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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하노이 민언냐 Jan 24. 2022

한국어 공부가 시급한 한국인들   ft. 주말 한글학교

한 살 버릇 여든 간다?       일러스트BY하노이민언냐

한 살 버릇 여든까지 간다 - 쭌 가라사대    


 “쭌아, 세 살 버릇 여든까지 간다. 아니가? 한 살에 버릇이 들기도 어렵겠다.”    

 


요즘 부쩍 쩡이와 쭌이의 한국어 어휘력이 떨어지고 있다. 그렇다고 영어가 그 빈자리를 빵빵하게 채워주느냐. 그것도 아니다. 그래서 다시 엄마표 한국어 수업을 시작했다. 수업이라고 해봐야, 그저 문제집을 서너 페이지 풀고 일기를 쓰는 것뿐이다. 물론 일기에서 틀리게 쓴 단어들은 다시 쓰고 외워야 하는 고통의 시간이 있지만 말이다. 여느 아이들이 그러하듯 공부는 공부일 뿐 놀이가 될 수 없다. 나는 나대로 하루의 과업을 얼른 끝내고 쉬고 싶어 마음이 바쁘다. 저녁을 먹고 난 7시 반쯤부터 아이들을 향한 본격적인 학습 푸시가 시작된다. 하지만 이런 마음도 모르고 아이들은 못 들은 척 거실을 빙글빙글 돌고 컵을 들고 정수기와 식탁 사이를 왕복한다. 그렇게 30분을 어물쩍대는 쩡이와 쭌이의 말로는 엄마의 불호령이라는 비극으로 마무리된다. 이러한 하루의 마무리는 내게도 유쾌하지 않긴 마찬가지다.      

쩡이의 그림

맘; "쩡아, 이 그림 언제 그린거지? 잘 그렸대이"    

딸; "어... 어제 전에 그렸어."    

맘; "어제 전?"    

딸; "The day before yesterday."    

맘; "한국말로 그게 뭐지?"    

딸; "...."    

아들; "아이고, 쩡이 니는 그것도 모르나. 어저께라고 해야지."    

맘; ".... 쭌아, 어제나 어저께나 같은 거야. 그저께라고 하는 거야."    

쭌; "아...."        


어정쩡한 한국어와 영어의 콤비네이션이 순간순간 나의 숨통을 조여 온다. 이대로는 안된다. 시급한 조치가 필요했다. ‘밥은 엄마랑 수업은 선생님이랑 숙제는 스스로’라는 원칙을 강하게 믿고 있는 나다. 이것만 잘 지켜도 가정의 평화를 반은 지킬 수 있기 때문이다. 하지만 the day before yesterday를 어저께라고 확신하는 아이들의 대화를 듣고 있자면 깊은 고뇌에 빠진다. 1학년 한 학기만 마치고 하노이로 온 쩡이는 변명의 여지가 있다. 하지만 부산에서 독서상을 포함해 제법 많은 상을 받던 쭌이는 달랐다. 나름 국어 똘똘이라고 믿었기에 그 충격이 더 컸다. 결국 내가 나서 악역을 자처할 수밖에 없다. 아이들을 책상에 앉히기까지는 불변의 3 단계를 거친다. 어르고 달래는 회유, 국어의 중요성을 피력하는 설득 그리고 강한 경고를 동반한 화를 내기가 그러하다. 물론 바로 1, 2 단계를 생략하고 3 단계로 직진하는 경우가 점점 늘고 있지만 말이다. 그렇게 한바탕 실랑이를 벌이고 나면 아이들은 일기에 '엄마가 화내니까 쓴다.'라는 문장으로 복수를 해온다. 쓸 것도 없는데 엄마가 화를 내서 쓴다는 문장에 나 또한 많은 생각들이 스쳐 지나간다. ‘그냥 한국 가서 시작할까? 귀국하면 어떻게든 되지 않을까?’ 하는 마음과 ‘이대로 가다간 이도 저도 안 되는 빙구가 될 거야’ 하는 내적 갈등이 일어난다. 하지만 단언컨대 예비 4학년과 6학년 평균에는 턱없이 부족한 국어 실력이다. 그리고 포기하기에는 아직 이르다. 하마터면 쩡이의 꾹꾹 눌러쓴 손 글씨에 마음이 약해질 뻔했다. 엄마는 포기할 수 없다. 더욱이 한국어는 모국어가 아닌가.     


사실 주재원으로 오기 전부터 우려한 부분이었다. 많은 주재원 가정들의 핫 토픽은 역시 언어 다. 자칫하면 어중간한 영어에 한글마저 또래보다 뒤처진 채 귀국할 수도 있다. 학교 수업은 물론 영어도 한국에서 공부한 아이들과 비교해 그다지 앞선 수준이 아니라는 것이다. 이건 정말 피하고 싶은 시나리오이지만 주재원들 사이에 괴담처럼 오르내리는 이야기다. 우리 부부가 가장 우려했던 부분이 현실화될까 두려웠다.    

한국인 가정이 비교적 적은 호떠이에 살기로 결정했을 때도 가장 큰 고민은 역시 학원이었다. 한국인이 많은 경남아파트 지역은 사교육 인프라가 한국 못지않다. 학원이나 교습소도 많고 과외 선생님들을 구하기도 쉽다. 따라서 귀국 전 학원에서 한국 교육과정의 선행학습이라는 암묵적인 법칙이 존재한다. 이는 중고등학생뿐만 아니라 초등학교 고학년도 해당이 된다.     

