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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하노이 민언냐 Mar 24. 2022

걸렸던 , 걸린 , 걸릴 우리들의 자세

확진자 폭발 하노이 생존법             일러스트BY하노이민언냐


5477, 6860, 7419, 8864, 9836, 10783, 11517...29578, 32650, 31365, 30157, 30693... 16014,13005


​이 생뚱맞은 일련의 숫자들의 정체는 뭘까? 암호? 아니면 대입 합격자 발표?

노옵! 이것은 바로 하노이 확진자 숫자다. 2월 21일 월요일부터 27일까지 매일 앞자리를 갈아치우더니 결국 네 자리 숫자에서 다섯 자리 숫자로 단위로 바뀌었다. 2년 하고도 반년의 코비드 역사를 매일 갱신한 것이다. 2월 11일까지만 해도 3천 명을 넘지 않았는데, 2월 17일에 들어서면서 3893명을 기록하더니 3월 6일에는 3만 명을 거뜬하게 넘었다. 지난주부터 2만 명 대 그리고 이번 주는 만 명대로 떨어져 조금씩 나아지고 있지만 여전히 만 명을 넘기고 있다.


"Hi, Min. Sorry to inform you that I just did...."


"안녕, 민. 이렇게 알려서 미안한데, 나 방금 했는데..."


한 걸음 물러서면 두 걸음 다가오는 진격의 코비드! 베트남에서는 확진자를 F0 그리고 밀접 접촉자는 F1이라고 한다. 하노이도 한국과 마찬가지로 F1도 일주일의 격리를 거쳐야 한다. 물론 요즘은 규제가 많이 완화되어 격리도 권고 수준에 머물고 있지만 말이다. 나 또한 밀접 접촉자로 두 번의 격리를 거쳤다. 특히 첫 격리는 강렬했다. 2022년 1월 1일이었기 때문이다. 우리 가족은 격리 생활로 새해를 열어야 했다. 시작은 늘 장문의 문자다. 특히 'Sorry' 나오면 예감이 좋지 않다. 스마트 왓치에 뜬 메시지를 읽고 뒤통수가 쐬해짐을 느꼈다. 아이들의 중국어 선생님인 R이 확진 판정을 받았기 때문이다. 우리들은 자연스럽게 F1이 되었고 (지금과 다른) 당시 엄격한 수칙에 따라 일주일의 자가 격리를 해야 했다. 남편은 엄밀히 따지면 F2였기에 격리대상에서 제외다. 하지만 레지던스는 가족 모두 격리하기를 요구했다. 이에 회사는 밀접 접촉자도 아닌 음성인 그가 출근을 하지 않을 이유 없고 출근을 막을 강제적인 규정도 없다는 답변이 왔다. 나중에 알았지만 레지던스 매니저는 남편의 회사에 전화까지 하고 이 상황의 책임은 회사에서 지는 거라고 말했다고 다. 만에 하나 남편이 확진이 된다면 엄청난 비판이 예상되는 후덜덜한 상황이었다. 다행히 우리 가족은 모두 음성이었고 큰 이슈 없이 일상에 복귀할 수 있었지만 매니저와 언성을 높여 싸워가며 출근을 해야 했던 남편을 떠올리면 아직도 식은땀이 다. 그후 우리는 매일 고통의 자가 테스트를 했다. 격리 일주일째 되던 날, 수북히 쌓인 테스터기의 사진으로 음성을 증명하고 겨우 레지던스의 격리에서 풀려났고 말이다. 

