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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하노이 민언냐 Nov 09. 2021

팁은 고래도 춤추게 한다.

하노이 팁 문화        일러스트 by 하노이 민언냐


또 휴지다.


화장실 서랍장을 열어보니..


여기도 휴지, 저기도 휴지..


휴지가 넘친다. 휴지로 이불을 덮을 지경이다.




레지던스에서 록다운 기간을 제외하고 거의 매일 얼굴을 봐온 이들이 있다. 어쩌면 베트남에서 가장 자주 보는 사람들이다. 지난 2년간 나의 집을 매일 드나드는 그들의 이름은 응어이 존젭, người dọn dẹp, 하우스키퍼다.

지난 2년간 세 번의 이사를 했다. 그것도 같은 레지던스에서만 말이다.


이사가 취미냐고 묻는 사람들이 생길 정도였다. 세 번 모두 이사를 해야만 했던 데에는 나름의 이유가 있었지만 말이다. 특히 첫 이사는 울며 겨자 먹기로 이루어졌다.


원래 처음 레지던스와 계약한 쓰리 베드 룸에 있던 거주자가 출국일자를 미뤘다. 그래서 우리는 졸지에 들어갈 방이 없어졌다. 레지던스에선 임시로 다른 방에서 그동안 머물도록 배려해 주었다. 하지만 1달 뒤 레지던스 내에서 방을 옮겨야 했다. 방을 옮긴다고 하면 아주 간단하게 들린다. 하지만 이건 고층에서 저층으로 호실을 바꾸는 완벽한 이사였다. 당장 길바닥에 나앉는 것보다 그게 나을 것 같아 그들의 오퍼를 넙죽 받아들일 수밖에 없었지만 말이다.

이사를 위해 짐을 옮기기 시작했다.

하지만 정작 이사에서 가장 중요한 걸 잊고 있었다. 그건 바로 팁이었다. 팁 문화에 익숙지 못했던 나는 직원들에게 줄 팁을 까맣게 잊고 있었다. 짐을 모두 옮긴 직원들에게 성의를 표시하고 싶었다. 하지만 지갑은 야속하게도 텅텅 비어있었다. 이사를 앞두고 있어 금고도 텅텅 비워둔 상태였다. 그렇다고 부산 사람의 인심이 어디 가나. 뭐라도 챙겨 주고 싶었다. 그리고 우왕좌왕 짐을 뒤지기 시작했다. 그때 눈에 들어온 건 한국인의 건강지킴이! 홍삼이었다. 홍삼 진액 박스를 뜯어 몇 팩씩 나눠줬다. 직원들은 웃으면 “땡큐.”라고 말하며 돌아갔다. 하지만 그게 진짜 고맙다는 인사인지는 지금도 알 수가 없다. 당시에는 임기응변으로 위기를 넘겼다는 안도의 한숨을 쉬었지만 팁을 주지 못해 늘 마음이 찝찝했다.


하루만에 말끔히 정리된 거실

그날 이후 두 번의 이사를 더 하면서 귀중품을 따로 챙기는 것만큼 직원들을 위한 팁 준비도 철저히 했다. 매번 이사할 때마다 빳빳한 현금 20만 동(한화 만 원)을 넉넉하게 찾아 놓았다. 사실 평소에는 만 원이라는 액수는 선뜻 줄 용기가 나지 않는다. 이사라는 특정한 일이 아니고선 그저 일주일이나 열흘에 한 번씩 10만 동, 한화로 5천 원을 주는 편이다. 누군가는 이것도 큰 액수라며 6만 동인 3천 원이 적절하다는 말도 있다. 개인적으로 최소한 7만 동에서 10만 동이 좋다고 생각한다. 이게 요리나 다림질을 도와주는 헬퍼들의 기본 시급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이것 또한 전지적 ‘민’ 시점으로 내린 팁 기준이니 참고만 하길 바란다.


