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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하노이 민언냐 May 19. 2022

나짱, 프렌치 그리고 BTS의 알고리즘

BTS가 빛나는 파리지엔의 나짱        일러스트by하노이민언냐

내 피 땀 눈물

내 피 땀 눈물도



누구나 자신만 이해하는 지극히 사적인 알고리즘이 하나쯤 있지 않나. 비록 남들에게는 아주 뜬금없는 조합이라도 말이다. 내겐 나짱이 그렇다. 나짱, 프렌치 그리고 BTS! 전혀 연관성 없어 보이는 이 단어들은 영원히 함께 기억될 3종 세트다.


 2020년 7월 별이 빛나는 나짱의 밤, BTS의 피 땀 눈물 그리고 어눌한 발음으로 노래를 따라 부르고 열광하는 프렌치 소녀들을 봤다면 누구나 그렇게 되지 않을까.


하노이에서의 첫여름방학이 시작되었다. 여름휴가도 함께 말이다. 모든 가족들은 저마다 휴가 계획을 짜느라 바빴다. 만나기만 하면 여름휴가 계획 이야기하느라 하노이 전체가 들썩거렸다.


단, 한 집! 우리 집만 빼고 말이다.

2020년 여름은 남편에게 업무 성수기였다. 휴가는커녕 주말도 쉬기가 어려웠던 남편! 가족여행은 ‘남극에서 짜장면 배달하기’나 다름없었다. 한마디로 미션 임파서블! 하지만 포기하면 민이 아니다. 남편에게 쩡이, 쭌이만 데리고 여행을 갈 수 있도록 허락해달라고 설득 아니 조르고 있었다. 물론 씨알도 먹히지 않았지만 말이다.


계란으로 남편 치기다.


남편이 반대하는 데는 나름의 이유가 있었다. 당시 나의 베트남어 실력은 초보 중에 왕초보였다. 억양과 발음이 아예 다른 지역으로 여행을 간다는 것에 남편은 강한 거부감을 표현했다. 남편은 주재원 발령 전에 이미 출장도 자주 왔고 지역 전문가라는 프로그램의 수혜자였다. 베트남어가 유창한 그가 없이는 식당에서 물 한 잔도 시키지 못했다. 그리고 또 다른 이유는 불치병에 가까운 방향감각이 걸림돌이었다. 딱 하루만 다녀보면 안다. 나의 길치력의 심각성을 말이다. 화장실에 갔다가 역방향으로 나가 길을 잃는 사람이 있지 않나. 그게 바로 나다. 신이 내린 방향치! 이런 길치력은 아이들도 익숙하다. 쭌이는 부산에서 유치원에 입학한 만 4세부터 인간 내비게이션이 되었다. 특히 백화점 또는 아웃렛 주차장에서 나의 손을 잡아끌고 다녔다. 남들 눈에는 정다운 모자로 보였겠지만 사실 쭌이는 길을 인도하느라 하드 캐리 중이었다. 길치를 이유로 댄다면, 분하지만 나도 어쩔 수 없다. 일 보 아니 백 보 후퇴할 수밖에...


하지만 진정한 쾌락은 피 땀 눈물 뒤에 오는 법이다. 여름휴가를 쟁취하기 위한 나의 투쟁이 시작되었다. 시작은 늘 서로의 기분 체크, 온화하고 다정한 부부다. 호칭도 ‘자기뿡’과 ‘민뽕’, 하지만 서로 휴가에 대한 이견을 보이며 나의 열폭으로 마무리되곤 했다. 당시 우리의 카톡은 늘 휴가 이야기였으며, 남편은 한치의 양보 없이 완고했다. DMZ 뺨치는 삼엄한 대치상태가 계속되었다.


