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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하노이 민언냐 Feb 02. 2022

목숨 건 모노폴리로 엿보는 뜨거운 베트남 역사

슬기로운 실내 생활, 하노이오폴리

"Rue De La Soie?(휘 드 라 수아)"

"항 다오(ng Đào) 찾아봐라."


우리는 지금 피터지는 모노폴리 아니 하노이오폴리를 하고 있다.


하노이에서 새롭게 시작한 온 가족 여가 활동 중 하나가 바로 보드게임이다. 작년 이맘때쯤 이웃의 일본인 가족으로부터 보드게임을 추천받은 것이 그 시작이었다. 하지만 그때만 해도 온라인 수업을 하는 아이들의 스크린 타임을 조금이라도 줄이기 위한 궁여지책이었을 뿐이다. 함께 하는 건 체스뿐, 보드게임은 온전히 아이들의 오락으로 생각해왔다. 하지만.. 지금은 체스보다 보드게임에 더 열을 올린다. 코비드 확진자가 매일 3000 명을 기록하고 있는 하노이에서 ‘슬기로운 실내 생활’을 위해 이보다 더 좋은 활동이 없다. 게다가 이번 주는 베트남 연중 최대 명절 '뗏'(베트남의 구정)이다. 일주일 내내 97프로의 가게, 레스토랑이 문을 닫는다. 그래서 집 밖을 나가도 찬 바람 싸다구만 실컷 맞고 올뿐이다. 빨간 볼과 콧물은 덤이고 말이다. 반강제 격리생활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아이들; “1, 2, 3, 4, 5! ”


땅부자 쩡; “엄마, 내 땅이다.”


부자 상인 쭌; “이번에도 쩡이한테 다 털렸네. 엄마 벌써 파산이네. 땅 은행에 다 팔아야겠다.”


저돌적인 신흥 갑부 남편; "자기뿡, 건물 하나로 끝날 일이 아닌데.."


파산 직전의 나; “윽! 은행 차압이가. 이 땅 팔고 하노이 역도 팔고.. 뭐꼬~ 살 때 반값도 안되네.”


'Rue De La Soie(휘 드 라 수아)'는 오늘날의 'Hàng Đào(항 다오)'다. 과거 프랑스의 지배를 받은 1800 년 중반에서 1900 년대 까지 '휘 드 라 수아'로 불렸다. 뜻은 '실크(Soie)의(De) 거리(La Rue)'로 베트남어로 'Hàng'은 상품, 'Đào'가 붉게 물들인 실크(복숭아란 뜻도 있다.)를 뜻하니, 의미는 같은 셈이다. 그리고 나는 지금 이 '항 다오'에서 최대 핀치를 맞이하고 있고 말이다. 돈맛을 보기도 전에 스스로 발등을 찍어버리다니.. 제대로 시작하기도 전에 땅부자의 마수에 걸려 파산할 지경이다. 어떻게 세운 건물과 땅인데, 여기서 무너질 수 없다.

“앗싸! 아빠 이번에도 'Courthouse'(법원)에 걸렸다. 돈 낼 거야? 아니면 한 판 쉴 거야?" (법원에 걸리면 75p를 내던가 게임을 한번 쉬어야 한다.)


주사위의 저주로 남편은 이번 판만 세 번째 법원행이다. 부동산 거래가 잦아지면 법원 갈 일도 있다는 걸 보드로 체험한다. 현실에선 생전 알 일이 없지만 말이다. 세상 진지하게 돈과 보드 판을 번갈아 보는 그는 저돌적인 투자로 이미 자금 손실이 컸다. 결국 쉬기로 결정했다. 보드게임의 가장 좋은 점은 무료한 시간을 두뇌 회전으로 승화시킬 수 있다는 것이다. 휴일이 되면 11년 10개월 그리고 9년 7개월 만에 ‘아무것도 하기 싫어 증’이라는 중증을 경험하게 된 쭌이와 쩡이를 볼 수 있다. 좀비처럼 소파에 착 붙어 누워있는 것이다. 그리고 그 옆에는 뭐라 시키고 싶어 안절부절못하는 엄마의 모습을 볼 수 있고 말이다. 이럴 때, 필요한 건 보드게임이다. 보드를 촤악 하고 펼치는 순간 눈빛 바뀌며 몸을 움직여 소파와 분리된다. 스르르 바닥으로 내려와 유튜브를 클릭하던 손가락으로 두 개의 주사위를 던지며 각자의 말 움직인다. 자금 확보와 땅 매입을 위한 치열한 눈치작전두뇌싸움의 막이 오른다.

