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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잽잽 Apr 21. 2023

마흔, 복싱 글러브를 끼다

마흔 살의 복싱일기 -1

  늘 그렇듯 무기력한 금요일 퇴근 후였다. 거실 소파에 가만히 앉아있었다. 일을 끝낸 안도감과 뭐라도 재밌는 걸 해야할 것 같은 묘한 불안감이 뒤섞여있었다. 결혼하고부터 불금이라는 개념은 당연히 사라졌지만 딱히 아쉬운 적은 없었다. 다만 금요일의 퇴근은 늘 월요일의 출근과 맞붙어있는 느낌이었다. 빨리 뭔가 결정해야 할 것 같은 초조함, 누군가 저기서 쫓아오는 듯한 불안감이 늘 함께했다. 


  내게 주어진 주말 이틀의 시간, 그 안에 나는 충분히 행복을 누리면서 동시에 다시 회사로 나갈 수 있는 몸과 마음을 만들어야 한다. 고무줄을 늘리면서 당겨야 한다. 아주 어려운 숙제다. 게다가 30대 가장에게 이틀은 그리 긴 시간이 아니다. 그날처럼 비가 오다 말다를 반복하면 마음은 더욱 오락가락한다. 뻐끔뻐끔 졸음이 왔다.


  "아빠!!! 비가 그쳤어요!"


  베란다 창밖을 하염없이 바라보던 아들이 소리쳤다. 7살 아들은 사람이라기보단 말하는 강아지다. 틈만 나면 공을 들고 밖으로 나가야 한다. 3살 걸음마를 시작할 때부터 아이의 주양육자가 엄마에서 아빠로 바뀌었다. 아빠도 집에서 꽁냥거리며 노는 것보단 공 들고 나가는 게 편했다. 자연스레 공놀이를 즐기더니 이제는 정말 메시처럼 뛰어다닌다. 마침 집 바로 앞에는 잔디가 깔린 학교 운동장도 있고 아파트 공터도 있어 아직은 그 꿈을 손쉽게 이뤄줄 수 있다.


  퇴근-출근-주말-인생의 쳇바퀴를 느긋하게 상념하던 나태한 마음을 닫고, 내게 주어진 단 하나의 확실한 '즐거운 일'을 택하기로 한다. 


(다리는 너무 무겁고 허리는 뻐근하고 폐와 심장은 그 자리에 있는지 잘 모르겠지만 신나는 목소리로)

  "그래 그럼 우리 공터에 나가보자!"



  아들과 나는 아파트 공터를 비밀 운동장이라고 불렀다. 사실 그런 공간을 왜 만들었는지 잘 이해할 수 없는 애매한 크기의, 애매한 위치의 우레탄 바닥 공터였다. 그래서 찾는 이도 드물었다. 그래도 키작은 아빠와 아빠를 닮아 키가 작은 일곱 살이 뛰어 놀기에는 안성맞춤이었다. 그곳에서 날뛰는 아들과 놀고 있으면 마치 우리 둘만 그 비밀 공간을 찾아내어 점유했다는 듯 당당한 정복자의 기분이 들었다.


  한참 즐겁게 공을 차고 있는데 슬리퍼 차림으로 한 침입자아저씨가 다가왔다. 나이는 마흔 조금 넘었을까, 익숙하게 담배를 꺼내들더니 불을 지폈다. 우리와의 거리는 약 1미터. 연기가 스멀스멀 이쪽으로 날아왔다. 내가 눈치를 봐서 그런지 아들도 슬쩍슬쩍 담배피는 모습을 신기하게 쳐다보았다. 넓디 넓은 아파트 단지에서 굳이 아이와 아빠가 놀고 있는 곳 옆으로 찾아와 담배를 피우는 게 조금 괘씸했다. 사실 괘씸할 일까진 아닐 수도 있다. 


  그저 내게 주어진 단 이틀을 의미없는 무례함이 방해하지 않았으면... 그런 마음이었다.


  "저 선생님, 죄송하지만 아이도 있으니까요 조금만 떨어져서 피우시면 안 될까요?"


  나는 기본적으로 예의가 바른 편이다. 그건 아주 오랜시간 겁쟁이로, 작은 아이로, 나약한 몸으로 생존하기 위해 터득한 기술이었다. 학교에서도 직장에서도 단호한 예의는 늘 위기를 넘겨주는 좋은 태도였다. 처음 말을 걸 때는 당연히 "아, 네" 정도의 짧은 목례와 자연스러운 마무리를 예상했다.