이런 고민을 이웃에 사는 파리지엔 B에게 얘기를 했다. 그리고 이야기를 듣던 그녀는 솔깃한 제안을 해왔다. 자신도 남편 없이 아이들과 여행을 계획 중이니 함께 가자고 말이다. 다낭과 나짱을 최고의 휴양지로 꼽던 그녀는 이미 셀 수없이 여러 번 여행을 다녀왔다. 덕분에 리조트, 호텔 그리고 레스토랑까지 꽉 잡고 있었다. 역시 꿈은 이루어지는 법이다. 아이들도 난생처음 친구 가족과 함께 떠날 생각에 초 흥분 상태였다. 게다가 처음 가는 여행지가 아닌가. 모두에게 ‘윈윈’이었다. 그녀와 함께라면 남편도 더 반대할 이유가 없다.


브라보! 베트남! 브라보! 여름!


우리는 고심 끝에 나짱으로 가기로 했다. 나짱의 리조트가 아이들이 놀기에 더 낫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그녀가 리조트에 직접 메일을 보내고 예약을 했다. 그리고 운전기사 또한 직접 알아보고 예약했다. 우리는 비행기 표와 숙박료만 그녀에게 입금했을 뿐 사실한 게 없었다. 그야말로 다된 파스타에 포크 하나 꽂은 격이다. 사실 숙소와 비행기 예약이 여행을 준비하면서 가장 수고스러운 부분이 아닐까. "Merci beaucoup, mon ami!" 준비부터 진행까지 그녀의 주도하에 착착 진행이 되었다. 수영장에서 그녀와 만난 남편 또한 고맙다고 감사의 인사를 했다. 당시 밀려드는 업무에 압사 직전이던 남편은 일일이 신경을 쓸 여유가 없었다. 이건 당신에게도 우리에게도 윈윈이지 말입니다. 그렇게 7월 26일부터 8월 1일에 걸친 일주일간의 여행이 시작되었다.

리조트는 아미아나 리조트 나짱으로 6박 7일에 4,450,000 동(한화로 22만 2천5백 원)으로 예약을 했다. 이 혁신적인 가격은 무엇? 남편은 가격이 너무 저렴해서 오히려 걱정을 했다. 심지어 오션뷰였으니 지금 생각해도 착하다 못해 리조트 경영이 걱정될 정도다. 하지만 이는 기우에 지나지 않았다. 리조트에 도착하자마자 우리는 일제히 함성을 질렀다. 탁 트인 로비 건너 바다가 눈에 먼저 들어왔다. 이것이 진정한 여름휴가다. 직원들은 유창한 영어로 웰컴 드링킹을 제공했다. 도착한 시간이 딱 점심시간인 12시 30분! 배가 고픈 아이들은 조금씩 소파에서 몸이 쳐지기 시작했다. 호텔의 직원의 안내를 받으며 레스토랑에서 밥을 먼저 먹기 시작했다. 바다를 눈앞에 두고 먹는 런치란! 이보다 더한 호사가 또 있을까 싶었다. 점심을 먹는 동안 아이들은 끊임없이 웃고 떠들었다. 역시, 함께 오길 잘했어!


체크인을 하고 방에 캐리어를 놓는 순간 아이들은 각자 수영복을 장착하기 시작했다. 빛의 속도로 수영복으로 입은 아이들과 비치로 나섰다. B의 막내딸과 쩡이는 모래성을 쌓았고 둘째 아들인 M과 쭌이는 호시탐탐 그 성을 부수려 주위를 돌았다. 짝을 지어 각자의 방에서 파자마 파티를 하기도 했다. 광란의 파티란 이런 거지! 쉴 새 없이 침대에서 뛰고 함성을 지르는 아이들을 보니 나도 모르게 웃음이 났다. 아이들에게 무비타임을 선사하고 어른들은 바로 가서 칵테일을 들이켜기도 했다. 그때 맛 본 모히또가 내 인생에서 가장 퐌따스띠끄(불어로 fantastique)했다. 물론 남편이 있었다면 좋았겠다는 심란한 마음도 있었지만 말이다.  도착한 지 고작 이틀 만에 우리는 모두 아주 새카맣게 그을렸다. 특히 쩡이의 등짝에는 초대형 점이 생겨버렸다. 수영복 모양에 따라 등에 동그랗게 타버린 것이다. 쩡이의 등을 보고 거북이가 되었다 쭌이는 크게 웃었다.