“누가 Rue Des Changeurs 샀나?”


'Rue Des Changeurs'(휘 데 샹져흐)는 오늘날 Hàng Bạc (항 박)이다. Changeurs'샹져흐'는 불어로 회계 또는 칩 교환계를 뜻하며 Bạc'박'은 베트남어로 '은'을 뜻한다. 이 또한 당시 화폐를 연상시키는 단어들이다. 뜻만 알아도 그 기원이 연상되는 이름이 많다.

19세기 하노이를 그대로 재현한 게임 덕분에 의도치 않은 교육적 효과를 보고 있다. 바로 역사 공부다. 베트남 역사에서 프랑스는 빼놓을 수 없다. 나폴레옹의 식민정책에 1957년 다낭을 시작으로 이듬해, 남부 도시인 사이공(당시 쟈딘, 현재 호찌민 시)까지 함락되었다. 1860년 초 콜레라와 장티푸스의 발병으로 다낭(당시 Tourane)은 포기했지만 1861년 초 프랑스는 70대가 넘는 전함으로 다시 한번  공격을 해왔다. 이름만 조약일 뿐 찬탈에 가까운 사이공 조약으로 본격적인 지배가 시작된 것이다. 당시 프랑스의 지배를 받은 사이공은 동쪽의 파리( The Paris of the East)라고 불릴 정도였다.


수도인 하노이 또한 침략을 피하지 못했다.1882년부터 공격을 받지 '검은 깃발 군대'로 불리던 베트남의 군대가 방어를 해낸다. 하지만 이도 오래가지 못했다. 뚜득왕이 죽고 1883년 8월, 하노이도 결국 함락되고야 만 것이다. 통치에 대한 항거는 계속되지만 구금과 추방 등으로 탄압을 받단 것은 말하지 않아도 알 것이다.


베트남 또한 한국처럼 세계 2차 대전 당시 일본의 지배를 당했다. 전쟁이 끝날 무렵 종전의 기쁨도 잠시 다시 한번 서양 열강들에 의해 남, 북으로 나눠지는 아픔을 겪 된다. 이 또한 동질감이 느껴지는 대목이다. 남베트남(사이공)은 영국이 그리고 북부는 중화민국의 지배를 받게 된. 하지만 프랑스는 영국에게 지배권을 넘겨받아 중화민국을 몰아내고 베트남 전역 통치한다. 우리가 잘 아는 호찌민을 중심으로 8년의 전쟁 끝에 베트남 독립 쟁취하고 말이다. 그래서 당시 화폐는 물론 지명에서 프랑스의 흔적이 고스란히 담겨있다.


이뿐만이 아니다. 베트남어에서 프랑스어를 찾아볼 수 있다. 비누 'savon'(사봉) 'Xà phòng'(사퐁), 배낭 'valise'(발리즈)를 'ba lô'(발로) 등로 표기한 단어들이 그러하다. 특히 의복에 관한 용어는 불어를 베트남으로 옮긴 것이 많다. 트인 'curroie'(뀌호아)는 'curoa'(꾸죠아)로 넥타이 'cravat'(크라밧)이 'cà vạt'(꺄밧), 양복인 'complet'(꼼쁠레)는 'com lê'(꼼레), 셔츠 'chemise'(슈미즈)를 '-mi'(서미)등 수도 없이 많다. 랑스로부터 전파된 문화의 한 부분이기에 외래로 자리 잡은 것이다.


사실 베트남의 역사는 한국을 연상시키는 부분이 많다. 끝임 없 독립운동물론 전쟁을 거치며 의지와 관계없이 강대국에 의한 분단이라는 뼈 아픈 역사까지 말이다. 하지만 프랑스를 향한 온도가 우리가 일본을 향한 것과는 다름을 느꼈다. 당시 상당수의 베트남 사람들은 프랑스의 지배를 반기기도 했다고 한다. 물론 한국 또한 친일파가 존재하고 지금까지도 그 잔재를 청산하지 못한 부분이 있다. 하지만 세로 쓰기에서 가로 쓰기로 바꾸고 한자 표기를 지양하는 등의 문화적인 변화에서 일본식 건물을 허물고 국민학교를 초등학교로 바꾸는 등의 사회 시스템적인 쇄신까지 전반적으로 일본의 흔적을 지우고 재정비하려는 노력을 해왔다. 가령 일제 강점기를 재현한 모노폴리가 한국에서 제작된다면 출시는커녕 해당 업체와 기획자는 테러를 당할 가능성도 있다. 하지만 베트남에서는 다르다. 빈티지라는 이름으로 역사적인 특산품으로 재창조된 점이 다르게 느껴졌다.  

