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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하노이 민언냐 Nov 03. 2021

사랑은 카드 쓰지 말고 말로 하세요

아빠의 과한 가족 사랑의 말로      일러스트 by 하노이 민언냐

‘우당탕탕’    


욕실에서 굉음이 들렸다. 큰 소리에 놀란 쩡이와 쭌이는 내게 달려왔다. 욕실을 가보니 범인은 바로 샤워기! 샤워기가 바닥에 떨어져 나동그라져 있었다. 이번에도 또 남편의 인터넷 쇼핑이 실패한 걸까.


따르릉    


리셉션에서 전화가 왔다. 택배가 왔단다. 올 게 없는데, 뭐지? 우리 집으로 온 게 맞는지 다시 되물었다.    


수취인의 이름을 말하는 직원, 그렇다. 남편 앞으로 배달된 것이다. 다시 시작된 건가. 멈출 줄 모르는 그의 쇼핑이 말이다. 슬슬 불안해지기 시작했다. 이러다 걷잡을 수 없이 창고가 꽉 차게 될 것이다. 실패로 얼룩진 인터넷 쇼핑의 역사의 장이 열릴 조짐이 보였다.        


우리 집에는 187 센티의 귀여운 쇼핑 요정이 살고 있다. 가족을 향한 사랑을 카드로 표현하는 남편이다. 그 카드가 연필로 쓰는 카드가 아니라, 결제하는 카드라는 게 함정이지만 말이다. 나 또한 둘째가라면 서러워할 프로 쇼퍼지만 우린 패턴, 종목, 방식 등 모든 면에서 그 결이 다르다. 따라서 나와 그를 같은 쇼핑 요정으로 취급하는 건 사양한다. 내가 세일을 공략한 실리형 쇼핑을 한다면, 그는 애정과 관심에서 우러난 불필요한 쇼핑하기 때문이다. 중간점이나 타협점은 도통 찾아볼 수 없는 ‘모 아니면 도’라는 식의 박력형 쇼퍼다.     


한 번은 하노이에서는 구하기 힘든 닥터 유의 에너지 바를 사 온 적이 있다. 회사 근처의 케이마트에서 운 좋게 발견한 것이다. 부산에서도 에너지 바의 팬이었던 쭌이와 나였다. 하노이에선 절대 찾을 수 없었는데, 남편의 회사가 있는 시에는 있었나 보다. 남편 덕에 오랜만에 맛본 에너지 바였다. 쭌이와 나는 에너지 바를 받아 들고 환호했다. 그리고 그는 퇴근을 일찍 하는 날마다 에너지 바만 10만 원치, 몇 박스를 나르기 시작했다. 이건 지능적인 안티인가. 아니다, 그의 행동은 진정 가족을 위하는 마음에서 우러나온 것이다. 가족이 기뻐한다면 브레이크가 걸리지 않는 중간 없는 상! 남! 자! 아니 상! 아! 빠!다. 이쯤 되면 뭘 좋다고 말하기가 두렵다. 그래서 남편이 나의 피드백을 물을 때는 수능시험을 치는 고3처럼 신중해진다. 자칫 미딩(한인 타운)에 있는 한국 베이커리의 크림 단팥빵 꼴이 난다. 달달하니 내 입에 맞다고 했다가 유통 기한도 짧은 빵(심지어 냉장 보관)을 여섯 개씩 사 오는 것이다. 빵순이 와이프를 향한 깊은 마음이야 고맙지만, 두터워지는 뱃살을 향한 나의 근심도 함께 깊어지는 중이다.

 

넘치는 가족 사랑은 이뿐만이 아니다. 2주 전쯤 교정기를 쓰는 쭌이를 데리고 프랑스 하노이 병원에 검진을 다녀왔다. 교정기 사이에 양치질이 원활하지 않아 치석이 발견되기 시작했다. 전담 치과의사인 Dr. Lily는 ‘워터 픽’을 추천했다. 워터 픽이란 강한 물줄기를 쏴서 치간에 끼인 이물질을 제거해 주는 것이다. 나는 첫 구매니 일반적이고 기본 기능에 충실한 저렴이를 사자고 했다. 하지만, 와이프 말을 들으면 우리 남편이 아니지. 그는 이런 나의 권유를 사뿐히 지르밟고 혼자만의 쇼핑 세계에 흠뻑 빠져있었다. 이만 원이면 살 것을 10만 원이나 주고 수입품을 주문한 것이다. 그쯤 되면 워터 픽계의 명품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수입품이다 보니 배송에도 오랜 시간이 걸렸다. 매일매일 "워터 픽 안 왔나?"라고 묻는 톡을 보내왔다. 이건 뭐 취업 준비생이 화사의 합격 발표를 기다리는 마음만큼 절절했다. 일주일이나 결려서 도착한 워터 픽! 하지만 이리 해보고 저리 해봐도 제대로 작동하지 않았다. 당장 반품을 하자고 목소리를 높이던 내게 그는 하늘 무너지는 답변을 했다. 수입품이라 반품도 어렵다는 믿기 힘든 아니 믿고 싶지 않은 그의 설명.. 그렇게 비싸게 주고 산 귀하디 귀한 워터픽은 다시 포장 상자 안에 곱게 싸여 창고의 한편에 참하게 앉아 있다. 그 뒤로 우리 집에서 워터 픽을 입에 올리는 자는 없었다. 워터 픽은 금기어가 되었다. 그리고 쭌이에게 양치질을 더 꼼꼼하게 하라고 고래고래 소리치는 남편의 목소리가 메아리가 되어 울릴 뿐이다.    