이번 여행은 여러 가지로 의미 있는 시간이었다. B의 큰 딸 R은 학교에서 늘 탑을 달리는 우등생이었다. 19살로 파리에 있는 대학에 합격해 9월에 파리로 가게 되었고 말이다. 베트남에서 보내는 마지막 여름휴가인 셈이다. B는 그런 딸을 위해 베프까지 초대해 여행을 계획했다. 특히 R과 그녀의 친구 Q는 한국 드라마와 음악을 즐기는 그야말로 베트남의 MZ세대였다. 그중에서도 방탄소년단의 열성 팬이었다. 밤에 BTS의 노래를 크게 틀고 춤을 추던 소녀들! 그리고 나는 이날 R을 위한 서프라이즈를 준비했다. 친언니에게 미리 BTS의 굿즈와 앨범(+사진집)을 소포로 받았고 이를 서프라이즈로 준비한 것이다. 부산에 있는 친언니는 나의 프렌치 친구를 위해 조카뻘인 초딩, 중딩들 사이를 비집고 굿즈를 손에 쥐고 서는 수고를 감수해 주었다. 계산대에 서서 얼굴을 붉히고 있을 언니의 얼굴이 떠올라 고마움과 미안함이 동시에 들었다. 그대의 거룩한 희생을 영원히 기억하겠소! 그리고 휴가 첫날밤, BTS의 앨범과 RM 랩몬스터의 굿즈를(그녀는 RM의 팬) 선사했다.


"Oh, my god!!! Thank you so much, Min. You are amazing! You are the best!!"


사진집과 함께 제작되어 나온 앨범을 받고 온 나짱이 떠나갈 듯 함성을 질렀다. 흥분한 그녀는 나를 안고 눈에 눈물까지 고이기 시작했다. 친구와 손을 잡고 방방 뛰던 모습에 아이들도 B도 놀라 눈이 휘둥그레졌다. 음악을 틀고 헌정 댄스를 추던 어여쁜 두 소녀들! 20살 차이가 나는 그녀들을 보며 덩달아 벅찬 행복감을 느꼈다. B 또한 그런 딸을 보며 흐뭇해했다. 연신 고맙다는 인사 또한 잊지 않았고 말이다.

그리고 작년 겨울, 크리스마스이브였다. B의 집에서 하는 저녁 파티에 초대되었다. 마침 큰 딸로부터 영상통화 전화가 걸려왔다. (프랑스는 가톨릭 문화권이니 크리스마스를 매우 중요시한다.) 우리는 안부를 물으며 통화를 했고 아직도 BTS를 듣냐고 물었다. R은 특유의 호탕한 웃음을 터뜨렸다.


"Come on, Min. You know, I'm not a kid anymore."


대학생이 되고 방탄의 팬이 아니라며 시니컬하게 대답하는 그녀! 그런 그녀에게서 파리지엔의 시크함이 묻어 나왔다. 맛있는 아침을 침대까지 대령하는 중국계 프랑스인 꼬팡(copain 불어로 남자 친구)과 달달한 연애를 하느라 정신이 없다고 했다. 이제 방탄에게 내어줄 시간이 없어질 만도 하다. 지금은 그 훈남 남친과도 이별을 했다고 한다. 20대가 된 프랑스 마드모아젤에게는 RM도 인생의 첫 남친도 이젠 과거가 된 것이다.


'나짱= BTS'라는 공식을 남긴 그해 여름 휴가! 그리고 그 가운데, 두 프렌치 소녀들은 여전히 뜨겁게 춤을 추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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