  "왜요? 내가 여기서 담배 피우는데 당신이 무슨 상관이에요?"


  띠로리.

  이게 아닌데. 무슨 상관인지는 충분히 설명했고, 이건 그냥 대화를 할 의향 자체가 없다는 태도인데. 이게 그럴 만큼 중요한 일인가. 하지만 나는 지금 일곱 살 아들의 눈 앞에 있는 아빠 아니던가.


  "아니요 선생님. 저도 흡연자라 이해합니다만 일단 아파트 단지는 금연 구역이구요, 조금만 걸어가시면 이쪽으로 연기도 안 날아올 것 같아서 드린 말씀입니다."

  "아니 그래서 뒤돌아 피잖아요. 뭔 상관이야."


  언성이 높아진다. 당신이 바람의 아들이라도 되나. 당신이 뒤돌아 피면 바람도 뒤도나. 연기가 이쪽으로 날아온다고. 왜 말을 못 알아듣지. 짧은 생각들은 심방과 심실의 유격을 좁히고 심박수가 빨라진다. 피곤하다. 귀찮다. 피하자.


  "아 네"


  처음에 내가 듣고 싶었던 말이었는데 그냥 내가 했다. 여전히 심장은 두근거리지만, 그것이 분노인지 공포인지 알 순 없지만, 그냥 아들과 하던 일을 계속하는 게 맞을 것 같았다. 아들도 "아빠 왜그래요" 하며 무슨 일인지 설명해달라고 보챈다. 그때 최후의 카운터가 날아왔다. 성큼성큼 그가 다가온 것이다. 슬리퍼가 질질 끌리는 소리가 젖은 우레탄 바닥 위에 길게 이어진다.


  "아니 무슨 상관이냐고"


  그와의 거리는 단 30cm. 얼굴을 자세히 볼 수 있는 거리다. 30cm. 기분이 좋지 않은 거리. 

  나는 이 거리에 익숙하다.



  "왜 꼽냐?"

  25년이도 더 지난 중학교 교정 구석. 30cm 그 거리에 얼굴을 들이밀고 내게 이죽대던 아이들이 있었다. 나는 중학교 입학할 때 키가 고작 137cm였다. 전교에서 두 번째로 작았다. 그렇게 작은 아이는 또래 아이들이 가까이서 내려다보기에 좋은 모양이었다. 한 번도 그렇게 누군가를 본 적이 없어 나야 잘 모르겠지만 그들은 행복해보였다. 아이들은 내가 웃으면 웃는대로 쫄면 쪼는대로 울면 우는대로 바로 그 거리에서 날 보며 행복해했다. 바로 그 거리에서 주먹은 날아왔다. 맞고 나면 울음이 그쳤다.

  


  그날 밤 침대에 누웠다. 아들은 쌔근쌔근 천사처럼 잠이 들었다.

  아까의 일이 머릿속에 맴돌았다. 그 남자를 때리지 못한 것을 후회하진 않았다. 질문 하나가 맴돌았다. 


  애초에 그 거리까지 누군가 다가올 수 없는 사람이 될 순 없는 걸까.
아빠와 키아들의 소중한 이틀에, 무례함은 다가올 엄두도 못 낼 단단한 방어막 같은 건 가질 수 없는 걸까. 


  열이 나는 아이를 들쳐업고 응급실에 가야하니 택시를 좀 태워달라고 해도 나를 아래 위로 훑어보고는 피던 담배나 마저 피우던 택시 아저씨가 생각났다.

  쉽게쉽게 뒤에서 날 욕하고 쉽게쉽게 부려먹는 회사의 여러 얼굴들이 생각났다.

  마지막엔 중학교 교정에서 나를 데리고 논 뒤 돌아서던 그 아이들의 뒷모습-그렇게 폭이 좁았던 그 바지-가 하얀 운동화가, 빨간 가방이, 생각났다.


처음엔 그래서 복싱을 배우기로 결심했다. 세상과 거리를 둘 수 있는 방법을 배우자. 누구도 나의 가드 안으로 내 주먹의 거리 안으로 들어오지 못하게 하자. 


하지만 세상과 거리를 둘 수록 내가 가까이 마주하게 되는 건 나 자신이라는 것을

처음엔 미처 몰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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