여기까지는 뭐 모든 한국의 아빠들이 한 번씩은 하는 일상적인 허점이다. 하지만 쭌이조차 망연자실하게 만든 희대의 사건은 따로 있다.


이름하여 ‘닌텐도 분해’ 사건이었다.


남편은 올해 5월쯤 한국으로 출장을 간 적이 있었다. 중요한 업무를 완수하기 위해 가는 출장이었지만, 그의 가슴을 뛰게 하는 다른 미션이 있었다. 바로 사운드가 고장 난 쭌이의 '닌텐도 고치기'였다. 사실 쭌이는 하노이에 오자마자 닌텐도의 스피커가 고장이 났다. 그래서 불편하지만 이어폰을 사용하고 있었다. 사운드 없는 게임은 팥소 없는 찐빵이라나. 쭌이는 아빠가 닌텐도를 반드시 고쳐오겠다며 남북통일의 과업을 잇는 듯 비장한 표정을 지었다. 아들을 향한 강렬한 부성애가 느껴졌다. 아들 쭌이도 존경과 응원의 눈빛을 보냈다. 코비드로 인한 격리 기간을 모두 포함하면 1달이 훨씬 넘는 기간인데 닌텐도 없이 지내겠다니. 그런 고통의 시간을 보내는 것마저 감수하겠다는 쭌이의 진정한 용기에 치어스! 물론 쭌이는 며칠간 닌텐도 없는 잉여시간을 어찌할지 몰라, 게임 칩만 뒤적대는 금단 현상을 보였지만 말이다.     


격리 시간 동안 혼자 심심했던 것일까. 아니면 '아빠가 이 어려운 걸 해냈다, 아들아!' 하고 기쁜 소식을 하루빨리 전하고 싶었던 걸까. 남편은 난데없이 닌텐도를 스스로 고쳐보겠다는 의지를 불태우기 시작했다. 갑분 맥가이버라니... 비극의 그림자가 드리운 건 그때부터였다. 나는 그냥 6만 원 내고 정품점에서 수리하자며 극구 말렸다. 까딱하다가는 몇 배의 수리비를 더 내던가 아예 새 닌텐도를 사야 할 것만 같았다. 하지만 그의 마음은 이미 확고했고 막귀가 되어갔다.    


"니만 오케이 하면 준비는 다 되어 있다. 민뽕, 니 남편 못 믿나?"    


응, 못 믿고 말고... 옆에 있었다면 등짝 스매시를 후려쳐서라도 정신이 들게 했을 테지. 하지만 이미 늦었다. 그는 부산의 좁은 방에서 혼자 격리를 하고 있지 않은가. 울며 겨자 먹기로 허락하고 말았다. 눈앞의 비극을 감지하고도 말이다. 사실 나의 허락은 아무 의미도 없었다. 이미 남편은 필요한 드라이버와 부품을 손이 쥐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리고… 날아든 비보, 그 닌텐도는 유명을 달리했다. 볼륨 기능을 고치긴커녕 볼륨에 조이콘 충전 기능까지 망가뜨려 놓았기 때문이다. 이 소식을 들은 쭌이는 진정으로 가슴 아파했다. 그렇게 슬픈 얼굴은 정말 처음 보았다. 쭌이는 아빠를 원망하다가도 멍하게 허공을 보기도 하고 흐느끼는 듯하더니 땅이 꺼져라 한숨을 쉬며 체념을 하는 모습이었다. 그렇게 만 11세의 아들은 아빠로부터 인생을 수용하고 인정하는 법을 배웠다.        


