수 있을까.

하지만 '다정함'에 교집합이 없고 '퀴어'에 교집합이 없는 사람들을 위해 내 나름대로의 최선을 다해 내가 느끼는 감정을 설명해보고 싶다.


나는 다정한 사람이다. 내가 잘난 사람이라고 말하는 것이 아니다. 우울증 증상의 한 부분으로서 다정한 것일 수도 있다. 나를 내팽개치고 나는 나를 돌보지 않아도 되는 사람쯤으로 여기면서 다른 사람이 아플 바에는 나 같은 사람이 아픈 것이 낫다고 생각하는 것이다. 그러니까 잘난 다정한 사람은 아니다. 뭐, 잘난 다정한 사람이라는 게 있는 건지는 잘 모르겠지만.

그 누구에게도 상처를 주고 싶지 않고 폐를 끼치고 싶지 않다. 다른 이들의 인생에 한 순간이라도 나 때문에 신경을 쓰게 되는 순간이 오는 것이 진저리 나게 싫다. 내가 아픈 것은 무디면서 다른 이들의 아픔에는 눈물을 쏟는다. 아픔에만 동감하는 것이 아니다. 내가 아파봤기에 다른 이들의 감정과 마음 심지어는 미래가 보이는 점쟁이처럼, 타인이 앞으로 느낄 감정까지 느낄 있다. 그렇기에 예방책처럼 미리미리 신경을 있다는 점이 다정함이라 수 있다. 그리고 소수자라는 정체성 때문이기도 하겠지만 소외당하는 사람이 있는 걸 지켜볼 수 없다. 낯선 자리에 적응하지 못하고 머뭇대는 사람이 있으면 내 단전에서부터 붙임성을 끌어올려 그 사람을 편하게 만들어준다. 내가 가진 재능이라고도 할 수 있다.


앞서 말했듯 나는 퀴어다. 커밍아웃하지 않은 벽장 퀴어라서 외롭다(!)라는 의견을 애당초 막기 위해 말하자면 난 부모님께만 아직 말씀을 못 드렸지, 내 학창 시절 친구들에게 커밍아웃을 했고 든든하고 멋진 퀴어 커뮤니티에도 몸 담고 있어서 의지할 수 있는 사람들도 있다. 이번 생은 이 사람만 사랑해도 억울하지 않을 정도로 멋지고 다정한 애인과 약혼도 했고 함께 사는 중이기도 하다.


그런데 왜 나는 외로울까.


나도 그 이유를 알기 위해 이 글을 쓰기 시작했다.

오늘 아침 문 앞에서 무너진 이후 이 감정을 쏟아내고 내가 지금 빠진 물이 우울인지 술인지 모를 정도로 잠식되고 싶었다. 우선 애인을 떠올린다. 애인은 새로 들어간 회사에 출근 2일 차다. 회사가 끝나고는 애인의 다른 업무 때문에 밤늦게 들어온다고 했다. 그리고 애인도 우울증 환자다. 주기적으로 병원을 다니고 약을 먹고 있다. 나 때문에 애인까지 내 우울에 잠식되는 걸 보고 싶지 않다. 사실 애인은 우울함을 토로하기에 좋은 상대가 아니다. 내 애인을 지칭하는 것이 아니라 애인이라는 대명사를 말하는 것이다. 사랑하는 사람이 내 우울에 동조되어 물에 빠지는 것을 보는 것만큼 괴롭고 힘든 것이 없기에.


그렇다면 친구를 떠올린다. 나에겐 두 가지 부류의 친구들이 있다. LGBTQ 커뮤니티 친구들과 헤테로 친구들. 근처에 살면서 다정하고 섬세하고 나를 좋아하는(애정 O/사랑 X)  퀴어 친구 커플이 생각났다. 하지만 안 된다. 그들 또한 다정이 병이기에, 내가 이만큼 힘들고 외롭고 우울함을 느낀다고 토로하면 그들의 일상에 흠집이 날 것이다. 게다가 "우울하다"도 아니고 "죽고 싶어"라니. 그 말을 들은 순간부터 나를 챙기기 위해 부단히 노력하겠지. 사랑스러운 그 커플에게 이런 힘듦을 안겨줄 수 없다. 애써 날 위해 노력하고 날 생각해서 연락하고 술자리에서 내 표정을 살피고, 그런 모습들을 그들에게서 보고 싶지 않다. 역설적으로 내 우울함을 가볍게 여기는 사람들을 만나고 싶어 진다. 그렇지만 내 퀴어 친구들은 다정하다는 죄로 자격미달이다.