자가격리 확진자들의 외출을 허용하는 기사

확진자가 꾸준히 감소 중이라고 해도 여전히 만 명을 넘기다 보니 밀접 접촉자를 가려내는 건 그야말로 사막에서 바늘 찾기다. 1월 아니 2월까지만 해도 아주 엄격했던 보건부 또한 이제는 F0, 확진자들의 외출을 허용한다고 발표했다. 물론 이는 타인과의 거리를 유지하며 마스크를 착용한다는 조건이 따른다. 하지만 낮은 담장 넘어 옆집 안방 티브이까지 보일 정도로 주택가가 굉장히 촘촘한 하노이다. 웬만한 섬 또는 새벽에 길을 나서지 않는 이상 타인과 2미터 거리를 유지할 수 있을지 의문이다. 사실 이렇게 급한 것은 오미크론이 호찌민을 통해 들어온 것도 있지만 무엇보다 연중 대행사인 뗏(베트남의 구정) 연휴가 컸다. 연휴가 기본 일주일이라 대국민 이동이 이루어지기 때문이다. 모두가 우려한 대로 뗏이 끝난 2월부터 확진자가 급증했다. 2월 중순만 해도 6천 명이 되지 않았는데, 3월 5일 만 5천 명대를 가볍게 돌파한 것이다. 2주 만에 2배 이상의 확진자가 나왔으니 너도 나도 불안에 떨어야 했다. 그래서 하노이의 모든 이들이 F1이라고 우스갯소리를 할 정도였다.


사실 2월은 우리 가족에게도 남다른 시련의 시간이었다. 남편의 기사 H가 확진이 된 것이다. 1월에 격리를 했는데, 또다시 격리를 해야 했. 왜 이런 시련을 안겨주는 걸까 하고 흐린 겨울 하늘을 우러러 울부짖기도 많이 했다. 호떠이에서 뜬금없는 늑대 소리가 들렸다면... 바로 나다. 많은 친구들은 ‘재’ 격리를 하는 내게 “Poor, Min!”이라는 문자로 위로를 했다. 또한 문고리에 과일이나 과자 등의 먹거리를 가져다주는 친구들로 하루하루를 감사히 보냈다. 알아주는 순이가 꽃 그리워할 것을 안 프렌치 B와 일본인 M은 꽃을 선물해주었다. 어여쁜 꽃다발을 받고 분노의 롤러코스터에서 내려올 수 있었고 말이다. (플라워 세이브 더 칠드런!) 아이들은 24시간 파자마 차림이었지만 거의 매일 오는 문 앞 구호품을 확인하느라 나름 바쁘게 지냈다. 그리고 사진을 찍어 감사의 메시지를 보내는 일이 소소한 일상이자 기쁨이 되고 있었다. 무엇보다 다행스러운 것은 가족들은 모두 무사했다는 것이다. 두 번째 격리도 그렇게 무탈하게 낼 수 있었다.

감동의 구호품들

"Min, you won't believe this but I am positive. And my kids are also..."


“How are you, Min? Unfortunately , H got covid…”


“Hey, you know what? We start quaratine today because of J. He got Covid.”


“민, 믿기 힘들겠지만 나 양성이야. 그리고 우리 애들도..”

“잘 지내지, 민? 불행히도 , H가 코비드래.”

“민, 있잖아. 우리 오늘부터 J 때문에 쿼런틴 시작이다. 코비드 걸렸어.”