확실히 팁은 인간관계에 윤활유가 된다. 장미꽃 한 다발의 금액이니 매번은 아니지만 정기적으로 주려고 한다. 주로 두 명 또는 세 명의 하우스키퍼들이 짝을 이루어 청소를 하는데 주로 나이 지긋한 한 명과 젊은 직원 한두 명이 그룹을 짠다. 리셉션 직원들처럼 영어가 유창하지 않은 그들은 내가 베트남어로 대화를 시도한 첫 번째 상대이기도 하다. 그녀들은 어설픈 베트남어에도 늘 미소를 보였다. 층수를 옮겨 가면서 이사를 했지만 저층에서 지금의 고층까지 계속 같은 하우스키퍼가 우리 집을 전담하고 있다. 물론 한 두 명의 젊은 직원들은 그만 두기도 했다. 그래도 팀 중 가장 나이가 많은 chị 는 늘 그대로다. 그녀는 하노이 출신이 아니라 처음에는 발음을 알아듣기 힘들었다. 하긴, 엉망진창 성조가 개판이었던 내가 이런 말을 하는 게 더 무리수지만 말이다. 우리는 동갑이지만 늘 나를 찌 chị라고 높여서 불러주는 그녀다. 그래서 나 또한 찌 chị라고 부른다. 타지에서 매일 보는 사람들과 얼굴을 트고 안부나 날씨를 묻는 것만큼 안정감을 주는 게 또 있을까. 그런 의미에서 나는 운이 좋았다.


여행지가 아닌 주거형 아파트 형의 레지던스에서 웬 팁이냐고 할지도 모른다. 하지만 그들은 그들 나름의 방법으로 성의를 보인다. 예를 들면 곳곳의 화장실을 가득 채우고도 남는 두루마리 휴지들이 그 대표적인 예다. 물론 다른 집에 비해 타월을 한두 장 정도 더 두고 간다든지 하얀 쓰레기봉투를 여유 있게 두고 가는 경우도 종종 있다.


어찌 보면 귀여운 기브 앤 테이크다. 물론 휴지는 다시 돌려보냈지만 나는 고맙다는 말을 했고 그들은 머쓱해하며 챙겨 갔다. 서로에게 고마움을 표시하는 이 관계, 나쁘지 않다. 그들이야말로 우리 집 화장실에 손빨래해 걸어둔 마스크의 개수며 설거지통 안의 숟가락 모양까지 다 알고 있다. ‘마담’이라는 호칭으로 우리를 부른다고 한들 우리는 진짜 그들의 마담이 아님을 잊지 말자. 우린 그저 장기간 방을 빌려 쓰는 세입자에 지나지 않는다. 미션 임파서블 급의 요구와 투 머치 디테일 지적 등으로 그들을 벌벌 떨게 한다는 ***호나 ****호의 이야기를 풍운으로 들었다.


***호는 모든 이웃들에게 미소를 지으며 인사를 하고 매너 좋기로 유명하다. 하지만 알고 보니 하우스키퍼들을 쥐 잡듯이 잡는 레지던스 내의 블랙리스트였다. 먼지 한 톨, 창문의 손자국 하나에도 참지 못하고 밤이고 낮이고 리셉션으로 전화를 했다. 그리고 또 다른 블랙리스트의 ****호는 어떻고. 하노이는 (한인 거주 지역인 경남 아파트를 제외하고) 방음 기능이 제로다. 의자를 빼고 넣을 때 나는 '드르륵'거리는 마찰음 하나까지 다 들린다. 한국에서는 상상도 못 한 수준의 소음이었지만, 점차 시간이 지나면서 익숙해져 버렸다. 하지만 ****호는 3년을 넘게 살아도 익숙해지지 않았나 보다. 자신의 아이들은 오후 1시에서 2시 30분까지 반드시 낮잠을 동반한 휴식을 취해야 하니 모든 층의 청소를 올 스톱하라는 것이었다. 그 어떤 소음도 용서하지 않았다. 다른 방에서 나는 진공청소기 소리에도 경기를 했다. 직원들은 그 시각 ****호의 층을 지나갈 때면 까치발을 들어야 했다. 자칫 공사라도 있는 날에는 리셉션 전화기가 불이 나는 건 말하지 않아도 알겠지.


물론 스텝들의 눈치를 볼 필요는 없다. 하지만 서로 존중하고 존중받는 관계가 어떨까 하는 게 개인적인 생각이다.


하우스키퍼들은 청소만 하는 게 아니다. 그들은 그 누구보다도 우리 집안 사정을 속속들이 다 알고 있지만 내색하지 않을 뿐이다. 물론 그들만의 리그에서는 이 집 저 집에 관해 정보를 공유하겠지만 말이다.


팁은 의무는 아니지만 티브이를 고치러 집에 오시는 기사님들께 드리는 음료수와 같은 것이다. 하물며 매일 집을 드나드는 이들에게 정성을 표현하는 건 어찌 보면 당연한 게 아닐까. 게다가 팁을 받고 얼굴에 조명 백만 개를 켠 듯 웃는 그녀들을 보면 나까지도 기분 좋아진다.


오늘도 긍정 에너지를 갖고 우리 집을 쓸고 닦아주길 바라며 10만 동짜리 현금을 준비해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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