그렇다면 내 헤테로 친구들?





여기서부턴 퀴어라는 정체성이 걸림돌이다.

솔직하게 말하고 싶다. 나는 헤테로 친구들과 서서히 멀어지고 있음을 느끼고 있다. 내 잘못일 수도 있고 그들의 잘못일 수도 있고 아니면 모두의 잘못이 아니거나 이건 헤테로와 퀴어의 운명적인 결과일 수도 있다. 나는 운이 좋게도 내 친구들에게 커밍아웃을 했을 때 퀴어혐오라던지, 동정을 듣진 않았다. 그냥 '그렇구나' 정도. 감사한 일이지. 아니, 감사한 일인가?

여하튼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는 그들에게서 멀어질까. 이건 내가 '이해받아야 하는 쪽'이라서 그렇다. 그들은 이해를 요구하지 않는다. 다수니까, 일평생 다수에게 둘러싸인 삶을 살아왔기에 이해받고 있는지조차 이해하고 있지 않으니까. 나는 헤테로의 사랑과 퀴어의 사랑이 다르지 않다고 믿지만 적어도 사랑의 알고리즘은 다르다고 생각한다. 그렇지만 내 부족한 표현력으로 이를 설명할 길이 없다.


한 친구가 그런 말을 나에게 한 적이 있다. "좋아하고 보니 동성이었던 거 아니야?"

아니다. 나는 동성임을 인지하고 사랑했다. 동성을 사랑한다는 것은 나의 선택이자 정체성이기도 하다. 물론 좋아하고 보니 동성이라 본인이 퀴어임을 깨달은 사람도 있고, 일생을 살며 단 한 명의 동성만 만나고 그 이후엔 계속해서 이성만을 사랑하는 사람들도 있다. 내가 뭐 퀴어의 대표주자도 아니고 나라는 한 사람이 퀴어의 마음을 대변할 수 없다. 적어도 나라는 사람은 내 선택에 의해 동성을 사랑하는 삶을 살고 있고 나는 이 선택이 내 인생에 가장 큰 줄기이자 자긍심이고 정체성이라고 생각한다. 타인의 이해가 필요한 부분이 아니다. 그저 존재하는 사실이다.


잠깐, 여기서 헤테로 친구에 대한 정의를 내리고 가고 싶다. 여기서 말하는 내 헤테로 친구들은 '앨라이'로서의 헤테로가 아닌, 그저 수많은 헤테로 중 원오브뎀으로 존재하는 친구들이다. 친구들아 보이지 않는 곳에서 너희를 공격해서 미안하다. 그렇지만 사실이 그러니 어쩔 수가 없다.


멀어짐을 느낀 몇 가지 사건들이 있다. 그중 사건 하나. 친구에게 커밍아웃을 했다. 친구에겐 남편이 있었다. 어느 날 친구가 말했다.


남편도 알아.


사실 난 어느 정도 예상도 했고 예측도 했다. 애인, 가족과의 사이에선 비밀이 없는 경우가 많다. 그게 보통의 상황에선 올바른 일이겠지만, 친구의 성정체성까지 공유할 필요가 없다고 생각하는 바이다. 하지만 예상도 했고 예측도 했다. 그냥 '그럴 것 같았다'. 나는 '거의' 오픈리 퀴어라 아는 사람 하나 늘었다고 해서 엄청나게 세상이 무너질 것 같고 그러진 않았다. 그렇다고 내가 상처를 안 받았느냐? 그것은 별개의 문제다.

여기서 내가 느낀 상처의 포인트를 짚자면 이런 것이다. '함부로 아웃팅을 해서?' 물론 당연히 이것도 엄청난 상처의 포인트다. 하지만 정확하게 말해서 이 헤테로들은 '아웃팅을 당해서 위험해지는 나'를 생각하지 않는 것이다. 그저 '내 남편은 좋은 사람이고 너의 성정체성까지 이해해 줄 사람이니까. 넌 위험하지 않지. 난 그냥 남편한테만 말한 건데?'라고 생각함이 느껴지는 것이다. 나의 사회적 약자로서의 위험, 실질적으로 다가올 수 있는 생계의 위험과 더 심하게 나아가면 목숨의 위험까지도. "뭐 남편한테만 말한 거 가지고 목숨의 위험이야, 비약이 심하네."라고 생각된다면 바로 그것 때문에 내가 헤테로와 멀어지는 지점이라는 것을 명심해 주길 바란다. 또한 "오픈리 퀴어라며?"라고 생각된다면, 내가 안전하다고 생각하는 사람들에게만 커밍아웃을 하는 것과 내 의사와 상관없이 아웃팅이 되는 것은 명백하게 다른 지점이라는 것을 밝힌다.