하지만 여기는 어디? 호떠이다. 그리고 베트남에서 교육의 가장 변두리에 있는 우리들에게 한 줄기 빛이 되는 존재가 있었다. 그건 바로 한글학교다. 하노이 한국 국제학교에서는 다른 국제 학교를 다니는 학생들을 위해 주 1회, 매주 토요일마다 4교시의 수업을 학년별로 수업을 진행한다. 정규 교과서로 받아쓰기(고학년은 하지 않는다.) 시험까지 치는 한글학교의 수업에 만족하는 편이었다. 4학년부터는 국어뿐만 아니라 사회나 역사까지 들어가 있었다. 셔틀까지 운행을 해주어 안 할 이유가 없었다. 한글학교 수업과 숙제만 잘해나간다면 100 프로는 아니라도 어느 정도는 보충이 가능하다는 판단이 섰다. 선생님들도 친절하고 같은 학교 친구들도 있다며 즐거워했다. 노트부터 교과서, 파일까지 모든 준비물은 학비에 포함되어 있었다. 이보다 더 완벽할 수가 없었다. 하지만 올해는 코비드로 그마저도 불가능하게 되었다. 그래서 점점 어눌해져 가는 쭌이와 쩡이의 한국어에 걱정이 커지고 있다. 물론 상황이 잠잠해지고 학교가 다시 열린다면 제일 먼저 한글학교 등록을 할 것이다. 하지만 온라인 수업을 한 지 1년이 다 되어가는 이 시점에 그게 언제가 될지 아무도 모른다.    


딸; "아빠도 공부해야지."    

아빠; "아빠 지금 주식 공부 중인 거 안 보여? 이게 다 우리 가족을 위한..."    

딸; "유튜브 보고 있잖아!"    


아이들의 일기장

남편이 퇴근하고 집으로 왔을 때까지도 공부시간이 계속되기도 한다. 그러면 그는 눈치를 슬금슬금 본다. 발소리도 죽인 채 소파와 물아일체가 되어 조용히 핸드폰에 시선을 고정시키는 것이다. 내 목소리의 톤이 올라갈수록 볼륨은 한 칸씩 내려가고 동영상을 무음으로 보고 있다. 쩡이는 문득 이런 상황이 불공평하다고 느낀 걸까. 어느 날부터는 아빠도 마음 편히 쉬고 있을 수만은 없게 되었다. 피곤해서 쉬고 싶다고 눈물로 호소해 봐도 소용없다. 잔뜩 커진 콧구멍으로 씩씩거리며 거친 숨을 내뿜기 시작하면 그 누구도 딸을 막을 수 없다. 어쩔 수없이 남편은 갑분 학생이 되어 책상에 앉는다. 그럼 쩡이는 세상에 둘도 없는 엄격한 선생님이 된다지. 팔짱을 낀 채 짝다리를 짚고 선 쩡이! 그렇다. 그녀는 나를 흉내 내는 것이다. 아찔할 정도로 닮은 포즈와 말투에서 현기증이 날 정도다. 이건 9년 하고도 반년을 산 딸의 지능적인 맥이기인가.   

 

9시쯤이 되면 일기와 국어까지 모두 끝이 나고 드디어 잠자리로 갈 시간이다. 모든 에너지를 불태운 나는 좀비가 되어 탄산수 하나와 아이패드를 겨드랑이에 끼고 방으로 퇴장한다. 아이들을 재우는 건 남편의 몫이기에 전날보다 만 '마츠 다카코'의 드라마를 켰다.     


얼마 전 프렌치 친구인 P와 아이들을 데리고 점심 식사를 했다. 쭌이와 동갑이자 같은 반 친구인 C가 P에게 프랑스어로 “엄마, 아몬드가 영어로 뭐였지?”하고 물었다. 이에 P는 ”알망.”이라고 대답을 했다. 학교에서 상이란 상은 모두 휩쓸며 똑똑하기로 소문난 우등생 C도 프랑스어를 까먹긴 똑같았나 보다. 역시 쩡이와 쭌이 이 둘만의 문제는 아니다. 왠지 위안이 되는 순간이었다.   

  

P.S. 한글학교는 학기 중에는 신입생을 받지 않는다. 하노이 한국 국제 학교의 홈페이지에 들어가 보자. 오른쪽 상단에 주말 한글학교를 클릭하면 신입생 모집 기간이 나와 있다. 나도 학기 중에 수업 문의 이메일을 보냈으나 답이 없었다. 신청 기간을 꼭 참고하도록 하자. 담임  선생님들은 개인 카톡으로 등교나 지각을 꼼꼼하게 챙겨 주신다. 역시 한국의 시스템이 우주 최고! 단, 숙제의 강제성은 없는 편이니 보모님의 서포트 여하에 따라 그 효과는 다를 수 있음을 주의하자. 셔틀과 학비를 합쳐도 굉장히 합리적인 가격에 놀란다. 물론 첫 입학금은 따로 있으나 이건 한 번만 내면 되는 그야말로 입학금이다. 입학금은 200 달러( USD는 베트남 동으로 환산해서 단톡에 따로 알려 주시니 동으로 입금하면 된다.)이며 수업료도 200 달러로 동일하다. 통학비는 50 달러인데 이는 매 달이 아니라 학기 통틀어서 환산된 금액이다. 학기는 3 - 6월과 8월 말 - 12월 초로 각 14주로 나누어진다. 오전 시간이 길게 느껴질 수 있지만 일단 보내 놓으면 눈 깜박할 사이에 하교 시간이 된다. 토요일 오전 아이들을 한글학교에 보내고 베트남어 과외를 받던 그 시절, 그립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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