격리 중인 이웃들과 격리 테이블

하지만 심상치 않은 장문의 문자가 오면서 적신호가 켜지기 시작했다. 평소 아이들은 물론 엄마들끼리도 친하게 지내는 프렌치 친구 P의 문자는 충격이었다. 격리가 끝날 쯔음, 싱가포르 출장을 간 남편을 제외하고 세 명의 아이들과 그녀가 모두 양성 판정을 받은 것이다. 메트로폴 하노이 호텔 바게트를 최고로 꼽는 그녀는 손수 바게트를 사다 주기도 했다. 그녀의 도움으로 조식과 간식을 가뿐하게 해결해왔건만.. 그녀가 확진이라니 믿을 수 없었다. 더욱이 우리의 생활패턴은 아주 흡사했다. 최대한 외출을 삼가고 건물이나 정원에서 서로 만날 뿐 다른 접촉은 지양하던 우리였다. 하지만 이건 시작에 불과했다. 우리 가족이 놓친 일주일간의 시간 동안 하노이는 180도 바뀌었다. 그녀의 문자를 시작으로 옆집 E의 남편 그리고 세 층 위에 사는 K의 남편 또한 확진되었다는 소식을 전해 들었다. 그쯔음 되니 폰이 울리기만 해도 칫 놀라게 되었다. 코비드가 폭발적으로 증가하기 시작한 것이다. 당시 나는 다시 자유로운 몸이 되었지만 정작 분위기는 훨씬 경직되어있었다. 자고 일어나면 층마다 문 앞에 작은 테이블이 하나둘씩 놓여 있었다. 이는 밀접 접촉자의 구분이 힘들어지면서, 테이블을 목격한다면 십 중 팔구는 F0 즉 확진자가 있다고 봐야 한다. 격리를 겪어본 이들은 알겠지만 F1은 코비드에 걸렸을까 불안에 떨고 F0는 최근 만난 사람들을 떠올리고 사죄의 문자를 돌리느라 육체적 정신적 압박을 받는다. 어느 쪽이 되었든 유쾌한 경험이 아니다. 나 또한 친한 일본인 친구 A의 사죄 문자를 받았다. 그녀는 8년이라는 긴 하노이 생활을 마감하고 2월 28일에 귀국을 하기로 되어있었다. 하지만 2월 26일에 받은 PCR 테스트에서 전원 양성이 나왔다. 무증상이니 어떻게 해도 그녀로서는 알 길이 없었을 것이다. 그녀는 결국 비행기 표를 취소하고 귀국 날짜에 맞춰 받기로 한 이삿짐의 날짜를 재조정해야 했다. 또한 계약기간이 끝이 난 그녀로서는 일주일의 방값을 사비로 충당함은 물론 인당 10 만원이 훨씬 넘는 4인 가족의 PCR Test를 다시 했다. 모든 것을 재조정하고 예상치 못한 지출을 감수하느라 정신이 없었지만 그녀는 쭌이와 절친인 아들 K를 우리 집에서 놀게 한 것에 연신 사과를 하고 있었다. 오히려 괜찮다고 안심시킨 건 내 쪽이었다. 알고 보니 나뿐만 아니라 많은 이들이 그녀의 사과 문자를 받았다고 했다.

작은 스마트 폰을 잡고 안절부절못했을 그녀가 상상이 되어 안쓰럽기까지 했다. 나 또한 그녀가 한 것처럼 과자와 과일 등을 문 앞의 테이블에 놓으며 힘내라는 말을 전했다. 매일을 서로의 안부를 묻고 응원을 하며 일주일을 보냈고 겨우 음성 판정을 받아 귀국을 할 수 있었다. 그녀와 나는 서로를 포옹하며 눈물을 보였고 지금도 아이들의 사진을 보내고 안부를 묻는 사이가 되었다.