사건 둘.

한 무리에 있는 친구들 중 한 명이 결혼을 했다. 나머지 친구들은 다 오랜 기간 만난 애인이 있었다. 나를 포함해서. 술자리에서 우스갯소리로, "이렇게 오래 연애하다가 다른 사람이랑 결혼할 수도 있지."라는 이야기가 나왔다. 나는 연애가 아니고 약혼한 사이였지만, 뭐 약혼한 사이에서도 갈라질 수 있는 거니까 동의했다. 그들에겐 동성끼리의 약혼이 풀반지 끼고 꺄르륵하는 정도의 다짐이라고 느껴질 수 있겠지만, 이건 내 피해의식일 수 있으니 넘어간다. 동의를 하니 이번엔 이런 말이 등장한다.


모르지, 너도 다른 남자 만나서 결혼할 수 있지.


이런 말을 들으면 당사자는 참담한 기분이 든다. 분노도 아니고 절망적인 상태. 내가 선택한 삶에 대해 또다시 설명해야 할 것 같은 피로감과 고단함, 그리고 설명하지 않고 차라리 말을 안 하고 만다는 포기 상태. 그런 상태에 다다르고야 만다. 하지만 당시의 나는 아직 끈기가 있어 명확하게 화를 표출했고, 친구들에게 사과받았다.




퀴어의 대한 이해도 부족으로 인한 헤테로들의 배려 없는 말들뿐만 아니라 같은 연애 이야기를 해도 헤테로 친구들과 이해되는 지점들이 다르다. 예를 들면 이런 것들이다. (다시 한번 더 말하지만 퀴어들을 대표해 말하는 것이 아닌 오!로!지! 나만의 생각이다.) 헤테로들은 장기 연애한 과거가 있는 사람을 싫어하는 경우가 많다. "전 애인이랑 6년 만났대." 이런 것이 흠이 되는 것이다. 나 같은 경우엔 그 사람이 얼마나 안정적인 사람인지를 보여주는 것 같아서 장점으로 느껴진다. 적지 않은 수의 퀴어들이 안정적인 연애를 못하는 경우가 많다. 불안한 사회적 위치, 커밍아웃한 가정에서의 이슈, 스스로 아직 성정체성을 확립하지 못한 상태라서 등 많은 이유들 때문이다. 나이가 들어 중장년의 퀴어가 되어가면 대부분 자신의 성정체성을 받아들이고 주변 환경도 어느 정도 정리된 터라 안정적인 연애를 하고 결혼하고 같이 사는 경우가 많지만, 비교적 나이가 어릴수록 힘든 퀴어 연애사를 써 내려가는 경우가 많다. 그러니 장기 연애한 과거 있는 사람이 얼마나 귀한 매물(?)인 것인가!


이렇게 내가 속한 배경에 대한 이해가 전혀 없는 상태의 상대방과 이야기를 나누게 되면 '동감받지 못한다'라는 생각이 들 수밖에 없다.





아침부터 시작된 나의 외로움 고찰이 저녁 시간이 다 될 때까지 이어졌다.

결국 나는 덜(?) 다정한 퀴어 친구를 만나 저녁 겸한 술을 먹기로 했다. 누군가 읽어주길 기대하고 쓴 글은 아니지만, 만약 이 글을 끝까지 읽어준 누군가가 있다면 그리고 이 글을 끝까지 읽었다면 내가 표현한 '덜 다정함'이 절대 비방 및 비하의 뜻이 아님을 이해해 주길 간절히 기대한다.


나의 우울함과 자살 충동은 쉽게 낫지 않을 것이다.

그래도 내 감정을 정리하기 위해 이렇게 글쓰기를 시작해 본다.


나의 두 가지 정체성, 우울증과 퀴어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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