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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하노이 민언냐 Nov 05. 2021

다섯 살의 무림 고수

역대 최강 러블리 플라워 걸         일러스트 by 하노이 민언냐

비가 오는 날의 꽃 시장은 손님보다 상인이 더 많다. 수요가 적은 만큼 꽃값이 떨어지는 건 당연한 이치다. 손님에게는 좋지만 상인들에게는 이보다 더 속이 타는 일이 없을 것이다. 특히 오후 3시쯤에는 꽃이 시들기 전에 빨리 팔고 집으로 가려는 마음이 더 강해진다.     


바로 그때가 꽃순이가 시장에 등장할 완벽한 타이밍이기도 하다.     

내가 간다, 꽃들아! 꽃단장하고 만나자!    


꽃 시장을 자주 가다 보니 많은 상인들은 나를 알아본다. 일주일에 적어도 한 번 많으면 세 번까지 오는 한국인 'Chị 찌' 민을 알아보는 건 당연하다.


"Chị ơi, chị muốn gì ạ?" (언니, 뭐 찾아요?)

"Chị ơi, chị đi đâu ạ?" (언니, 어디 가요?)


그리고 시장에 발을 디디는 순간 입구에서부터 상인들은 너도 나도 '찌 어이 Chị ởi'(나이가 더 많은 여성을 부르는 말이다.)를 외친다. 아무리 맘에 드는 꽃이 없더라도 뭐라도 찾아내 손에 쥐고 돌아가야 직성이 풀리는 나다. 이런 쇼핑 패턴을 이제는 그들도 파악한 것인가.    


시장에 도착하자 길목의 입구부터 알록달록 글라디올러스가 색깔별로 가지런하게 서 있었다. 그리고 줄지어 선 꽃들 양쪽에 한 명씩 주인으로 보이는 아주머니들이 앉아 있었다. 글라디올러스에 시선이 빼앗겨 발길을 멈춘 나! 꽃에 관심을 보이자 한 상인이 먼저 말을 걸어왔다. 연분홍, 연두색의 글라디올러스를 보여주었다. 하지만 흐린 날씨엔 거실을 쨍하게 밝혀줄 색상이 필요했다. 때마침 다른 한 명이 선명한 다홍색의 꽃을 들고 왔다. 나의 발걸음도 자연스럽게 45도를 틀어 그 꽃으로 향했다. 처음에는 같은 가게인가 했는데 알고 보니 다른 가게였다. 두 번째로 말을 건 아주머니가 적극적으로 꽃을 권하자 처음 나와 말을 주고받던 아주머니가 빛의 속도로 나의 팔을 낚아챘다. 갑자기 큰 소리를 지르는 게 아닌가. 순간 간 떨어진다는 게 이런 거였구나 하고 깨달았다. 힐링을 위해 찾은 꽃 시장이 UFC로 바뀌었다. 본격적으로 시작된 싸움 당황한 나는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고 슬슬 뒷걸음질 치기 시작했다. 내게 관심이 멀어지는 찰나의 순간을 캐치해 잽싸게 자리를 빠져나왔다. 빠른 걸음으로 앞만 보고 걷기 시작했다. 그들이 고함치며 싸우는 소리가 계속 들렸다. 쉽게 잦아들 싸움이 아니었다. 아무것도 하지 않았지만 내 탓인 것만 같아 죄책감이 들었다.


아니지, 꽃의 아름다움에 끌려 쉽게 마음을 내주고 반응해버린 나, 유죄다.

어느새 꽃 시장의 거의 마지막 가게에 도착했다. 그때 장미꽃이 쌓인 작은 매대를 지나려는데, 어린 여자아이가 플라스틱 의자 위에 앉아 있었다. 추웠는지 털이 복슬복슬한 노란 병아리색 니트와 두꺼운 핑크색 레깅스를 입고 있었다. 크고 동그란 눈에 짧게 자른 머리, 문득 쩡이가 떠올랐다. 부산에서 방과 후 영어를 하던 때였다. 유치원의 방학과 수업을 하던 학교의 방학이 서로 맞지 않았다. 쩡이를 친정에 맡기려니 엄마는 수업 1교시가 끝나고서야 데리러 올 수 있다고 하셨다. 하는 수 없이 쩡이를 데리고 1교시 수업을 한 적이 있었다. 당시 쩡이도 그 아이와 마찬가지로 만 다섯 살이었다.     

아이의 엄마는 매대의 주인이었다. 코비드로 베트남의 보육원도 문을 닫았을 것이다. 사정이 있어 비 오는 날씨에도 아이를 데려올 수밖에 없었을 것이라 생각하니 왠지 마음 한편이 뭉클했다. 그리고 그녀가 권하는 장미꽃을 내치지 못하고 받아 들게 되었다. 사실 발길을 멈추게 한 건 장미가 아니었는데 말이다. 우리는 가격 흥정을 하기 시작했다. 가만히 듣고 있던 아이가 의자 위에 올라섰다. 그리곤 엄마가 하는 말을 계속 따라 하며 숫자를 읊는다.     


"Tám mười 땀 므어이 chín mười 찐 므어 ... (80 90...)"    

 

악, 이건 반칙이지. 이렇게 귀엽고 사랑스럽게 장사하는 직원 있기 없기? 나와 눈이 마주치자 수줍은 미소와 함께 엄마 옷자락을 슬그머니 잡는 아이. 이쯤 되면 백기 들고 항복이다. 완벽한 케이오 패, 게임 오버! 땡땡땡! 깎아달라는 말을 감히 할 수가 없었다. 장미 50송이에 8만 동, 한화로 4천 원이라고 했다. 장미의 크기나 봉우리가 핀 정도로 봐서는 그리 싼 가격은 아니었다. 심지어 비 오는 오후가 아니던가. 백 송이에 3천5백 원에 살 수 있는 장미다. 그녀는 아이를 향한 나의 시선을 느꼈을까. 마지막 굳히기 한 판을 선보인다. 싸게 파는 거라며 꽃 포장지를 손수 뜯어 보여 주었다. 지갑을 꺼내지 않을 수가 없었다. 내가 돈을 꺼내자 엄마의 성공을 축하하듯, 노래를 흥얼대며 폴짝폴짝 춤을 추기 시작했다. 장미를 사려던 생각은 1도 아니 0.1도 없었는데 결국은 가시가 뾰족한 핑크 장미를 데려와버렸다. 얇은 포장지를 뚫고 나오는 가시에 손이 따끔거렸다. 하지만 꽃을 팔고 기뻐하던 두 모녀가 떠올라 기분이 좋아졌다.    

글라디올러스(gladiolus)의 어원은 검 (sword)이라고 한다. '글라디올러스'를 파는 그녀들의 진검 승부는 내가 시장을 떠날 때까지도 계속되고 있었다.    

오늘의 진정한 승자는 다섯 살 된 리틀 플라워 레이디 아니 플라워 걸이었지만 말이다.

너를 이 바닥 진정한 무림 고수로 인정한다.

   

P.S. 길고 곧게 뻗은 자태가 검을  닮아 붙여진 이름, 글라디올러스! 라틴어 글라디어스(gladius)에서 비롯되었다. 검투사라는 뜻의 글래디에이터(gladiator)도 여기서 나온 게 아닐까 싶다.    


꽃말은 젊음, 비밀, 견고, 가슴 깊이, 상상, 생각이라고 한다. 내겐 두 주인아주머니들의 박터지는 진검 승부만 떠오르지만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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