대학생들의 인터뷰 기사

그리고 얼마 전, 베트남 신문에서 흥미로운 기사를 접했다. 코비드하면 소상공인을 떠올리지 않나. 하지만 이 기사는 대학생들의 인터뷰로 생각지도 못한 또 다른 문제를 지적하고 있었다. 헤드라인은 'Dở khóc dở cười sinh viên năm nhất vừa lên Hà Nội  thành F0'으로 '하노이 오자마자 확진된 울지도 웃지도 못하는 남자 신입 대학생'이란 뜻이다. 사실 베트남 정부는 2월, 온라인 수업을 중단을 결정하고 학교를 다시 열 것을 발표했다. 지방이 본가인 대학생들은 서둘러 기숙사와 방을 구해, 하노이로 와야 했다. 하지만 확진자가 초고속 증가세를 보이자 계획은 무산되었다. 개강 3일 전에 결정을 엎어버린 정부의 발표는 더 큰 혼란을 야기하고야 말았다. 학생들은 본가로 돌아가고 싶어도 이미 지불한 집세에 울며 겨자 먹기로 하노이에 갇힌 신세다. 부랴부랴 하노이로 상경했건만 여전히 온라인으로 수업이 진행되니 얼마나 답답하겠는가. 또한 많은 기숙사들은 상황을 한층 악화시키고 있었다. 대부분의 기숙사와 하숙은 다인실이라는 것이다. 따라서 한 명이 걸리면 단체로 걸리고 옆 방의 밥을 같이 먹은 친구도 전 건물에 코비드가 번지는 것은 시간문제라는 것이다. 실제로 인터뷰 중에는 4인실에서 3명의 룸메이트 양성인 경우가 있었다. A는 자신을 제외한 모두가 확진자가 되어버린 상황을 어떻게 받아들일지 모르겠다며 어려움을 토로했다. 또 다른 신입생 B는 아직 음성이었지만 정작 두려운 건 따로 있었다. 코비드가 주는 육체적인 고통은 이겨낼 자신이 있다고 했다. 하지만 그보다 더욱더 무서운 것이 만약 자신이 걸렸을 때, 주위에  확산시키지 않을지를 더 무서워했다.


한 번은 모 커뮤니티에서 코비드에 걸리고 눈물의 사과문을 올린 웃픈 일이 있었다. 공인만이 하는 사과문을 일반인이 할 수 있다는 것에 더 놀랐다. 심지어 커뮤니티가 뭔가요? 먹는 건가요? 수준의 먼지 같은 존재인 나로서는 그들이 누구인지 조차 전혀 알지 못했다. 알지도 못하는 사람으로부터 너무나 정중한 사과문을 읽자니 오히려 내가 더 미안한 마음이 들 정도였다. 알고 보니 걸렸다는 소식과 함께 신상이 탈탈 털리고 동선까지 공개되자 여기저기서 원망과 질타가 쏟아진 모양이었다. 마치 온 하노이를 뒤집을 만큼 중죄를 범한 듯 공개 사죄까지 하는 것을 보니 그 압박과 무게가 묻지 않아도 짐작이 갔다. 몸이 아픈 것도 서러운데 연신 죄인 모드로 모르는 이들에게 까지 공개 사과문을 올려야 하는 그 가족의 심정은 어땠을까. 완치가 된다고 해도 그때 받은 마음의 상처는 쉽게 낫지 않을 것 같았다. 코비드라는 바이러스보다 공포와 불안이 더 사람을 아프게 하는 게 아닐까 하는 생각도 들었다.

점점 감소하고 있는 확진자 수

물론 이 또한 개월 전에피소드로 요즘 같이 확진자 또는 완치자가 흔한 시기와는 온도차가 있다. 오히려 요즘은 코비드에 걸리지 않은 이들을 보고 어떤 삶을 살았는지 의심이 된다고도 하지 않나. 프랑스어 온라인 수업을 하며 요즘 사람을 세 부류로 나눈다고 농담을 한 적이 있다. 이미 ‘걸렸던 자’, 지금 ‘걸린 자’ 그리고 앞으로 ‘걸릴 자’로 말이다. 걸렸던 이들은 안심하고 걸린 이들은 차라리 잘 됐다는 생각도 한다. 아직 걸리지 않은 이들은 앞으로 걸릴 것 기다리며 살고  말이다. 그리고 S는 이 말에 크게 동감하며 웃었다. 1년이 넘게 온라인 수업을 하며 장보기 이외에는 외출을 자제하던 그녀는 지난달 코비드에 걸렸다. 논스톱으로 기침하던 플랫 메이트의 여자 친구 때문에 말이다.

국적이나 신념이 아닌 바이러스가 정체성의 한 조각이 되어 가는 코비드 시대! 하지만 몸은 바이러스에 내어줄지언정 마음만은 흔들리지 않기를 바라본다. 서로를 향한 원망보다 뜨끈한 위로와 작은 구호물품이야 말로 코비드에 맞설 최고의 무기 아닐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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