당시의 도시 모습과 간단한 설명이 흥미롭다.

"'뤼 드 라 컨세션'(Rue De La Concession)은 아무도 안 샀제?"

"쭌아, '뤼'가 아니라 '휘'다. '휘 드 라 꽁쎄쑝'"

"아, 맞다. '휘'."


또 다른 의외의 교육 효과는 불어다. 아이들은 학교에서 제2 외국어로 불어를 배우고 있다. 사실 효과라 할 만큼 대단한 성과는 없다. 그저 아예 안 하는 것보다는 낫다는 정도다. 기껏해야 화폐에 쓰인 숫자를 읽는 정도이기 때문이다. 쭌이는 아직도 'rue(휘 ; 불어에서는 R을 H로 발음한다. 뜻은 '길')'를 영어 발음 ‘뤼’로 읽어 늘 지적을 받곤 한다. 하지만 엄마의 잔소리에 대처하는 자세가 다르다. 평소라면 15도의 미묘한 턱 돌림으로 삐딱한 자세부터 잡는다. 한 귀로 듣고 한 귀로 흘리는 것이다. 하지만 게임에 피가 뜨거워진 쭌이는 겸허히 지적을 받아들인다. 실수를 인정하고 바로 발음 고는 관대한 아들이 된다. 예비 초딩 6학년의 반항기도 잡는 놀이의 힘이란, 실로 위대하다.


아이들에게 물려줄 제대로 된 유산이라고는 기대할 수 없는 우리 부부 취미부터 취향 그리고 식성까지 모조리 다르다. 하지만 삶의 모토만큼은 비슷다. 있을 때 잘 먹고 잘 놀고 잘 쓰다가 턱 밑까지 빠듯해질 때 아껴 살자는 주의다. 그리고 우리는 하노이오폴리에서 이번 생에서는 인연이 없는 부동산 투자를 하며 대리 만족을 하고 있다. 쩡이는 내가 파산을 할 때면, 한없이 안타까운 표정으로 몰래 돈을 찔러주려고 다. 이내 쭌이와 남편에게 걸려 제재를 당하고 불발되지만 말이다. 결국 나는 쩡이 효심을 가슴속 깊이 기억하겠다며 장렬하게 게임에서 하차한다. 늘 공격적인 투자 전력을 세우는 남편은 운에 따라 게임에서 지기도 하고 승자가 되기도 한다. 쭌이는 가장 먼저 나가떨어지는 나를 보며 싱긋이 웃을 뿐이다. 하지만 두 번째로 쩡이의 땅을 밟아 파산한 쭌이는 얼굴이 붉으락푸르락해졌다. 돈 잃고 기분 좋은 사람은 없는 법이지. 오늘의 게임은 쩡이의 완승이었다. 하노이오폴리를 주문할 때는 4만 원이 훌쩍 넘은 가격에 주춤하기도 했다. 하지만 지독한 지루함에 매몰된 총기 잃은 눈동자의 아이들도 승리를 위해 치열한 두뇌싸움을 벌이는 모습을 보면 사길 잘했다는 생각이 든다. 그 찬란한 경제관념이 실생활에서도 빛나길 바란다.



보드게임을 받고 신이 난 쩡이와 쭌이

P.S. 하노이오폴리를 손에 넣는데 꾀 오랜 시간이 걸렸다. 사이공을 테마로 한 Saigon-opoly는 항상 재고가 있지만 하노이오폴리는 완판 되어 한동안 재입고가 되지 않고 있었다. 한 달을 넘게 재입고를 손꼽아 기다렸다. 컬렉티브 메모리라는 최애 선물가게에서 주문을 했는데, 처음에는 가격의 사악함에 주저한 것도 사실이다. 플라스틱 화폐도 아닌 종이로만 제작된 보드게임이 850,000 동(한화로 42500원)이라니.. 하지만 눈물을 머금고 샀다. 그러나 등 밑이 어둡다고 했던가. 일주일 뒤 10만 동이나 싸게(한화로 5천 원) 파는 가게를 집 앞에서 발견했다. 배송비까지 줘가며 산 나는 피눈물을 흘렸다. 컬렉티브 메모리가 다소 비싸다는 것은 알고 있었지만, 만 동도 아니고 10만 동이면 5천 원이다. Quán ăn nh dân(꽌 안 빈전, 로컬저렴한 대중식당)에서는 쌀국수 '퍼' 두 그릇이 아닌가. 호떠이의 'BETTER WORLD HANOI'라는 가게에서 75만 동에 같은 제품이 판매되고 있으니 참고하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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