결국 그는 다른 새로운 닌텐도를 사고야 말았다. 더 저렴한 보급형 '닌텐도 라이트'라며 변명을 하던 그.. 어떻게 해서든 실망한 아들을 기쁘게 해주고 싶었겠지. 와이프의 잔소리와 아들의 실망하는 얼굴, 사면초가란 이런 거구나 하고 당황했을 것이다. 쉽지 않은 선택이었으리라. 결과는 마음에 들지 않지만 누구보다도 강한 부성애로 벌어진 일이란 건 믿어 의심치 않는다. 닌텐도 사건 이후로 인터넷 쇼핑은 한동안 잠잠했다. 하지만 그의 쇼핑력은 조금 진정되는가 싶더니 지난달부터 다시 택배 박스가 하나둘씩 쌓이기 시작했다.     

그리고 이번에 남편이 주문한 게 샤워기를 고정시키는 지지대였다. 그것도 하나도 아니고 세 개나 샀다. 화장실이 세 개니 세 개를 산 건 알겠는데, 이제는 내게 말도 없이 몰래 산다. 하긴 알았다면 내가 가만히 있지 않았을 테니, 목표를 위해서 현명하게 은밀하게 움직였을 남편이다. 그리고 기대에 찬 표정으로 택배를 찾아, 혼자 부스럭대며 화장실로 향하던 그였다. 부착하자마자 ‘우당탕탕’하고 타일 바닥에 샤워기가 부딪히는 소리가 서너 번 계속 났다. 그리고 오늘 오전 11시경에 결국 세 개 중 두 개가 다 떨어진 것이다. 어젯밤에 설치했으니, 24시간도 버티지 못한 것이다. 이러다 필터를 갈아 끼운 샤워기가 먼저 고장이 날 지경이다.   

  

카톡!    

때마침 울린 카톡! 남편의 톡에서 샤워기 지지대에 대한 그의 기대감이 한껏 느껴졌다.    

 

“샤워기 빠진 건 없나?”    

“당근 빠짐.”    

“ㅠㅠ 어디?”    

“쭌, 쩡 화장실 둘 다. … 안사면 안되까?”    

“다시 손을 좀 볼게. 큰 방은 괜찮군.. 다행히.”

   

포기를 모르는 남자다. 앞으로 안 사겠다거나 잘못 샀다는 인정은 절대 하지 않는다. 딱 봐도 부실해 보였다. 플라스틱으로 만들어진 지지대는 샤워기의 무게를 견딜 수 있을 같지가 않았다. 그래도 하나는 남았다고 다행이라고 하는 남편, 진정한 긍정의 아이콘이다. 고정을 더 세게 해 본다는 강인한 의지를 보이는 남편의 답을 끝으로 우리의 샤워기 톡은 끝났다. 알고 보니, 이건 키가 작은 쩡이가 샤워기에 손이 잘 닿지 않는 것을 배려한 마음이었다. 실제로 쩡이는 샤워기를 내리기 위해 매번 까치발을 들고 허둥대고 있었던 모양이다. 자다가도 딸이 배고프다고 하면 벌떡 일어나 최애 야식 '만둣국'을 해서 바치는 그다. 알아주는 딸바보인 그가 그런 쩡이를 보며 얼마나 마음이 쓰였을까. 왜 샀는지 고개가 끄덕여진다.    


남편의 쇼핑은 어찌 보면 가족이 불편하지 않게 생활하는 걸 보고 싶어 하는 그의 가족 사랑인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이제 그만해주면 안 될까 하는 현실성 없는 꿈을 꾼다. 건전한 스트레스 해소법이라고 마냥 응원하기엔 우리 집의 창고 공간이 부족하다. 거실 소파에 앉아 조용하다 싶으면 난 그의 표정을 살핀다. 볼이 발그랗게 상기되어 있다면 쇼핑이고 눈이 풀려 입을 반쯤 벌리고 있다면 게임이기 때문이다. 둘 다 옆에서 지켜보기에 즐거운 광경은 아니지만, 차라리 게임을 권하고 싶다.     

어제 드물게 일찍 퇴근하고 돌아온 남편이 쭌이의 방 앞에서 쭌이를 물끄러미 보고 있었다. 무슨 일이 있나 싶어서 나도 곁에 섰다. 책상에서 구부정하게 앉아서 책을 읽는 아들이 안쓰러웠나 보다. 그리고 내 귀에 속삭였다.   


“쭌이 책 받침대 하나 사줄까?”

“칵마~ 고마해라!”

“응...”    


샤워기에 물도 마르기 전에 또 시동을 부릉부릉 거는 남편이다. 어떤 사람들은 가정적인 남편을 둔 와이프의 배부른 소리라고 할지도 모른다. 하지만 하루가 멀다 하고 차곡차곡 박스가 쌓여가는 창고를 보면 내 마음을 이해할 것이다. 오늘도 나는 남편의 표정을 살피며 쇼핑 방어전에 촉각을 세우고 있다.


가족 사랑은 카드 말고 말로 하는 게 최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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